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냥년이다.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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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팀이 배톤루지로 돌아간 열흘 후, 혜경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집들이를 하는 날, 난 남들보다 서너 시간 일찍 혜경의 신혼 집으로 가서 그간 갈고 닦은 요리솜씨를 발휘하기로 했었다.
“너 신랑 미국 가서 심심하겠다, 그치?”
“그러게 말이다. 심심한 건 둘째치고 허전해 미치겠어. 매일 하던 거 안 하니까 너무 허전한 거 있지.”
“미친년…… 아줌마 되더니 낯짝 두꺼워진 거 봐, 이년.”
“호호호…… 넌 아줌마 아냐? 그래 말 나온 김에 신혼여행 얘기나 해봐. 니 신랑하고 속궁합은 잘 맞아?”
“어머~ 미쳤어.”
“뭐 어때? 너랑 나랑 내숭 떨고 그럴 사이냐? 말 해봐. 신랑이 잘해?”
“몰라, 이년아~ 이게 지 신랑 없어서 심심하다고 나한테 들이대는 거야?”
“그래, 이년아. 심심하고 허전해서 미치겠다. 왜?”
우리는 깔깔거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얼마 후 혜경의 남편이 집들이를 돕기 위해 일찍 퇴근해 들어왔다. 건축사인 혜경의 남편은 팀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제법 큰 키에 훤칠한 남자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전 혜경이 친구 수정이에요. 지난번 결혼식 때 인사는 드렸었는데 기억하세요?”
“아~ 네, 수정씨. 혜경이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에 계시다고 하셨죠?”
“네, 이번에 혜경이 결혼한다고 꽤 오래간만에 나왔어요.”
“어이구 멀리서 일부러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혜경이 결혼식은 꼭 와야죠. 내가 업어 키운 아이인걸요. 호호호……”
“아~ 네~ 하하하……”
혜경의 남편인 우석은 외모만큼이나 시원시원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난 둘이 알콩달콩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부러움과 야릇함이 교차하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뜬금없이 두 사람이 섹스를 나누는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저 새신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내 뇌리 어딘가에 박혀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지금이 나 같았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일 뿐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저녁 무렵 들이닥친 예전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오래간만에 옛날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모 집으로 돌아왔다. 팀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혼자 호텔에 있기도 그랬고 허세도 부릴 만큼 부렸던 터라 막내 이모 집에서 지내기로 한 것이었다.
엄마는 다섯 자매 중 넷째였고 막내 이모는 엄마와 연년생이었지만 성격이 쿨해서 나와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이모부는 공기업의 이사로 재직 중이고 하나뿐인 아들은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으로 공부도 꽤 잘하는 잘생긴 녀석이었다. 이모야 말로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여인이었다. 이모의 그런 쿨한 성격은 다 환경이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수정아, 우리 형식이 내년쯤에 미국 보낼까 하는데, 니네 집에서 좀 데리고 있어줄 수 있을까?”
“내년에? 그땐 고 3인데?”
“응, 유학원에 물어보니까 고3 1년을 미국에서 공부하고 명문대에 보내는 게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 집이야 방도 많고 얼마든지 와서 지내도 되긴 하지만 루이지애나에 좋은 고등학교가 있어야 말이지. 그 동네 고등학교들은 엉망이야.”
“그래?”
“응. 나야 형식이가 와있으면 좋지. 이것저것 부려먹기도 좋고…… 근데 유학 보내려면 학교 선택이 젤 중요해.”
“듣고보니 그것도 그렇네. 암튼 너도 좀 알아봐줘.”
“알았어, 이모. 근데 형식이 이 자식은 여태 집에 안 오고 뭐한데?”
“예, 너도 여기서 고등학교 다녔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래? 한국의 고등학생이 11시 전에 집에 오는 거 봤어?”
하긴 그랬다. 형식이는 어렸을 때 유독 나를 따랐던 아이였고 훈남으로 잘 자란 아이여서 한국에 나와서도 자주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게다가 나 역시 친구들 만나러 다니느라 바빠서 형식이만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정신 없이 흘러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일요일에 들어가려면 슬슬 짐 챙겨야겠네. 뭐 사갈 거 있으면 말해. 이모가 챙겨줄게.”
“아냐, 이모. 미국에서도 필요한 거 다 구할 수 있어. 짐 되게 이것저것 사가지고 가고 그런 거 안 해. 그리고 나 토요일에 갈 거야.”
“뭐? 너 일요일에 가는 표 사논 거 아냐?”
“응, 팀 놀래켜 주려고 하루 먼저 들어가려고. 살금살금 들어가서 놀래키면 재미있잖아.”
“니넨 결혼한지 4년이나 됐으면서도 아직 그러고 노니?”
“괜히 딴지 걸지 말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이모.”
하루 일찍 출발하기로 한 건 정말이지 순수한 장난끼였고 깜짝 놀라며 반겨줄 팀의 해맑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마음으로 일정을 하루 앞당겨 집에 도착한 것은 7월말의 토요일 밤이었다. 집 앞에 택시에서 내려 여행가방은 그냥 현관문 옆에 놔두고 조용히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다. 거의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 팀은 침실에 있는 것 같았다. 난 어두운 거실에서 불도 켜지 않고 입고 있던 옷부터 훌훌 벗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살금살금 침실로 향했다. 닫혀진 침실 문틈으로 연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무슨 소리도 나는 것 같았으나 아마도 팀이 혼자 누워 티비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벌거벗고 나타나 침대로 뛰어들면 무척이나 반가워 하겠지 하는 마음에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
순간 방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 모두 얼어붙어 버렸다. 팀과 내가 함께 살을 섞으며 지냈던 우리 부부의 침대에 팀이 누워있었고 그 위에 팀에게 등을 돌리고 문 쪽을 바라보며 그의 자지를 타고 앉은 금발의 백인 여자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벌거벗은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고 아직도 몽롱한 쾌락에 빠진 듯 어리바리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팀의 표정이 몹시도 역하게 다가왔다.
그때 문 옆의 탁자에 놓인 화병이 눈에 띠였고 나도 모르게 내 손에 잡힌 그 화병은 금발년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병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침실 유리창과 함께 박살이 났다.
“이 씨발년! (You fucking bitch!)”
감히 내 자지를 타고 앉은 금발년에 대한 내 분노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난 그년에게 달려들어 따귀를 날렸고 머리채를 부여잡으려는 순간 팀이 내 손을 잡아 저지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그년을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발년은 정말 빛의 속도로 도망쳤고 그제서야 난 내가 알몸이란 것을 깨닫고 거실로 뛰쳐나와 옷을 챙겨 입었다. 팀은 그런 나를 따라 나와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내일 오기로 하지 않았어?”
“내 몸에 손대지마.”
난 오직 그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선반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 현관 앞에 세워두었던 가방을 그대로 차에 싣고 뉴올리언스의 친정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6개월에 걸친 팀과의 이혼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혼 과정은 지저분하기 마련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이 까발려지고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준다. 팀은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고 한마디로 섹스 머신이었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을 삼는다면 섹스에 관한 한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그가 내게 들키지 않고 4년이나 나와 부부생활을 해주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알고 보니 팀은 전부인과도 나와 똑 같은 이유로 이혼을 했었고 지금까지도 가끔 만나 섹스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하루 일찍 집에 도착했을 때 내 침대에서 내 자지를 끼고 있던 그 금발년은 이제 막 법대에 들어가 팀의 사무실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년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자주 가는 식당에서 우리를 전담했던 웨이트리스 역시 그의 섹스 파트너였고 그가 수시로 사 들고 들어오던 비싼 속옷 매장의 매니저 역시 팀이 수시로 박아주던 년이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함께 사는 내내 나를 속였고 눈앞에서 다른 년의 보지에 자지를 박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고 게다가 지루한 이혼절차를 모두 거쳐 남이 됐지만 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팀을 욕한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팀은 내게 정성을 다했고 이혼 과정에서도 쿨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내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다. 물론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 그와 단 한번도 다시 몸을 섞은 적은 없지만 솔직히 지금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는 사람이다.
6개월이 넘는 이혼 절차를 마치고 완전히 남이 된 2011년 2월.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별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될 만큼의 재산이 생겼다. 꽤 많은 현찰과 함께 살았던 집, 자동차와 보석 등등이 내 몫으로 정리됐다. 좀 비약일지 모르지만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에게 4년간 몸을 팔고 화대를 받았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최종 합의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재산 정리가 모두 끝난 후 팀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집에 들어와 앉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집에 있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다시 뉴올리언스로 돌아왔고 아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이미 결혼을 했고 이혼까지 경험한 딸에게 아빠의 말은 아무런 통제력이 없었다. 나는 우선 팀과 결혼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대학원 진학을 다시 추진했다. 이미 합격했던 학교에 다시 복학을 타진했고 다행히 같은 조건으로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리고 배톤루지의 집을 매물로 내놨고 학기가 시작되는 8월까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곧장 서울로 날아왔다.
불과 6~7개월전 난 서울에서 팀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 흉내를 내고 있었었다. 친척과 친구들 모두에게 온갖 허세를 다 부렸었는데 그새 이혼녀가 되어 돌아왔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난 이모들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 강남의 한 레지던스에 자리를 잡았다. 딱히 뭘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아직은 쌀쌀했지만 그래도 봄 기운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2011년의 3월의 서울에서 난 철저히 혼자였다.
대충 짐을 풀고 서울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았지만 황사 탓인지 창 밖의 하늘은 뿌옇게 흐려있었고 주변에 있는 대기업 건물 앞에서 누군가 시위를 하고 있는지 요란한 확성기 소리가 낯설었다. 피자 한판을 시켜 먹으며 시차 때문에 몽롱한 몸을 추스르느라 종일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일단 휴대폰과 컴퓨터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서울은 모든 것이 참 편리한 도시다. 길에 나서자 마자 휴대폰 가게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냥 둘러보다 제일 커 보이는 곳으로 들어섰다. 최신 폰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지만 외국인 신분인 나는 선택이 자유롭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선불방식으로 폰을 장만하고 컴퓨터 매장에서 최신 노트북을 장만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이것저것 장도 보고 싶었지만 차가 없으니 포기하고 근처 빵집에서 빵 몇 가지를 사 들고 들어왔다. 하지만 막상 빵조가리로 식사를 해결하려니 왠지 허전하고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서 차분히 마음을 추스르려고 무작정 서울로 온 것인데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온몸에 한기가 돋는 것 같았다. 우유 한잔에 빵 하나를 먹고 옷을 차려 입었다. 옷 가방에서 바로 꺼내 입을 수 있는 옷이 많지 않아 스키니 진에 니트 스웨터를 입고 코트를 걸친 채 밖으로 나섰다. 조금 걷다 보니 골목 한 켠 건물의 2층에 바가 하나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바의 모습은 팀과 종종 들렀던 미국의 바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바텐더가 전부 젊은 여자들이었고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는 교묘히 감춰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손님의 대부분이 남자들이라는 것도 다소 낯선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텐더가 내민 메뉴판에는 술을 모두 병으로만 팔고 있었다. 나보고 위스키 한 병을 다 먹으라는 건지…… 솔직히 스카치 한잔 정도 마시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맥주 한 병을 시켰다.
내 앞의 바텐더는 젊은 여자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그리 썩 달가워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나 역시 그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아 세 병째 맥주를 비우고 나가려는 순간 한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혼자 왔나요?”
“네?”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분명 젊은 사람은 아니었고 못해도 4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옆자리에 앉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맥주 마시는 걸 보니 바람 맞은 모양이군요?”
“후훗…… 아뇨. 애초에 만날 사람이 없었으니 바람 맞을 일도 없지요. 그냥 술 생각이 나서 혼자 왔어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의 그 남자는 알고 보니 이제 막 50대에 접어 든 중국관련 무역을 하는 중소기업 대표였다. 의례적인 호구조사를 마치고 그의 제안에 우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아까부터 마시고 싶었던 스카치를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촌뻘 정도되는 그와 내가 왜 엮이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 남편인 팀이 나보다 열살 위였으니 내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하필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순간에 접근한 사람이라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님 내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미국엔 오래 살았어요?”
“네 쫌……”
“그럼 서울엔 지금 혼자 나와 있는 거에요?”
“네.”
“그럼 친구들 많이 만나고 그러겠네요.”
“글쎄요……”
대화는 지루했다. 하긴 스무살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우리 사이에 공통된 화제 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술이라는 멋진 매개체가 있었다.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될 즈음 난 그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저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세요?”
“네? 아~ 그냥 아가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거죠.”
언제부턴가 아가씨란 말이 그리 좋은 느낌으로 쓰이지 않는 것 같아서 거슬렸다.
“아가씨 아니고 수정이에요. 김수정.”
“하하하…… 미안해요. 달리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래요, 수정양.”
“저에 대해 뭘 알고 싶으세요?”
그에게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헐렁한 니트 속으로 모아지는 가슴 골에 그의 시선이 꽂히는 걸 느끼니 이미 살짝 오른 취기와 더해져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면 저하고 뭐 하고 싶으신 건가요?”
“하하하…… 난 그저 수정양이 예뻐서 말을 걸었던 것뿐이에요. 예쁜 여자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거 아닌가요?”
“근데 아저씨하고 대화하는 거 지루해요. 그냥 말 걸어보신 거라면 성공했으니 됐죠? 졸려서 이만 일어날게요.”
여전히 빙빙 말을 돌리는 그의 태도에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고 실제로 잠이 쏟아질 것 같기도 했다. 난 취하면 졸립다.
“잠깐만요, 수정양.”
벌떡 일어서는 내 손을 그가 잡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제법 큰 인연인데 이렇게 헤어지는 건 좀……”
“그럼 좀 재밌게 해 주시던가요.”
진짜로 술 기운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 보는 남자에게, 그것도 나이 많은 아저씨한테 앙탈을 부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까칠하게 쏘아 붙였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가 당황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이런 곳에서 수정양 같이 젊은 아가씨에게 말을 걸고 술까지 같이 마시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바텐 아가씨와 잡담이나 나누면서 허전함을 달래려고 들렀다가 나도 모르게 수정양에게 끌렸어요.”
“왜 허전하세요? 사업도 하시고 얼핏 봐도 잘나가시는 분 같은데?”
그제서야 대화가 좀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년남자들의 뻔한 작업 멘트였지만 오랜 결혼생활에서 오는 권태감, 늘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은 그때의 나에게는 안쓰럽게 들렸고 묘한 감정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사모님이랑 여행이라도 다니시고 그러시지 그래요?”
“하하하… 큰애가 고3이고 그 밑으로 고2, 중3인데 마누라가 움직이려고 하나? 우리 집사람은 모든 것이 애들 공부하고 연관돼 있어서 난 그저 돈만 벌어다 주면 그만인 사람이에요.”
씁쓸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이 왜 그렇게 불쌍해 보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옆으로 가서 바싹 다가 앉았다.
“나도 우울하고 아저씨도 우울하고…… 우리 친하게 지내봐요.”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 팔짱을 끼며 달라붙어 그를 올려다 보며 웃었다. 그는 짐짓 놀라는 듯 했지만 난 생글거리며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왜 그랬을까? 지난 일들에 대해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면서 웃음 지을 때가 있는데 그날의 내 행동도 지금까지 곱씹어 보는 일들 중의 하나다. 아무튼 분명 그는 팔꿈치에 전해지는 뭉클함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고 생글거리는 20대 여성의 야릇함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기대했던 것일까? 피하지 않았다. 내 입술을 벌리며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팀과 마지막 키스를 나눈 것이 지난해 7월이었으니 만 8개월만에 내 입안으로 들어온 남자의 혀는 스카치 향이 났고 까칠했다. 혀가 들어오자 그의 손길이 내 청바지 위로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스웨터 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거기서 머뭇거렸다. 애꿎은 허리와 등에서만 맴도는 그의 손길이 왠지 아쉽고 서운했다.
난 그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그의 혀를 내 혀로 받아 서로 엉켰고 그의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바지 위로 손을 뻗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별로 부풀어 오르지 않은 그의 아랫도리가 솔직히 좀 의아하기도 했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속으로 ‘왜? 나랑 키스하고 있는데 왜 안 커지는 거지?’라고 생각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내 스웨터 안에서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주저하는 그의 손길이 우습기도 했고 왠지 허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술김에 이렇게 된 거 어디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마음도 들었다. 이미 이혼까지 경험했고 어차피 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저씨, 여기서 이러는 건 쫌……”
“아~ 미안해요, 수정양……”
그가 정신이 번쩍 난 듯 내 스웨터에서 황급히 손을 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렇다고 갑자기 멈추는 것도 싫은데……”
다시 그의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이만하면 알아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나갈까요, 수정양?”
“네……”
길가로 나온 우리는 줄줄이 서있는 모범택시 하나를 잡아탔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 수정양?”
“아저씨가 가고 싶은데 아무데나……”
그의 귀에 속삭이자 용기가 난 듯 그가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남산 하얏트로 갑시다.”
나이 많은 남자의 팔꿈치에 기댄 나를 의미심장한 미소로 쳐다본 기사가 이내 차를 몰았다. 강남대로와 한남대교를 통과하는데 다소 길이 밀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 도착했다.
“여기서 차 한잔 하고 있어요, 수정씨.”
로비의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준 그가 프론트로 갔다. 생각보다 조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돌아왔고 우리는 로비 안쪽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들어섰다. 제법 깔끔하고 커다란 방이 일반 객실은 아닌 것 같았다.
“수정양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후훗~ 좋아요. 전망도 마음에 들고……”
창 밖으로 한남대교와 올림픽 대로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큰 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흔치 않은 편이라 서울의 야경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먼저 씻을래요?”
어색함을 달래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그가 왜 그렇게 귀엽게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네.”
넓은 욕실로 들어가 청바지를 벗었다. 옷 가방에서 꺼내 바로 입을 만한 게 그것밖에 없어서 입긴 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꽉 끼는 옷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벗으니 너무 좋았다. 스웨터와 속옷까지 모두 벗고 알몸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이제 내 나체를 보게 될 두 번째 남자가 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야릇함이 느껴졌다.
- 계속
팀이 배톤루지로 돌아간 열흘 후, 혜경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집들이를 하는 날, 난 남들보다 서너 시간 일찍 혜경의 신혼 집으로 가서 그간 갈고 닦은 요리솜씨를 발휘하기로 했었다.
“너 신랑 미국 가서 심심하겠다, 그치?”
“그러게 말이다. 심심한 건 둘째치고 허전해 미치겠어. 매일 하던 거 안 하니까 너무 허전한 거 있지.”
“미친년…… 아줌마 되더니 낯짝 두꺼워진 거 봐, 이년.”
“호호호…… 넌 아줌마 아냐? 그래 말 나온 김에 신혼여행 얘기나 해봐. 니 신랑하고 속궁합은 잘 맞아?”
“어머~ 미쳤어.”
“뭐 어때? 너랑 나랑 내숭 떨고 그럴 사이냐? 말 해봐. 신랑이 잘해?”
“몰라, 이년아~ 이게 지 신랑 없어서 심심하다고 나한테 들이대는 거야?”
“그래, 이년아. 심심하고 허전해서 미치겠다. 왜?”
우리는 깔깔거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얼마 후 혜경의 남편이 집들이를 돕기 위해 일찍 퇴근해 들어왔다. 건축사인 혜경의 남편은 팀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제법 큰 키에 훤칠한 남자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전 혜경이 친구 수정이에요. 지난번 결혼식 때 인사는 드렸었는데 기억하세요?”
“아~ 네, 수정씨. 혜경이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에 계시다고 하셨죠?”
“네, 이번에 혜경이 결혼한다고 꽤 오래간만에 나왔어요.”
“어이구 멀리서 일부러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혜경이 결혼식은 꼭 와야죠. 내가 업어 키운 아이인걸요. 호호호……”
“아~ 네~ 하하하……”
혜경의 남편인 우석은 외모만큼이나 시원시원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난 둘이 알콩달콩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부러움과 야릇함이 교차하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뜬금없이 두 사람이 섹스를 나누는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저 새신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내 뇌리 어딘가에 박혀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지금이 나 같았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일 뿐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저녁 무렵 들이닥친 예전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오래간만에 옛날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모 집으로 돌아왔다. 팀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혼자 호텔에 있기도 그랬고 허세도 부릴 만큼 부렸던 터라 막내 이모 집에서 지내기로 한 것이었다.
엄마는 다섯 자매 중 넷째였고 막내 이모는 엄마와 연년생이었지만 성격이 쿨해서 나와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이모부는 공기업의 이사로 재직 중이고 하나뿐인 아들은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으로 공부도 꽤 잘하는 잘생긴 녀석이었다. 이모야 말로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여인이었다. 이모의 그런 쿨한 성격은 다 환경이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수정아, 우리 형식이 내년쯤에 미국 보낼까 하는데, 니네 집에서 좀 데리고 있어줄 수 있을까?”
“내년에? 그땐 고 3인데?”
“응, 유학원에 물어보니까 고3 1년을 미국에서 공부하고 명문대에 보내는 게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 집이야 방도 많고 얼마든지 와서 지내도 되긴 하지만 루이지애나에 좋은 고등학교가 있어야 말이지. 그 동네 고등학교들은 엉망이야.”
“그래?”
“응. 나야 형식이가 와있으면 좋지. 이것저것 부려먹기도 좋고…… 근데 유학 보내려면 학교 선택이 젤 중요해.”
“듣고보니 그것도 그렇네. 암튼 너도 좀 알아봐줘.”
“알았어, 이모. 근데 형식이 이 자식은 여태 집에 안 오고 뭐한데?”
“예, 너도 여기서 고등학교 다녔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래? 한국의 고등학생이 11시 전에 집에 오는 거 봤어?”
하긴 그랬다. 형식이는 어렸을 때 유독 나를 따랐던 아이였고 훈남으로 잘 자란 아이여서 한국에 나와서도 자주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게다가 나 역시 친구들 만나러 다니느라 바빠서 형식이만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정신 없이 흘러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일요일에 들어가려면 슬슬 짐 챙겨야겠네. 뭐 사갈 거 있으면 말해. 이모가 챙겨줄게.”
“아냐, 이모. 미국에서도 필요한 거 다 구할 수 있어. 짐 되게 이것저것 사가지고 가고 그런 거 안 해. 그리고 나 토요일에 갈 거야.”
“뭐? 너 일요일에 가는 표 사논 거 아냐?”
“응, 팀 놀래켜 주려고 하루 먼저 들어가려고. 살금살금 들어가서 놀래키면 재미있잖아.”
“니넨 결혼한지 4년이나 됐으면서도 아직 그러고 노니?”
“괜히 딴지 걸지 말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이모.”
하루 일찍 출발하기로 한 건 정말이지 순수한 장난끼였고 깜짝 놀라며 반겨줄 팀의 해맑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마음으로 일정을 하루 앞당겨 집에 도착한 것은 7월말의 토요일 밤이었다. 집 앞에 택시에서 내려 여행가방은 그냥 현관문 옆에 놔두고 조용히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다. 거의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 팀은 침실에 있는 것 같았다. 난 어두운 거실에서 불도 켜지 않고 입고 있던 옷부터 훌훌 벗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살금살금 침실로 향했다. 닫혀진 침실 문틈으로 연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무슨 소리도 나는 것 같았으나 아마도 팀이 혼자 누워 티비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벌거벗고 나타나 침대로 뛰어들면 무척이나 반가워 하겠지 하는 마음에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
순간 방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 모두 얼어붙어 버렸다. 팀과 내가 함께 살을 섞으며 지냈던 우리 부부의 침대에 팀이 누워있었고 그 위에 팀에게 등을 돌리고 문 쪽을 바라보며 그의 자지를 타고 앉은 금발의 백인 여자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벌거벗은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고 아직도 몽롱한 쾌락에 빠진 듯 어리바리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팀의 표정이 몹시도 역하게 다가왔다.
그때 문 옆의 탁자에 놓인 화병이 눈에 띠였고 나도 모르게 내 손에 잡힌 그 화병은 금발년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병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침실 유리창과 함께 박살이 났다.
“이 씨발년! (You fucking bitch!)”
감히 내 자지를 타고 앉은 금발년에 대한 내 분노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난 그년에게 달려들어 따귀를 날렸고 머리채를 부여잡으려는 순간 팀이 내 손을 잡아 저지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그년을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발년은 정말 빛의 속도로 도망쳤고 그제서야 난 내가 알몸이란 것을 깨닫고 거실로 뛰쳐나와 옷을 챙겨 입었다. 팀은 그런 나를 따라 나와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내일 오기로 하지 않았어?”
“내 몸에 손대지마.”
난 오직 그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선반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 현관 앞에 세워두었던 가방을 그대로 차에 싣고 뉴올리언스의 친정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6개월에 걸친 팀과의 이혼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혼 과정은 지저분하기 마련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이 까발려지고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준다. 팀은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고 한마디로 섹스 머신이었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을 삼는다면 섹스에 관한 한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그가 내게 들키지 않고 4년이나 나와 부부생활을 해주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알고 보니 팀은 전부인과도 나와 똑 같은 이유로 이혼을 했었고 지금까지도 가끔 만나 섹스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하루 일찍 집에 도착했을 때 내 침대에서 내 자지를 끼고 있던 그 금발년은 이제 막 법대에 들어가 팀의 사무실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년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자주 가는 식당에서 우리를 전담했던 웨이트리스 역시 그의 섹스 파트너였고 그가 수시로 사 들고 들어오던 비싼 속옷 매장의 매니저 역시 팀이 수시로 박아주던 년이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함께 사는 내내 나를 속였고 눈앞에서 다른 년의 보지에 자지를 박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고 게다가 지루한 이혼절차를 모두 거쳐 남이 됐지만 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팀을 욕한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팀은 내게 정성을 다했고 이혼 과정에서도 쿨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내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다. 물론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 그와 단 한번도 다시 몸을 섞은 적은 없지만 솔직히 지금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는 사람이다.
6개월이 넘는 이혼 절차를 마치고 완전히 남이 된 2011년 2월.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별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될 만큼의 재산이 생겼다. 꽤 많은 현찰과 함께 살았던 집, 자동차와 보석 등등이 내 몫으로 정리됐다. 좀 비약일지 모르지만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에게 4년간 몸을 팔고 화대를 받았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최종 합의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재산 정리가 모두 끝난 후 팀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집에 들어와 앉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집에 있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다시 뉴올리언스로 돌아왔고 아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이미 결혼을 했고 이혼까지 경험한 딸에게 아빠의 말은 아무런 통제력이 없었다. 나는 우선 팀과 결혼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대학원 진학을 다시 추진했다. 이미 합격했던 학교에 다시 복학을 타진했고 다행히 같은 조건으로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리고 배톤루지의 집을 매물로 내놨고 학기가 시작되는 8월까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곧장 서울로 날아왔다.
불과 6~7개월전 난 서울에서 팀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 흉내를 내고 있었었다. 친척과 친구들 모두에게 온갖 허세를 다 부렸었는데 그새 이혼녀가 되어 돌아왔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난 이모들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 강남의 한 레지던스에 자리를 잡았다. 딱히 뭘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아직은 쌀쌀했지만 그래도 봄 기운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2011년의 3월의 서울에서 난 철저히 혼자였다.
대충 짐을 풀고 서울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았지만 황사 탓인지 창 밖의 하늘은 뿌옇게 흐려있었고 주변에 있는 대기업 건물 앞에서 누군가 시위를 하고 있는지 요란한 확성기 소리가 낯설었다. 피자 한판을 시켜 먹으며 시차 때문에 몽롱한 몸을 추스르느라 종일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일단 휴대폰과 컴퓨터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서울은 모든 것이 참 편리한 도시다. 길에 나서자 마자 휴대폰 가게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냥 둘러보다 제일 커 보이는 곳으로 들어섰다. 최신 폰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지만 외국인 신분인 나는 선택이 자유롭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선불방식으로 폰을 장만하고 컴퓨터 매장에서 최신 노트북을 장만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이것저것 장도 보고 싶었지만 차가 없으니 포기하고 근처 빵집에서 빵 몇 가지를 사 들고 들어왔다. 하지만 막상 빵조가리로 식사를 해결하려니 왠지 허전하고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서 차분히 마음을 추스르려고 무작정 서울로 온 것인데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온몸에 한기가 돋는 것 같았다. 우유 한잔에 빵 하나를 먹고 옷을 차려 입었다. 옷 가방에서 바로 꺼내 입을 수 있는 옷이 많지 않아 스키니 진에 니트 스웨터를 입고 코트를 걸친 채 밖으로 나섰다. 조금 걷다 보니 골목 한 켠 건물의 2층에 바가 하나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바의 모습은 팀과 종종 들렀던 미국의 바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바텐더가 전부 젊은 여자들이었고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는 교묘히 감춰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손님의 대부분이 남자들이라는 것도 다소 낯선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텐더가 내민 메뉴판에는 술을 모두 병으로만 팔고 있었다. 나보고 위스키 한 병을 다 먹으라는 건지…… 솔직히 스카치 한잔 정도 마시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맥주 한 병을 시켰다.
내 앞의 바텐더는 젊은 여자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그리 썩 달가워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나 역시 그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아 세 병째 맥주를 비우고 나가려는 순간 한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혼자 왔나요?”
“네?”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분명 젊은 사람은 아니었고 못해도 4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옆자리에 앉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맥주 마시는 걸 보니 바람 맞은 모양이군요?”
“후훗…… 아뇨. 애초에 만날 사람이 없었으니 바람 맞을 일도 없지요. 그냥 술 생각이 나서 혼자 왔어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의 그 남자는 알고 보니 이제 막 50대에 접어 든 중국관련 무역을 하는 중소기업 대표였다. 의례적인 호구조사를 마치고 그의 제안에 우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아까부터 마시고 싶었던 스카치를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촌뻘 정도되는 그와 내가 왜 엮이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 남편인 팀이 나보다 열살 위였으니 내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하필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순간에 접근한 사람이라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님 내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미국엔 오래 살았어요?”
“네 쫌……”
“그럼 서울엔 지금 혼자 나와 있는 거에요?”
“네.”
“그럼 친구들 많이 만나고 그러겠네요.”
“글쎄요……”
대화는 지루했다. 하긴 스무살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우리 사이에 공통된 화제 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술이라는 멋진 매개체가 있었다.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될 즈음 난 그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저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세요?”
“네? 아~ 그냥 아가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거죠.”
언제부턴가 아가씨란 말이 그리 좋은 느낌으로 쓰이지 않는 것 같아서 거슬렸다.
“아가씨 아니고 수정이에요. 김수정.”
“하하하…… 미안해요. 달리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래요, 수정양.”
“저에 대해 뭘 알고 싶으세요?”
그에게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헐렁한 니트 속으로 모아지는 가슴 골에 그의 시선이 꽂히는 걸 느끼니 이미 살짝 오른 취기와 더해져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면 저하고 뭐 하고 싶으신 건가요?”
“하하하…… 난 그저 수정양이 예뻐서 말을 걸었던 것뿐이에요. 예쁜 여자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거 아닌가요?”
“근데 아저씨하고 대화하는 거 지루해요. 그냥 말 걸어보신 거라면 성공했으니 됐죠? 졸려서 이만 일어날게요.”
여전히 빙빙 말을 돌리는 그의 태도에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고 실제로 잠이 쏟아질 것 같기도 했다. 난 취하면 졸립다.
“잠깐만요, 수정양.”
벌떡 일어서는 내 손을 그가 잡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제법 큰 인연인데 이렇게 헤어지는 건 좀……”
“그럼 좀 재밌게 해 주시던가요.”
진짜로 술 기운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 보는 남자에게, 그것도 나이 많은 아저씨한테 앙탈을 부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까칠하게 쏘아 붙였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가 당황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이런 곳에서 수정양 같이 젊은 아가씨에게 말을 걸고 술까지 같이 마시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바텐 아가씨와 잡담이나 나누면서 허전함을 달래려고 들렀다가 나도 모르게 수정양에게 끌렸어요.”
“왜 허전하세요? 사업도 하시고 얼핏 봐도 잘나가시는 분 같은데?”
그제서야 대화가 좀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년남자들의 뻔한 작업 멘트였지만 오랜 결혼생활에서 오는 권태감, 늘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은 그때의 나에게는 안쓰럽게 들렸고 묘한 감정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사모님이랑 여행이라도 다니시고 그러시지 그래요?”
“하하하… 큰애가 고3이고 그 밑으로 고2, 중3인데 마누라가 움직이려고 하나? 우리 집사람은 모든 것이 애들 공부하고 연관돼 있어서 난 그저 돈만 벌어다 주면 그만인 사람이에요.”
씁쓸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이 왜 그렇게 불쌍해 보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옆으로 가서 바싹 다가 앉았다.
“나도 우울하고 아저씨도 우울하고…… 우리 친하게 지내봐요.”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 팔짱을 끼며 달라붙어 그를 올려다 보며 웃었다. 그는 짐짓 놀라는 듯 했지만 난 생글거리며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왜 그랬을까? 지난 일들에 대해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면서 웃음 지을 때가 있는데 그날의 내 행동도 지금까지 곱씹어 보는 일들 중의 하나다. 아무튼 분명 그는 팔꿈치에 전해지는 뭉클함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고 생글거리는 20대 여성의 야릇함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기대했던 것일까? 피하지 않았다. 내 입술을 벌리며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팀과 마지막 키스를 나눈 것이 지난해 7월이었으니 만 8개월만에 내 입안으로 들어온 남자의 혀는 스카치 향이 났고 까칠했다. 혀가 들어오자 그의 손길이 내 청바지 위로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스웨터 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거기서 머뭇거렸다. 애꿎은 허리와 등에서만 맴도는 그의 손길이 왠지 아쉽고 서운했다.
난 그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그의 혀를 내 혀로 받아 서로 엉켰고 그의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바지 위로 손을 뻗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별로 부풀어 오르지 않은 그의 아랫도리가 솔직히 좀 의아하기도 했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속으로 ‘왜? 나랑 키스하고 있는데 왜 안 커지는 거지?’라고 생각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내 스웨터 안에서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주저하는 그의 손길이 우습기도 했고 왠지 허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술김에 이렇게 된 거 어디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마음도 들었다. 이미 이혼까지 경험했고 어차피 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저씨, 여기서 이러는 건 쫌……”
“아~ 미안해요, 수정양……”
그가 정신이 번쩍 난 듯 내 스웨터에서 황급히 손을 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렇다고 갑자기 멈추는 것도 싫은데……”
다시 그의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이만하면 알아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나갈까요, 수정양?”
“네……”
길가로 나온 우리는 줄줄이 서있는 모범택시 하나를 잡아탔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 수정양?”
“아저씨가 가고 싶은데 아무데나……”
그의 귀에 속삭이자 용기가 난 듯 그가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남산 하얏트로 갑시다.”
나이 많은 남자의 팔꿈치에 기댄 나를 의미심장한 미소로 쳐다본 기사가 이내 차를 몰았다. 강남대로와 한남대교를 통과하는데 다소 길이 밀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 도착했다.
“여기서 차 한잔 하고 있어요, 수정씨.”
로비의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준 그가 프론트로 갔다. 생각보다 조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돌아왔고 우리는 로비 안쪽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들어섰다. 제법 깔끔하고 커다란 방이 일반 객실은 아닌 것 같았다.
“수정양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후훗~ 좋아요. 전망도 마음에 들고……”
창 밖으로 한남대교와 올림픽 대로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큰 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흔치 않은 편이라 서울의 야경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먼저 씻을래요?”
어색함을 달래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그가 왜 그렇게 귀엽게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네.”
넓은 욕실로 들어가 청바지를 벗었다. 옷 가방에서 꺼내 바로 입을 만한 게 그것밖에 없어서 입긴 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꽉 끼는 옷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벗으니 너무 좋았다. 스웨터와 속옷까지 모두 벗고 알몸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이제 내 나체를 보게 될 두 번째 남자가 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야릇함이 느껴졌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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