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 7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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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 75


"영도씨,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라는 금아의 말에 고개만 끄덕인 나는 가슴이 뛰면서도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언니 금순은 애초에 나를 금아와 빠구리하도록 작정하고 있었다. 우울증에 빠져 있는 동생에게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심기일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그러나 결벽증인지 도덕관이 투철해서인지 금아는 완강하게 거부했고, 대신 금순이 동생이 보는 앞에서 실연(實演)하는 것을 구경만 한다는 합의를 간신히 얻어냈다.

그래서 금순과 엉키면서도 나는 흘깃거리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물론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개가 흘레붙는 것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도 그럴 것이고, 하물며 친언니가 아직 어려 보이는데 좆만 큰 남정네와 붙어먹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니 놀라움도 컸을 것이다.
빠구리가 끝나고 흘깃 보니 이미 금아는 마음의 평정을 찾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 싸늘한 표정은 언니와 나를 싸잡아 경멸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한테 하자고 했다. 물론 나는 좋다. 아니, 너무 감격해서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고 싶다. 인형 같은 정윤희보다 더 아름답고 피가 뛰는 저런 여인과 빠구리하는 것을 싫다고 할 놈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토록 반발하고 차가워 보이는 여인이었기에 더욱 현실감이 없이 꿈꾸는 기분에 빠져있는 모양이다.
“잠깐 씻고 올게요.”
그녀가 방문을 나서자 나는 확실한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문지기 노릇 하며 감시하지 않아도 돼. 나 샤워할 거야.”
방문 밖에서 금아의 말이 들렸다. 금순이 방문 앞에서 망을 보고 있었나보다. 거실 쪽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금순이 급히 들어왔다.
“영도야! 된 기제? 쟈가 한다 캤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를 왈칵 끌어안았다.
“수고했다, 영도야! 나는 니가 해낼 줄 알았다.”
그녀가 얼굴을 들이밀어 키스를 하려나 했더니 볼에 살짝 뽀뽀만 한다.

“벌써 12시가 넘었네. 점심은 먹어야 ······ 아이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두드려야지. 우선 그것부터 하고 ······ 참, 금아가 샤워하는 동안 니도 좀 씻고 올래?”
“저 아지매하고요?”
“아이다. 저 이층 본채에 가면 안쪽에 욕실이 있다. 여자는 좀 오래 걸리지만 니도 퍼떡 씻고 온나.”
부리나케 몸을 씻고 이빨까지 닦고 나와 보니 역시 내가 먼저다. 잠시 후 그녀가 들어오는데 보니 가운 차림이다. 박금순이 나와 빠구리할 때 꼭 저런 차림이었는데 그녀도 박금순처럼 가운 안은 그냥 알몸일까.

“영도씨도 옷은 벗어야죠?”
아까 금순과 내가 엉켰던 요 위에 자리를 잡으며 그녀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 송금아도 저렇게 웃을 수 있구나. 싸늘한 표정도 매력적이지만 미소는 더욱 그녀를 빛나게 한다.
나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자지는 아까부터 탱탱해져 있었고 그녀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가운을 벗고 들어누었다. 역시 속은 알몸이었다.
체격이 금순 보다 큰 그녀는 젖통도 훨씬 풍만했다. 다만 젖꼭지는 언니보다 작은 것이 발딱 서 있었다.
보지로 눈길이 가자 나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그녀의 보지털은 수북하기는커녕 언니를 닮아 불룩 솟은 두덩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를 금촌리의 미친년들과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한 것이 잘못이다.

우리는 키스부터 했다. 쏙 내민 그녀의 혀를 살짝 내 혀로 덮어주며 잠시 이리저리 흔들다 빨아 들였다. 점점 빠는 힘이 커지자 그녀의 침이 입안에 고인다. 그것을 삼킨 후 내 혀를 들이밀자 그녀도 빨아댄다.
내 한손은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다 귓바퀴를 어루만지고 슬슬 목덜미로 내려와 결국 젖통에 머물렀다. 한동안 주무르다 젖꼭지를 입에 물었더니 그녀는 두손으로 내 머리를 감싼다. 손은 아랫배를 거쳐 보지 위에 얹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세워 주었다. 보지는 이미 흥건했고 공알로 손이 가자 그녀는 몸을 살짝 비틀며 “아! ······ ” 하고 신음을 냈다.

나는 빨리 진짜 맛을 보고 싶었다. 자세를 잡고 자지를 들이밀자 흥건한 물기가 먼저 나를 맞아준다. 엉덩이를 내리며 쑥 밀어 넣었다.
“아악! 아파! 그만, 그만 ······ !”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서리를 쳤다. 하마터면 나는 “아지매는 숫처녀라예?”라고 물을 번했다. 지난번 이원주 선생과 처음 빠구리할 때 그녀도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런 질문이 나왔고 그 와중에도 그녀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봐. 또 영도 것이 너무 크고 ······ ”라고 말했었다.

금아도 그런 비명을 지르며 보지 속도 유난히 빡빡했다. 숫처녀였던 문경미나 영자 누나와 처음 할 때와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혼녀라니 이미 결혼도 했었고 당연히 전남편과도 빠구리를 많이 했을 것이다.
“아지매, 많이 아파요?”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봐요. 또 영도씨 것이 너무 크고 ······ ”
뜻밖에 그녀는 이원주 선생과 한마디 틀리지 않는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몸을 포갠 채 동작을 멈추었다. 그런데 빡빡한 보지 속이 조금씩 옴찔거렸다. 그 감촉에 자지도 벌떡거렸다. 상승작용인지 옴찔거리는 간격이 더 짧아졌다.

“이제 좀 괜찮아 졌어요.”
말하며 그녀는 엉덩이를 좀 흔들었다. 어쩌면 나를 재촉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자지를 뺐다가 쑥 완전히 집어넣었다. 아프다는 소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조심하며 느린 방아질을 계속했다.
“아아 ······ !”
그녀는 작은 신음을 내며 나를 안은 두팔에 힘을 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좀 더 빨리 해도 ······ ”
역시 그녀는 나를 재촉하고 있다. 나는 찌르는 속도를 높였다. 어느새 그녀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박자를 맞추고 있다. 거기에 힘입어 방아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아 ······ ! 아아 ······ ! 하아 ······ ! 하아 ······ ! 학! ······ 학! ······ ”
마침 그녀의 입이 내 귀에 맞붙어 있어 뜨거운 숨결과 함께 신음이 기관차의 굉음처럼 크게 들린다. 그 소리에 자극되어 나도 기관차처럼 온 힘을 다 내어 돌진했다.
“아악! 그만 ······ ! 아아, 그만 ······ !”
물기를 쏟아내는 느낌 속에 그녀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다. 기관차는 정차했지만 보지 속은 경련을 일으킨듯 맹렬하게 자지를 압박해 왔다.

눈을 감은 채 간간히 흐느낌 소리만 내는 그녀에게 방아질을 중단한 채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잠시 몸을 움찔거리며 젖 빠는 것을 받아들였던 그녀는 내 머리를 잡아 끌었다.
“키스 해줘요. 영도씨.”
입술이 마주치자 그녀는 내 혀를 뽑아낼 듯이 세차게 빨아댔다. 나도 그녀의 혀를 빨면서 보지에 손을 올렸다. 홍수가 난듯 젖어있는데 공알을 살짝 비볐다.
“아. 거기는 지금 그만 ······ ”
동작은 멈추었지만 지긋이 누른 손가락은 그 자리를 지키며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하아!”
입술을 뗀 그녀는 두손으로 내 뺨을 받혀 얼굴을 들게 하고는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이예요! 이런 느낌 ······ 정말 태어난 이후 처음 ······ ”
말을 끝맺지 않고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 눈물을 보이려고 내 얼굴을 들었을까. 나는 그 눈물을 혀로 살짝 훔쳐준 뒤 말했다.
“그런데 아지매, 그 말 낮추이소.”
서울말씨를 쓰는 사람들의 버릇이나 예의인지 황달자 최춘자 등과 같은 학년인 최나영도 처음 나에게 존댓말을 썼는데 금아는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여인이다.

“그래도 돼요?”
“예, 아지매가 그러니 듣기 거북해요.”
“그럼 그렇게 하죠. 아니, 그렇게 하지. 대신 영도씨도 나를 아지매라고 하지말고 금아씨, 아니 씨자도 빼고 그냥 금아라고 불러줘. 알았죠? ······ 아 참,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지가 꼽혀있는 채인데도 존칭문제를 이야기하며 잠시 옆길로 빠져서인지 풀이 죽은 것 같다. 몇 번 꿀렁이자 분명히 다시 빳빳해졌다.

“이제는 아지매, 아니 금아가 좀 올라 오이소.”
나는 자지를 빼고 그녀를 내 몸 위로 들어 올리려 했다.
“내가 ······ ?”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아까 금순과 나의 공연을 지켜본 터였다. 걸터앉으며 자지를 제대로 집어 넣는다.“아이 참, 어째 이상해.”
금순처럼 앉은 채 엉덩이를 몇 번 움직여보던 그녀는 엎드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금순보다 풍만한 그녀의 젖통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아아! ······ 아아! ······ ”
몸을 밀착한 채 엉덩이만 움직이던 그녀는 밑에서 나도 치받아 주자 점점 느낌이 강해지는지 신음이 배어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더 속도를 높이려 하자 자지는 쉽게 빠져버렸다.
그녀는 엎드린 채 자지를 급히 다시 끼웠다. 처음에는 살살 움직였으나 빨리 하려니 또 빠져 버린다.
“역시 나는 서툴지? 영도씨가 해 줘.”
“그럼 엎드리소.”

아까 금순과 나의 공연이 여전히 학습효과는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제대로 엎드렸다. 젖통이 언니보다 크듯 엉덩이도 풍만했다. 자지를 박았을 때 내 허벅지에 느껴지는 볼기짝의 감촉도 좋았다.
“아! 어째 더 깊이 들어온 것 같아.”
엎드린 자세에서도 보지는 옴찔거렸다. 나는 서서히 박아댔다. 갑자기 그 토실토실한 볼기짝을 때리고 싶다 라는 기분도 들었지만 감히 그러지는 못하고 엉덩이를 주물러 가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조금씩 신음이 커지던 그녀가 요 위에 박고 있던 고개를 돌리며 나에게 소리쳤다.

“아, 영도씨! 그만 ······ 그만!”
“와예?”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아까 절정을 맞았을 때 그녀의 반응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그녀가 절정을 맞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너무 벅차! 아아, ······ 조금 쉬면 안될까?”
어째서인지 그녀는 깊이 들어간 자지를 받아들이기 힘 든 모양이다. 자지를 빼자 그녀는 들어누었다.

자지는 여전히 벌떡 서서 보지를 원하고 있다. 그녀의 두다리를 내 어깨에 걸치게 했다. 물기가 번득였지만 그녀의 보지는 깨끗해 보였다. 대음순도 소음순도 전혀 삐져나온 것이 없이 질구가 손가락 하나는 들어갈 듯이 벌어져 있고 속살이 조금씩 움직인다.
갑자기 장난이 하고 싶어 졌다. 귀두로 보지 주변을 스치다 엉뚱한 곳을 찔러대기도 하면서 말했다.
“금아. 이기 영 제자리를 못 찾네요. 제대로 좀 넣어 주이소.”
“아이 참!”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자지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보지로 바로 인도하지 않았다.

“우리도 좀 닦아야겠어.”
타올로 자지의 물기를 닦아낸 그녀는 다시 자지를 움켜쥐었다.
“어쩜 이렇게 늠름해!”
“다른 남자보다 커요?”
“응? ······ 아니 무슨 그런 말을 ······ ”
그녀는 황급히 손을 놓고 얼굴을 붉혔다. 보지 주변의 물기도 닦고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자지를 잡아 입구에 맞춰놓았다.

“아, 이렇게 꽉 차!”
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자지가 들어가는데 그녀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주며 말했다.
꽉 찬 것을 환영하듯 보지가 조금씩 옴찔거렸다. 물기가 점점 배어나오는 것도 느껴진다.
다시 방아질이 시작되었다. 두다리가 내 어깨에 걸처 있으니 그녀는 이제 나를 끌어안을 수도 없다. 대신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나의 시야에는 그녀의 상반신이 모두 들어온다. 유난히 큰 그 눈은 정감이 가득해 보이고 도톰한 입술이 약간 벌어진 입은 무엇인가를 호소하려는 듯 하다. 젖통은 전혀 옆으로 처지지 않은 채 방아질에 맞추어 출렁인다.

“아아! ······ 아아! ······ 하아! ······ 하아! ······ ”
점점 신음소리가 가빠지고 커가는 것으로 그녀도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녀가 새로운 요구를 했다.
“하아, 영도씨! 좀 빨리 끝내면 안될까?”
“와, 이래 하는 게 싫어요? 그만 할까요?”
“아아! 꼭 싫은 건 아닌데 ······ 좀 아프기도 하고 ······ 하여튼 너무 벅차!”
“그럼 좀 쉬었다 하지예.”

나는 어깨에 올려 놓았던 그녀의 다리를 풀어주고 자지를 뺐다.
“아이, 그렇게까지는 말고 ······ ”
“뭐를요?”
그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한번 가렸다 떼고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는 그냥 ······ 같이 있고 싶단 말야.”
같이 있고 싶다라는 말은 ······ 아, 살을 섞은 채 있자는 말이로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자지를 다시 집어넣었다.

“이리 와 줘.”
그녀가 두팔을 벌리기에 나는 엎어지며 그 팔에 안겼다. 그녀가 먼저 내 입술을 찾는다. 자지는 곱혀진 채 동작을 멈추었지만 입술을 맞댄 서로의 혀는 한동안 춤을 추듯 함깨 어울렸다.
“참, 아까 언니는 이렇게 했지.”
그녀가 두다리로 내 엉덩이 위쪽을 감쌌다. 팔과 다리에 모두 힘을 주자 우리 몸은 물이나 공기도 스며들지 못할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그녀가 ‘언니’를 들먹이는 바람에 나도 갑자기 금순이 생각났고 그녀 모르게 살짝 웃음을 지었다.
학습효과로 그녀는 지금 금순이 아까 했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느낌은 달랐다. 확실히 낙지가 달라붙은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 느낌은 처음 금순을 안았을 때의 느낌이 강렬해서 그대로 나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금아에게서 다르게 느껴지는 감촉 역시 더할 수 없이 좋았다. 젖통도 허벅지도 풍만한 여인의 살덩이가 나를 이렇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토록 빼어난 미인인데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 완강하게 나를 거부하고 싸늘한 표정에 나를 경멸했던 그녀가 ······

키스도 끝나고 그냥 밀착만 하고 있다 보니 젖통의 움직임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녀의 호흡에 따라 젖통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조금 딱딱해진 젖꼭지가 내 가슴을 간질이고 있다. 그 감촉이 내 온몸으로 퍼지는지 자지도 조금씩 벌떡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보지도 슬슬 화답해오자 그녀는 엉덩이를 조금씩 비틀었다.
“다시 해도 괜찮아예?”
나는 이미 살살 엉덩이를 움직이며 물었다.
“알았어. 하지만 좀 살살 ······ ”
“살살 하마 끝이 안나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참을게.”
그녀가 뭐를 참는다는 것인지 ······ 방아질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그녀는 엉덩이를 들썩이고 마음껏 비명을 질러대는 중에 나는 사정했다.
“잠깐만 그냥, 이대로 ······ ”
가빴던 둘의 숨결도 좀 진정이 되고 자지도 슬슬 줄어드는 것이 느껴져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녀가 두다리를 더욱 옥죄며 속삭였다.




송금아는 방금 전까지 살을 섞고 있었던 소년, 아니 남자가 뒤처리를 하고 이불까지 덮어주는 동안 가만히 누어있기만 했다. 전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보지 속은 얼얼하고 맥이 다 풀렸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감격 때문이었다.
‘난생 처음’이라고 남자에게 털어놓았던 그 환희와 열광과 충족감, 더욱이 그녀 역시 난생 처음으로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온몸을 불태우려 달려들었던 열정이 아직도 뇌리와 몸 안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면 그것들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그녀는 무릎을 오므리고 두팔로 몸을 감싼 채 한동안 웅크려 있었다. 좀 더 오래 그 충만감을 간직하려고.

그 장님 점쟁이가 말한 귀인(貴人)이 저 소년일까? ······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벌써 33살, 그리 긴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느새 인생의 절정기는 지나가버린 것 같아 억울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유난히 영욕과 부침이 심했던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의식 속에 펄쳐졌다.
5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는 자라면서 부모에게 유난스런 귀여움을 받았고 커갈수록 무지개 같은 화려한 세계는 계속되었다. 다만 그녀가 그 끝이 낭떠러지며 그 아래는 지옥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

광성건재상사 사장인 송만석은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위로 아들 셋을 내리 낳고 그 다음의 두딸이 금순과 금아였다.
만석은 화도읍에서 자수성가의 한 표본으로 꼽힐 만 했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한 철물점 점원으로 일하며 아들 둘도 낳고 20여년만에 고향인 화도읍에 광성철물점을 열었다. 밑천이 별로 없어 처음은 구멍기게 수준이었지만 원래 착실하고 장사 수완도 좋아 나날이 점포는 커졌다.
특히 5.16쿠데타 이후 시골의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차츰 개발붐이 일어 시대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고 농지나 건물도 사들여 읍내 부자의 반열에도 오르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그는 못 배운 한을 풀겠다는 생각으로 자녀들 교육에도 공을 들였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의 기대에 별로 부응하지 못했다. 아들 셋중 둘째만 겨우 3류 대학을 나왔지만 지금도 제 앞가림을 제대로 못했고 두 아들은 공부에 뜻이 없어 고등학교만 나왔고 모두 아버지의 점포에서 일하고 있다.
첫딸인 금순도 1차 입학시험에 떨어져 읍내의 여고를 졸업하고 몇 년동안 대구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다 정말 별볼일 없는 금촌리의 한 농부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막내딸 금아는 모든 면에서 제 형들과 달라 가히 "5남매중의 백미(白眉)"라고 할만 했다.

금아는 예쁘고 재롱도 잘 부렸지만 또 남달리 총명했다. 읍내의 국민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줄곧 반에서 1등을 했고 대구의 여고에 유학을 보냈을 때도 전교에서 10등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막내딸은 또 그림도 잘 그렸다. 여고생 때 그녀가 그린 아버지의 스케치는 사진보다 더 닮아 지금도 만석의 방에 액자로 씌워 걸려 있다. 뒷산의 수채화는 볼수록 신기했다. 매일 보는 산이건만 딸의 화필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그 산은 윤곽은 같지만 색깔의 조화로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그 그림 역시 광성건재 사무실의 벽에 걸려 있다.

금아는 그녀의 희망대로 서울의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는 아니지만 당시 미술계에서는 서양화 부문 특히 비구상 쪽에서 꽤 영향력이 컸고 교수진도 좋아 금아가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이었다.
대학 4학년 때 그녀는 국전(國展)에서 현역 학생으로는 드물게 특선까지 했다. 그녀의 자질은 서울에서도, 아니 대한민국에서도 꿀릴 것이 없이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녀의 미모였다. 방학 때나 보게 되는 막내딸이 점점 성숙해져 가는 것을 보면 만석은 눈이 부시면서 마냥 행복했다. 그 딸은 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미 널리 알려진 명문대가의 며느리가 되었다.

만석과 사돈을 맺은 금아의 시집은 안동의 ‘권부자집’이었다.
이미 백여년 전부터 경상도에는 경주의 ‘최부자집’과 안동의 ‘권부자집’이 소문난 만석군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내력으로 보자면 최부자집이 훨씬 더 앞서 만석군의 명성을 얻었지만 부자의 규모나 실속으로 보자면 권부자집이 더 알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권부자집은 최부자집에 비하면 신흥 부자였던 셈이다.
조선시대 말기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로 조정을 휘어잡고 3대의 왕에 걸쳐 득세를 했을 때 안동권씨도 덩달아 그 영화의 일부를 나누어 가졌다. 안동권씨는 원래 안동김씨와 같은 뿌리였는데 고려 태조 때 공을 세워 권씨라는 성을 하사받은 것이다.

안동권씨는 안동 일대의 토호로 자리잡고 있지만 그중에도 ‘와우공파’가 가장 막강했고 그 14대 후손인 권병세가 지금도 권부자집으로 불리는 종가의 주인이었다. 병세는 금아가 시집갈 당시 50대 후반이었는데 가문을 잘 유지해 가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시대에도 잘 적응하는 현대적 신사 타이프였다.
그런 점은 근본적으로 최부자집과 권부자집의 전통과 가치관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부자집은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라는 것을 가훈으로 삼을만큼 개인의 영달보다는 이웃을 돕고 베푸는데 힘을 쏟았다.

반면 권부자집은 안동김씨의 득세 중에 영의정을 비롯해 정승이며 판서, 도승지나 목사 등도 배출하는 등 벼슬길에 오른 조상이 많았다.
그런 차이점 때문인지 최부자집은 시대의 격변 속에 쇠락해 가면서 뒷날 관광명소의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안동의 권부자집은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한때 “사방 80리를 권씨 땅 밟지 않고는 걷지도 못한다.”는 만석군의 명성은 잃었지만, 산업화 시대에 적응하며 몇 개의 기업과 학교도 세우고 주식투자도 하며 현재도 웬만한 재벌만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 금아는 그 종가의 후계자와 결혼한 것이다.

다만 그 결혼에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다.
미모가 빼어난 금아는 서울의 대학을 다니면서 당연히 캠퍼스의 별처럼 남학생들의 주목과 구애를 받았다.그러나 그녀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미술지망생들만 모인 대학에서 새로운 탐험에 몰두해서 한눈을 팔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석고의 뎃상이나 수채화만 그려왔던 여고시절과는 세상 자체가 틀렸다. 자료도 많이 접할 수 있고 교수들의 가르침이나 각종 전시회를 보면서 안목과 실력을 키우는데 몰두했다.

아버지가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얻어주었지만 같은 학교 여학생과 둘이 쓰는 방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창작은 주로 교내의 실습실에서 이루어졌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몇 명의 다른 학생들과 혹은 혼자서라도 시간 가는줄 모르고 그림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학생들 중에 유난히 집요한 남자가 있었다. 경제학과의 졸업반인 권상기라는 학생이었다. 끈질기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선물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되돌려 보내고 상대하지 않았다.

상기는 허우대도 잘 생겼고 옷차림이나 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여학생들의 관심을 끄는 캠퍼스의 킹카였다. 그녀가 더욱 그에게 냉담했던 것은 평판이 나빴기 때문이기도 했다.
분명 부자집 자식으로는 보이지만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한 것처럼 으스대고 건방 떠는 것도 싫었고,그와 사귀다 버림받은 여학생들도 꽤 많다는 소문도 달고 다니는 남자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10번을 찍어도 안 넘어가는 여인에게 극단적인 수단을 썼다.
밤 늦게 실습실에 혼자 있는 그녀를 똘마니 2명을 데리고 와서 반항을 못하게 하고 강간한 것이다. 다만 윤간은 아니었고 상기 혼자만 그녀를 범했다.

저항을 하느라 옷은 찢겨졌고 얼굴에 상처도 입은 차림으로 그녀는 수위에게 사고를 알렸고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경찰은 그날 밤 상기의 아파트에서 그를 체포했다.이 소식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가족에게도 즉각 알려져 송만석 부부와 권병세도 서울로 달려왔다. 만석 부부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딸을 보며 분노와 침통함으로 치를 떨었다.
병세는 유치장에서 아들을 면회하며 자식을 잘못 키운 것을 자책하고 아들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어쨌든 이 사건을 수습해야 했다.
명망과 전통을 이어온 종가의 상속자를 전과자로 만들어 조상에게 낯을 못 드는 일은 없어야 했다. 가장 빠른 길은 피해자와 합의를 보는 것이었다.

뒷날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 규정이 모두 폐지되는 형법 개정으로 성폭력범은 피해자의 고소와 상관없이 처벌받게 되지만 당시는 강간죄가 간통죄나 명예훼손죄처럼 친고죄였다. 피해자가 고소를 하지 않거나 취하하면 그냥 무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인 송금아는 경찰에게 “가해자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려주기 바란다.”고 진술하고 있었다.
병세는 금아와 그의 부친을 만나 우선 사죄하고 거액의 위자료를 제시하며 고소의 취하를 애걸했으나 그들은 딱 잘라 거절했다. 변호사를 내세워 액수를 올려 보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피해 여인과 부친을 만나본 인상으로 볼 때 그들의 분노는 도저히 돈으로 덮을 수가 없어 보였다.

상기는 꼼짝없이 형을 살아야 될 처지였다. 더구나 숫처녀를 강간했기에 강간에다 상해죄가 추가되고 집단납치죄까지 포함되어 최하 7년 이상의 징역형이 선고될 것이라는 것이 변호사의 판단이었다.
병세가 변호사와 머리를 맞대고 다시 꾀를 낸 것은 두사람을 결혼시키자는 것이었다.
먼저 유치장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네가 그녀를 강간한 것은 너무나 그녀에 대한 사랑이 간절해서였고 지금도 그녀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 꼭 결혼해서 속죄를 하면서 금실좋게 살고 싶다고 진술하라.”고 하자 이 덜 떨어진 자식은 입을 헤벌리고 좋아했다.

병세는 피해자와 부친에게도 “이것이 우리 아들의 진심.”이라며 설득과 애원을 했다.
만석부부는 가해자가 소문으로만 듣던 안동 권부자집의 아들이고 딸이 이왕에 버린 몸이라는 현실 때문에 조금 솔깃하는 것 같지만 직접 피해자인 금아는 여전히 완강했다.
“근본부터 못된 사람과 어떻게 일생을 같이 할 수 있느냐?”
딸의 반발에 아버지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금아는 3일만에 퇴원했다. 사실 그녀의 상처란 별것 아니었다. 경미한 타박상 말고는 처녀막 파열이라는 것인데 모든 여인이 남자를 받아들이며 한번은 겪는 과정일 뿐이다. 다만 정신적 안정이 더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유로 그녀는 고향에 잠시 가 있기로 했다.

금아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기어이 금아 모녀를 화도까지 자기 승용차로 데려다 주었다. 만석은 병세가 “남자끼리 좀 더 이야기하자.”는 바람에 병세와 나중에 가기로 했다.
“이 집에는 도대체 차가 몇 대야?”
병세의 벤츠 승용차를 함께 타면서 만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내와 딸이 타고 간 것도 고급 승용차였는데 대형 벤츠는 내부가 궁전 같고 승차감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 정도는 맛배기에 불과했다.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함께 들며 병세는 다시 자기 아들과 만석 딸의 결혼 이야기를 꺼냈고 만석은 “생각해 보겠다.”정도로 말했다.

주제의 대화는 짧게 끝났고 그 후로는 병세가 정치나 경제와 관련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병세의 박식함과 능숙한 언변에 빨려 들어가며 만석은 점점 그에게 호감이 갔다.
식사를 마친 후 두사람은 역시 벤츠를 타고 경상도 땅을 향했다.
병세는 “집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으니 잠시 안동을 거쳐 화도까지 모셔드리겠다.”고 제의했고 만석은 마지못한듯 동의했다. 그는 사실 말로만 듣던 권부자집의 실체도 한번 보고 싶었다. 막상 권부자집에 도착하고 보니 그 다음은 감탄과 부러움의 연속이었다.

80간의 기와집은 궁궐처럼 웅장하면서도 안팎이 정갈했다. 좌의정을 지낸 6대조가 낙향하면서 지은 것이라는데 “원래 99간을 지으려 했으나 마침 안동김씨 네가 99간을 짓는 바람 에 조금 낮춰 지은 것.”이라는 내력도 들었다.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하룻밤 유하시고 아침에 모셔 드리면 어떨까요?”
병세의 정중한 제의에 만석도 동의했다. 좀 더 이집에 대해 알고 싶었다. 사랑채에서 융숭한 저녁밥상을 받았고 일단 눈에 들어오는 가구며 휘호, 액자 등에서도 명문가의 전통과 저력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집주인의 전송을 받으며 그의 승용차에 혼자 타고 화도로 향할 때 만석은 권부자집을 한번 더 돌아보며 마음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내 딸을 이집 며느리로 앉히겠다고.
만석은 아내와 함께 열심히 딸을 설득했다.
기왕에 버린 몸이고 대학교 안이나 주위에도 소문이 많이 나서 앞으로 처신이 어렵다. 그 남자의 집은 직접 눈으로 보니 정말 대단터라.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끝까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앞으로 법정에서 네가 어떻게 당했는가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시 털어놓아야 한다. ······ 바로 이 점이 강간죄를 친고죄에 포함시킨 법의 정신이기도 했다. 피해자에게 이중의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결국 금아는 부모의 설득에 동의했다. 단 “대학교는 꼭 졸업하고 나서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병세는 “그럼 우선 약혼식을 올리도록 하자.”고 했다. 만석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여기에 한가지 조건을 더 추가했다.
“만약 금아가 졸업 후 파혼이 될 경우 남자측에서 거액의 위자료를 물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병세측은 모든 조건을 선선히 수락했다. 고소취하서가 접수되며 상기는 곧 석방되었고 무난히 학교를 졸업했다.

며칠후 서울의 한 호텔에서는 상기와 금아의 약혼식이 열렸다. 가족들만 모인 조촐한 모임이라지만 시골뜨기 만석의 식구들에게는 모든 것이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고 놀라웠다. 특히 금아에게 건네진 약혼예물로 큼직한 다이아반지와 진주목걸이, 비취노리개 등은 그 값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금순도 가족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그녀는 남모르게 눈물도 몇방울 흘렸다. 그녀의 동생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심은 이날 극에 달했다.
병세는 장래의 며느리감에게 대학 근처에 꽤 큰 아파트로 한 채 사주었다.

병세는 이 혼사가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아의 미모는 확실히 빼어나지만 지체나 가문으로 볼 때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집이었다. 못난 아들이 빼도박도 못할 범죄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혼담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차츰 그녀의 행동거지나 생각하는 것들이 요즘 젊은애들 같지 않은 좋은 며느리감이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다. 병세는 서울에 오게 되면 장래의 며느리를 불러 식사를 하거나 외제 그림재료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아버님 저 송구스럽지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한번은 금아가 병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약혼은 했지만 아직 결혼식을 올린 것도 아닌데 상기가 자꾸 추근댄다는 것이다.
상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경험을 더 하고싶다.”며 병세가 대주주로 있는 식품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마치 지금 남편인양 막 다루려 한다는 것이다.
“저는 물론 상기씨의 아내가 되기로 약정한 사이예요. 하지만 부모님의 허락과 축복을 받은 후에야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살짝 붉히는 것에서 병세는 아들의 못된 행동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식을 올릴 때까지는 금아에게 얼씬도 하지 마라. 아니면 내가 파혼을 시킬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며 장래의 며느리가 더욱 사랑스럽게 보이고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

결혼식은 뭇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정말 화려하고 뻐쩍지근하게 진행되었다.
“철물점의 예쁜이가 안동의 만석군 집으로 시집간다더라.”
이 소문은 좁은 화도 바닥에 파다하게 퍼져 납폐라고 신랑집에서 함이 들어올 때부터 줄줄이 구경꾼이 뒤를 따랐다.
3명의 함진애비가 메고 온 오동나무로 만든 함은 동네 아낙들이 가득 몰려든 중에 개봉되었는데 비단을 비롯한 각종 옷감과 패물들이 나올 때마가 탄성이 터졌다.

며칠후 신랑이 등장했을 때는 거의 읍 전체가 떠들썩했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은 나귀를 탔고 그 앞뒤로 10여명의 수행원들이 함께 했다. 신랑 일행은 안동에서 승용차와 버스로 이곳에 와서 나귀는 현지 조달한 것이지만 신부집까지 10여리를 행군하듯이 오니 신부집에 도착했을 때는 발 디딜 틈도 없을만큼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원삼 족두리와 활옷차림에 연지 곤지를 찍은 신부는 선녀가 하강한 듯 구경꾼들의 눈을 부시게 했다. 정식으로 부부가 된 두사람은 신부집에서 첫날밤을 치루었다.

이튿날 폐백을 드리러 안동의 시댁으로 향할 때 신부는 어제 신랑의 입장 때처럼 또 한 10여리를 꽃가마 타고 가서 오색테이프와 풍선으로 장식된 승용차에 갈아탔다.
혼례식에 신랑의 부모는 오지 않았지만 폐백길에 신부의 부모와 가족, 그리고 가까운 친지 몇 명은 동행했다. 신랑집에서 폐백 후 이어질 본격적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안동의 권부자집에서는 소 한 마리에 돼지 세 마리를 잡았고, 지난날 권부자네가 소유했던 땅처럼 사방 80리에서 하객들이 몰려들어 잔치는 3일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신랑 신부는 바로 다음날 하와이로 5박6일의 신혼여행을 떠났고 잔치에 참석했던 신부의 부모와 친척, 친지들은 그날 화도로 돌아왔다.
권부자집에서의 떠들썩했던 잔치는 그날 참석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꽤 오랫동안 읍내의 화제로 나돌았다.
“니 이름이 만석이더니 그래서 니는 못해도 만석군과 사돈을 맺었는갑다.”
친구들이 부러움 반 놀림 반으로 이런 말을 하면 만석은 웃음을 참지 못해 껄껄 웃고는 이렇게 응수했다.
“느그들 이름 탓만 하지 말고 내처럼 참한 딸을 하나 맹글어 봐라.”

딸을 떨어트리고 권부자집을 나서며 한번 더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만석은 갑자기 감정이 울컥했다.
“아무리 갑부 사돈이라도 그 덕보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하지만 니는 참말로 행복하게 살아야 한데이.”
속으로 이런 말을 전하며 그는 아내 앞에서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로는 막내딸만 생각하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자다 깨어서도 처럼 실실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 딸이 결혼 7년만에 소박을 당하고 친정에 돌아오더니 손목을 긋고 빈사지경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정신병원에 6개월이나 입원했고 지금도 거의 폐인이 되었다.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울화가 치밀고 눈물과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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