일어나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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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는 사람: 유소라, 받는 사람: 배원찬>
민성은 원찬에게 온 편지 한통을 보고 있었다. 원래 군대로 오는 우편은 인사과에서 각 중대로 수령을 해가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편물을 수령하는 트럭을 운전하는 운전병이 본인 중대 우편물은 몰래 빼오는 것이 그들만의 관행이었다. 인사과에서 수령하는 절차도 복잡할뿐더러 본부중대 인사계원이 일일이 편지를 수령했다는 사실을 인트라넷에 기입하고 처리하는 일도 귀찮아했기 때문이다. 또한 택배같은 경우는 간부의 입회하에 뜯어보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간부들 역시 이를 번거로워했고 병사들도 맥x잡지나 기타 물품들을 검열받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자기야..... .... 너 없는 동안 난 열심히 살아..... 휴가 나오면 꼭 한번 보자>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수많은 고무신들이 보내는 다 한결같은 편지 내용이지만 민성의 심기를 거슬리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그 병장이라는 친구한테 잘해줘. 고등학교때나 니 말 들었지, 지금은 너보다 엄연한 상관이잖아.>
병장이 이병의 상관까지는 아닐지라도 이는 선임과 상관을 모르는 여자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말인 즉슨 원찬이 이미 유소라에게 보낸 편지에 민성이 자신의 옛 꼬붕정도라고 소개했다는 뜻이었다. 민성은 지난날의 안좋은 기억들은 본인 또한 상기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치졸하게 묻지 않으려고 했건만 원찬은 아직도 민성이 자신의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민성은 원찬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

편지에는 유소라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는데 원피스인지 슬립인지 모를 가슴의 절반이 드러난 야한 의상을 입고서 입술을 쭉 내밀어 키스하는 듯한 야한 포즈를 취하는 사진이었다. 편지 내용을 보니 이 또한 원찬이 요구한 사진으로 추정됐다. 사실 민성은 그동안 유소라와 카톡을 주고 받았다. 물론 원찬에게 소라의 말을 전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제로 전하는 말은 거의 없었고 유소라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데 더욱 주력했다. 원찬에게 온 편지도 우편물 트럭 운전병에게 함구하라 시켰다. 편지가 왜 이리 안올까 궁금하는 원찬에게는 유소라가 주소를 잘못 적었다든가 군사우편은 누락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둘러대면 그뿐이었다.

편지를 관물대에 넣어두고 유소라의 사진은 지갑에 넣어두었다. 두식이 민성을 찾았다. 같이 중대장한테 가자고 한 것이다. 중대장 실을 노크한 뒤 두식과 민성을 안으로 들어갔다.

-중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두식이 중대장에게 말했다.

-어? 뭔일이야. ㅋㅋㅋ 뭔일이길래 둘씩이나 찾아왔어?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저희 분대가 분대외박을 나가고 싶은데 아무래도 날짜를 조정해야 할 거 같아서 중대장님 허락 구할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래? 두식이 니네 분대면, 다 나가기 곤란하잖아?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당직대기는 중형에서 땜빵 한명 구할 것이고 1호차는 일신이한테 물어봐서 연대장님 운행 없으실 때 그 주에 나가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기 최민성 병장이 그동안 1호차 쭉 하느라 고생했고, 또 이번 분기 아니면 최민성 병장이랑 같이 외박 나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일신이가 문제이긴 하네. 연대장님이 주말에 운행이 없을거라는건 어떻게 확신할건데?
-새로오신 연대장님이 일신이한테 주말에 운행이 있을 경우는 금요일쯤에 미리 말씀 하신다고 합니다.
-니네 신병도 데리고 갈거냐? 걔 아직 자대 온지 백일도 안됐는데 데리고 나가도 되겠어?

중대장이 원찬이 얘기를 꺼내자 반 보 뒤에 서있던 최민성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원찬이는 여기 기두식 상병이랑 제가 확실하게 케어하겠습니다. 신병이라 단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외박 갔다와서는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민성이.. 이새끼. 요새 안보여. 너 요새 어디 짱박혀 있냐? ㅋㅋ
-아이, 중대장님, 저 안 짱박혀 있습니다. 운전교육이랑 운행 땜빵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 ㅋㅋㅋ 너 임마 1호차 떼더니 아주 신수가 훤해졌어. 그럼 연대장님 운행 확실히 없는 날로 해서 수송관이랑 보급관님이랑 잘 이야기 하고 결정해.
-예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

행정반에서 나와 레토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던중 기두식이 물었다.
-최병장, 니 왜 자꾸 원찬이 챙겨? 걔 그냥 놓고 가는게 좋을 뻔 했는데.
-두식이형. ㅋㅋ 다 생각이 있어.

민성은 지갑에서 유소라의 사진을 꺼내 두식에게 보여줬다.

-오! 얘 누구야? 섹시한데?
-원찬이 여자친구래. 나 이번에 얘 부르려고.
-최병장 ㅋㅋ 불러서 뭐 어쩌려고?
-어쩌긴. ㅋㅋ 칙칙한 사내놈들하고만 있는 거보다 여자 한명 있으면 좋잖아. 냄새도 좋고. 보기에도 좋고. ㅋㅋ
-최병장, 군인 아니랄까봐 ㅋ
-형은 모른척 하고 있다가 내가 부탁하는 것만 좀 해줘.
-뭔진 모르지만 탈 안나게 해라. 군복입고 사건 복잡해지면 인생 좆되는 수가 있어. 최병장 니 머리 좋은 놈이니깐 뭐 알아서 하겠지만.

민성이 유소라와 카톡을 하면서 알아낸 것은 원찬이 성균관대가 아닌 숭실대를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군대에 있는 애들은 성균관대가 어딘지 숭실대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애들이 태반일텐데 신병소개때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민성은 의아해 했다. 민성이 의아해 하는 투를 보이자 소라도 원찬이 거짓말을 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민성과 소라는 원찬의 뒷얘기를 하면서 공감대를 이어갔다.


민성은 잡담이라 하려고 두식과 함께 정비고 쪽으로 향했다. 오늘도 역시나 정비왕고인 우근조 병장이 원찬을 갈구고 있었다.

-점프선으로 점프 뛰는 거 몇 번이나 봤다면서 왜 아직도 못하고 있냐?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군생활 끝나냐? 이새끼야. 너 저번에도 배터리 날려먹고 와가지고 점프하나 못뛰고 가뜩이나 바쁜 정비병 애들 불러야겠냐?
-아닙니다. 그치만 우근조 병장님? 저는 운전병으로 온거지, 정비병으로 온게 아닙니다. 차가 꼴았는데 정비할 사항이 있으면 정비병이 해야지, 왜 제가 그런거까지 다 해야 합니까?

민성은 그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식을 바라보았지만 두식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찬에게 달려들어 발로 복부를 걷어찼다.

-야, 이 씨발새끼야. 이 새끼가 완전히 개념을 놨구나. 핸들만 깔짝대면 운전병이냐? 기본적인 것도 못하는 새끼가. 넌 나 있을동안 절대 운행 못나갈테니까 알아서해라. 너 아주 내가 작업병으로 눌러앉혀줄게.

두식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두식의 가격이 충격이 좀 컸는지 원찬은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우근조 병장이 당황했는지 두식을 말리기 시작했다.

-두식아. 그만하면 됐다. 나 다음주에 말출인데, 좋게좋게 하려고. 나는 이제 됐는데 너 참 큰일이다. 폐급 이등병이 나중에 에이급 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포기해라.

우근조 병장은 한숨을 푹 쉬고 운전병 휴게실로 들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원찬은 민성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민성은 애써 그 눈길을 거부했다. 두식은 원찬의 볼을 손으로 꼬집으면서

-너 오늘 저녁먹고 개인정비없이 니 위로 내 밑으로 전원 다 집합하라고 전파해라. 근무 빼고 한명이라도 빠지면 넌 오늘 뒤질줄 알아.
-네. 알겠습니다.

원찬은 힘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민성은 원찬이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저 표정 안으로는 분명히 반성은 않코 다른 이들을 욕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오히려 민성은 왠지 모를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정비고에서 돌아나왔다. 그때 한지연 하사에게 카톡이 왔다.

<민성, 나 지금 사단가야 되는데 너 뭐하니?>
<몇호차로 배차 났는데요?>
<인사과장님 배차니까 6호차겠지?>

민성은 행정반으로 가서 경철에게 갔다.
-경철아, 원재 어딨냐? 방송으로 좀 불러줘라.

원재가 방송을 듣고 행정반으로 들어왔다.

-원재야 너 지금 인사과장님 배차 난거 운행가지?
-예, 지금 오라고 전화왔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어, 그거 내가 갈게. 영내에만 있으니깐 진짜 답답해서 그래. 경철아, 내가 가도 되지?
-그러든가. 그 대신 출발하기 전에 수송관님한테 보고하고 가.
-알았어.

민성은 수송관에게 원재가 배가 아파 대신 운행을 가게 되었다고 신고를 한 뒤 인사과 앞으로 차를 몰았다. 한지연 하사가 조수석에 탔다. 사단 부관부에 서류를 제출하러 간다고 했다.
-어, 이거 뭐야? 과자랑 음료수랑 있네. 이거 먹어도 되나?
-드세요. 원재꺼 같은데 제가 나중에 보충해줄게요.
-너도 먹어. 운전하느라 불편하지?

한지연 하사는 과자를 까서 직접 민성의 입에 넣어줬다. 신호를 받을 때 음료수도 까주고 민성은 흡사 한지연 하사와 드라이브 가는 기분이었다. 레토나는 에어컨이 없어서 창문역할을 하는 비닐을 내리고 운행했는데 그래도 속도를 내서 달리니까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1호차 운전병을 할때는 한지연 하사와 마주치는 일이 많았는데 요 근래 한지연 하사를 볼일이 없어 더욱 반가웠다.

-누나 못보는 사이에 더 예뻐진거 같아요. 이제 진짜 사회에 나갈 준비 하는건가 ㅋㅋ
-와~ 너 이제 아예 누나라고 말 놓는구나.
-병장되면 누나라고 부르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요. 난 약속을 지키는 것일뿐.
-너 진짜 웃긴다. 우리 이러고 둘다 전역해서 만나면 어색할거 같아.
-그나저나 에x랜드는 어떻게 됐어요?
-연가 냈어. 이제 뭐 마지막 연가라 아마 튕기는 일은 없을거야. 우리 평일에 가자. 여름방학 시즌이라 주말에 가면 사람들 엄청 많을 거 같애.

사단부관부내에서 한지연 하사가 서류를 제출하고 볼일을 보는 시간에 유소라에게서 카톡이 왔다.
<원찬이가 조만간 외박 나간다고 하던데, 제가 갈수 있는거에요?>
<그럼요. 오세요. 쪼금 멀지만 하루 넘게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오는게 좋을걸요?>
<거기 가면 어디 갈데 있어요?>
<보통 외박 하는 곳에 먹을곳, 놀곳, 잘곳 다 있어요. 원찬이도 소라씨 보고싶어 하는거 같으니깐 와서 하루 놀다 가세요>

-누구한테 그렇게 카톡을 보내? 여자친구야?
차에 탑승하면서 한지연 하사가 물었다.

-여자친구는 무슨요. 제가 누나 말고 아는 여자가 누가 있다구요?
-아유~ 능글능글 해가지고는... 민성이 너는 여자 안사겨? 사겨본적은 있고?
-....
-없구나. 으이그.. 순진하기는. 좋아하는 애는 있었어?

있었죠. 라고 말하려다가 민성은 그냥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누나랑 외모는 다르지만 분위기가 비슷한 여자가 있었어요 라고 가슴속으로만 말했다.






-너 요새 교회도 안나오고, 나랑 잘 얘기도 안하고, 도대체 왜 그래?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거라도 있어? 있으면 지금 다 말해봐.

윤진이 버스 정류장에서 민성에게 다그쳤다.

-없어. 그런거 없으니까 별달리 할말도 없다.
-너 아무튼 요새 이상해. 내가 원찬이랑 얘기 좀 한다고 이러는거야?

정곡을 찔린 민성은 그 말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쪼잔한 놈으로 보였냐? 말 나왔으니까 하는 소린데 너 요새 원찬이랑 잘 지내더라고. 근데 그게 나랑 뭐? 니가 원찬이랑 친하게 지내는데 그게 내가 너한테 말을 안할 이유라도 되는거야?
-니가 나한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하는 소리지.
-지금은 원찬이 그 놈이 너한테 잘해주겠지만, 난 그놈 실체를 알거든. 너도 지금은 헬렐레 하지만 언젠가 후회할거야
-뭐? 헬렐레? 말 다했어? 내가 언제 원찬이한테 헬렐레 했다고 이러니? 말 참 싹퉁맞게도 한다. 그렇게 남자 답지 못하고 소심하니까 도혁이 같은 애한테 맞...

윤진은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말 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말을 한거나 다름 없었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민성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민성은 남자로써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윤진이를 보면 원찬이가 생각이 나서 아예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왔다. 결국 민성이 본인이 못났기 때문에 좋아하는 여자와도 이렇게 멀어졌다는 생각에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일방적인 승패로 끝나긴 했지만 도혁과의 한판 이후에 도혁은 무력적으로 민성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어적 폭력과 놀림은 갈수록 심해졌고, 그 안에는 항상 윤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원찬이 도혁의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도 이미 민성은 다 알고 있었다. 재욱과 도혁은 원찬의 반에 자주 찾아와 민성과 교류하는 애들을 괴롭힘으로써 은연중에 민성을 고립시키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버티자.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취업을 하고... 그러면서 이 순간을 다 지워버리고 남자로 변하자. 민성을 그 다짐으로 버텼다.




원찬은 폐타이어 적치장에서 타이어를 나르고 있었다. 민성은 운행을 한지연 하사와의 운행 아닌 데이트를 다녀온 뒤 원찬을 찾았다. 원찬은 두식에게 플라잉 킥을 맞은 뒤로 울었는지 눈가가 축 쳐져 있었다.

-유소라한테 연락왔는데 너 외박 나갈수 있냐고 하더라?
-그래서 뭐라고 했어?
-일단은 모른다고 했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나갈 수 있다고 한 뒤에 못 나가는 것보다 모른다고 하는게 차라리 낫지.
-나 나갈수 있는거야 없는거야?
-글세... 두식이 형이 힘은 좀 써보겠지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결정되면 알려줄게.

민성은 시치미를 떼고 원찬의 간을 보고 있었다.

-소라가 편지를 보냈다는데 왜 안오지? 문제가 있는건가?
-올때되면 오겠지. 편지말고 외박 오라고 해. 그러면 확실하지. 내가 힘 한번 써볼게.
-근데 소라가 오면 혹시 너희랑 같이 있어야 되냐?

원찬이 넌지시 물었다. 아마 둘이 같이 있고 싶은 거겠지. 민성은 대답을 얼버무리고 확실한게 결정되면 그때 알려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토요일 밤이었다. 한지연 하사에게 카톡이 왔다.
<자? 나 Y군청인데, 심심하다.>
<지금 몰래 티비보고 있어요 ㅋㅋ>

컨테이너는 행정반에서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몰래 연등이 이뤄지곤 했다. 당직사관이 잘만 걸리면 금요일이나 토요일 같은 경우 티비 연등을 시켜줬는데 컨테이너에서는 당직사관과 상관없이 선임병이 하고싶으면 몰래 연등을 하곤했었다. OCN에서 영화를 해주는 오늘같은 날이면 이미 라면에 과자까지 다 준비해놓고 영화관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 진짜 많이 온다. 이따가 누가와?>
<??? 무슨 말이에요>

민성은 처음에 한지연 하사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임진강은 비가 많이 오면 쉽게 범람하는 강인데, 그날처럼 비가 많이 와서 강의 수위가 어느 정도 이상 올라가면 군청에서 재난 예방 본부를 마련해놓고 연대 간부가 12시간씩 대기를 하는 제도가 있었다. 시간을 보니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밤 12시에 간부를 교체해주는 차가 군청까지 가야하는 것이다. 한지연 하사는 내심 민성이 와 주기를 바라고 그런 카톡을 보낸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당직대기 운전병이 운행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민성은 카톡까지 받아놓고 안 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정일아, 너 이따가 군청 가지?
-네 맞습니까. 이제 슬슬 준비해야됩니다.
-야, 너 영화봐라. 내가 갔다올게.
-정말 입니까? 감사합니다. 최민성 병장님.

환복하려고 고쳐 앉았다가 정일은 다시 엎드려 티비를 보는 자세를 취했다.

-정일이 너 한번을 거절안하고 바로 받아먹는구나? ㅋㅋ
-아.. ㅋㅋ 죄송합니다.

기두식이 정일이를 거들었다.
-최병장, 한지연 하사 퇴근시킬라가 가는 갑네? ㅋㅋㅋ

민성은 환복을 하려다가 그냥 활동복에 간부우의를 입고 신고를 하러 행정반으로 갔다. 마침 당직사관이 당직대기 운전병이 누군지 확실히 모르는 간부였다. 신고를 하려고 하는데 스마트폰을 조물딱만 거리면서 손짓으로만 출발하라는 제스쳐를 취하고 있었다. 민성은 차를 몰고 지휘통제실로 갔다. 지원중대장이 오늘 지휘통제실장이었다.

-민성이, 너 이제 이거 하냐?

1호차를 하면 웬만한 간부랑은 다 친해진다. 지원중대장도 민성과 친한 간부중 한명이었다.

-원래 당직대기 운전병이 있는데 장염이 있는거 같아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그래. 민성이 니가 가면 오히려 더 안심이지. 지금 비 장난 아니다. 절대 30킬로 넘어서 운전하면 안된다. 지금 한지연 하사가 군청에 있거든. 군청 찍고 위병소에서 차 세우지 말고 아예 숙소까지 데려다 주고 와.
-네 알겠습니다.

교대할 간부는 수색중대 류기철 하사였다. 자다 나왔는지 가는 동안 차에서 졸고 있었다. 실제로 거의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빗줄기였다. 민성이 살던 청주같은 충청권은 비교적 자연재해가 덜한 지역이었다. 민성은 이런 비를 처음 보았다. 어지간 하면 빨리 갔다가 빨리 복귀하려고 했는데 이건 자연스레 감속을 할 수 밖에 없는 비였다.

군청에서 류기철 하사가 교대를 하고 한지연 하사와 복귀를 하게 되었다. 마침 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가는 길에 도로상태를 점검했기 때문에 오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한지연 하사의 숙소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군인 아파트에 차를 대고 있는데 한지연 하사가 민성에게 말을 했다.

-비 많이 맞았는데 들어가서 따뜻한 차 한잔 하고 갈래?

민성은 홀린듯이 한지연 하사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2인1실로 방을 쓰는데 룸메이트가 연가를 가서 오늘은 방을 혼자 쓴다고 했다. 우산에 우의까지 입었는데도 민성이나 한지연 하사 비를 꽤 많이 맞았다. 방에 들어서자 한지연 하사는 군복 상의를 벗었다. 안에 입은 내의가 비에 완전히 젖어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타이트하게 붙었다. 수건으로 대충 닦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민성은 이렇게 단둘이 여자와 있어본적이 없어 계속 녹차만 꼴짝거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잡다한 말을 건네는 한지연 하사의 말소리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어색한지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한지연 하사의 입술을 민성은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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