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그리고 사랑 - 8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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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해외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것이 괜히 사람의 마음을 미안하게 한다.
현석이 결혼준비와 분사준비로 바쁜시간을 보내는 사이에도 IMF가 주는 박탈감은 대단히 높았다.

구조조정으로 은행을 떠나게 되는 제일은행 직원의 일상을 담은, 별로 길지 않은 영상물 하나가 온 나라를 강타했다.
제목은 (내일을 준비하며) 였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의 비디오)로 불렸다.
이 비디오는 정말 온 나라를 울렸다.
그래도 비교를 해 본다면, 퇴직금도 못받고, 밀린 월급도 못받고 밀려나는 중소기업 직원들 보다는 행복한 현실이었지만, 온 국민들이 그것을 보고 울었다.

현석은 그것을 보고 함께 울어주기에는 자신의 앞에 닥친 일이 더 컸다.
신혼여행을 끝내고 출근을 한 다음날, 리포커싱 정책에 따라 분사신청을 한 것에 대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기획조정실에서는 경쟁을 유도하려는 방침이었겠지만, IMF 라는 특수상황에서 분사과정을 거쳐서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대략의 정보는 현석도 알고 있었지만, 현석의 회사에서 신청을 한 신청그룹이 3곳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영업권에 대한 자산가치를 산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술력을 가진 제조기업은 그 규모가 제법 있는편이다.
그런 상황이니 자본을 모으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계획서를 준비하면서 자본을 댈 사람을 모아야 했다.
적어도 신청시에 출자 확약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3월 중에는 반드시 공증받은 출자확약서를 제출해야 인정이 되도록 되어있었는데, 그 중에 1곳이 그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아웃 되어버리고 신청자가 2곳으로 줄었다.
그나마도 기획조정실에서 예측한 자산평가내용보다 현저하게 낮은 금액으로 제시를 했다는것이 소문으로 들려온 이야기였다.

현석과 같이 선정된 다른 한 신청자는 강성훈 상무였고, 그 역시 자기 사업본부를 주축으로 하고 있지만, 현석이 속한 사업본부의 일부 영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상무는 이미 사내의 다른 직원들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직원들이 많이 술렁거린 것 같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직원들이 꽤 많은것으로 알고 있지만, 비록 한곳이 탈락을 해서 줄어들기는 해도, 통과된곳이 2곳이니 아마 그리쉽게 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각각의 신청자들의 계획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한 회사에서 오랬동안 일해온 많은 직원들은 서로가 교류가 있기에, 술자리에서이거나 아니면 흡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정보를 공개하게 된다.
그것이 정보의 공개라는 느낌도 없이 공개되는 것이기에 언제 어느곳에서 어떻게 흘러서 상대방에게 전달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현석이 입사한지 그리 오래지 않음에고 강성훈상무의 계획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는것처럼, 강상무는 오래되었으니 현석의 계획에 대해 거의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기획조정실에서는 2곳을 상대로 조정작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건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인듯 하다.

* * *

똑똑~
“네. 들어오세요.”
현석이 강성훈상무의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갔을 때, 강성훈 상무의 방에는 부장인 송기현과 위우식이 있고, 눈에 익은 과장 세사람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명은 유인수 였던가? 그리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박찬익, 또 한명은 김주태로 기억된다.
“유과장, 누구 시켜서 차좀 달라고 하고, 다들 나가보게.”
“네, 말씀 나누십시오.”
그런데, 강상훈 상무가 나가라고 했음에도 송기현은 나가지 않고 그자리에 앉아있었고, 강상무 역시 추가로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내에서야 상무와 차장이라는 직급의 차이가 있다.
특히 임원과 직원의 차이는 무척이나 큰것이다.
송기현은 현석보다 한 직급이 높기도 하지만, 나이도 무척이나 많은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분사를 계획하는 입장에서 신청서상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적어도 분사이야기를 한다면, 강상무와 현석이 동급이지 송기현과는 격이 다르다.
그런데 송기현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니.
하긴 뭐 상관없다. 언제 그런거 연연하고 살았던가?

“그래, 김차장도 분사계획서 낸건 나도 알고 있네, 우린 선의의 경쟁자인가?”
강상무가 웃으면서 현석에게 물었다.
“네, 강상무님, 선정되신거 축하드립니다.”
“어이, 김차장도 선정 되었지 않나? 그건 뭐 피차일반이고, 앞으로 고생문이 훤 할것인데, 축하고 말고가 있나?”
“하긴 그렇긴 하지요.”
“그래 무슨일로?”
“아, 네. 강상무님이 신청한 계획에, 제가 신청한 우리 본부의 사업영역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풍문이 들려서, 기조실에서 조정을 하기전에, 미리 조정을 좀 해 두면 어떨까 해서 찾아 뵈었습니다.”
“그래? 그쪽 본부의 사업영역 일부가 있긴 하지.
그렇지만, 원래 내가 하고싶었던 일인데, 박사장님이 사업본부간 업무 조정할 때, 힘으로 뺏어가신거라서, 이번 기회에 좀 찾아왔으면 해서 말이야.”

들어있지 않다고 거짖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박일한 사장에게 충분히 들었다.
처음부터 강상무의 일은 아니었는데, 강상무가 가져가겠다고 몇번을 달라고 했었단다.
그런데 그는 말을 거꾸로 하고있다.
아무리 강상무가 본부장이고, 박일한 사장이 사장이긴 하지만, 강상무는 박일한 사장을 은근히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긴, 사내에서 경쟁자 아닌사람이 없겠지만, 그래도 강상무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간혹, 사장인 박일한에게는 보고를 누락하고, 회장님에게 보고한 일로 인해서 박일한 사장이 곤경에 처하게 한적이 몇번 있었던 것으로 현석도 들었다.
현석이 입사한 이후에도 한번 있어서, 현석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박일한 사장을 밀어내면, 자신이 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일까?
물론, 회장님이 박일한 사장에 대한 신임은 대단히 높아서 그런일로 인해서 내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조직을 장악하는 능력을 의심받을 수 있다.
현석이 회장의 위치라면, 강상무 같은 사람은 재 신임하지 않을것이다.
선의의 경쟁을 통한 승부는 장려할만한 일이지만, 보고를 누락하므로서 능력이 없는것처럼 비치게 하는 치졸한 벙법을 사용한다면 조직에 해가 될 뿐이다.
현석은 그런사람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룹에서는 부분적으로 잘라서라도 사내 직원들이 빠짐없이 분사하는 회사로 가 주는것이 모양이 좋았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으니 조금 곤란해 졌을것이다.
일부를 잘라가고 일부를 남기면, 남은것을 팔기가 곤란해 질 것이다.

현석이 강성훈 상무를 만나고자 한 것은, 각자의 본부에서 하고 있던 사업영역은 상대편에서 건들지 않는것으로 조정하면 어떤가? 하는것과 양쪽이 다 범위에 포함하지 않은 사업영역에 대해서 적당히 나누는 방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했는데, 말 하는 투로 보아서 협의가 안될 것 같다.
두사람이 조정이 안되면, 당초의 계획대로 정면승부하면 되는것이다.

강상무가 맡고있는 본부는, 지금도 3개본부 중에서 인원은 가장 많으면서 매출은 가장 적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래서 회장님이 주재하는 본부별 사업실적보고에 참석해 보면, 강상무가 많이 혼나는 편이다.
그러면서 욕심만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남이 하고 있는 것은 쉬워 보이는 이상한 사고를 가진 것 같다.
물론 평소에도 느끼는 것이었지만.
이 문제로 강상무와 한판승부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 * *

4월에 접어들자 분사와 관련하여 조정작업이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IMF하의 정부에서는 금융감독위원회라는 것이 설치되었다고 하고, 외평채를 40억달러씩 발행한다는 소식이 신문을 장식했지만, 그것을 쳐다보고 그게 뭐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4월이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분사와 관련된 일들이 본격화 되자 직원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았지만, 현석부서의 직원들은 별로 동요하지 않고있었다.
그리고, 현석은 일단 선정이 되었으니, 미루고 있던 일을 시작해야 했다.
직원들에게 받은 정보를 가지고, 다른 부서의 직원들과 새로운 회사에 합류여부에 대한 상담을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그런 일들로 인해서 정신없이 바쁜탓에 현아에 대한, 예리에 대한 고민을 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렇기는 해도, 지수에게 현아의 이야기를 어떻게 지수에게 꺼낼것인지 고민을 해 보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것에 대한 고백은 분위기 잡고 할 고백도 아니니,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연스러운 분위기여야 한다.
그기고, 현석의 이야기에 혹시나, 그녀가 그 충격으로 인해 뱃속의 아기에게 탈이라도 난다면, 그것 정말 심각한 이야기이다.
그러니 말을 쉽게 꺼낼일도 아니다.

* * *

현석은 지수의 말대로 주기적으로 주식 모니터링을 했다.
3월 초에 일일 주가제한폭이 8퍼센터에서 12퍼센터로 늘어나서인지, 주가의 변화가 더 커진 것 같다.
제한폭이 늘어났으니, 상한가나 하한가를 몇번만 치면 그 폭이 엄청나게 커졌다.
초기 인수대금 지불기한도 아직 남았고, 법인 설립과 관련해서 주금 납입일도 남아있지만, 지수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주가가 7만원이 넘어서자 8만주를 팔았다.

단번에 회사 인수에 필요한 돈이 모두 만들어 졌다.
어차피 분사를 하면 자본이 있어야 하기에 팔아야 하는 것이고, 처음에 지수는 5만주를 이야기 했지만, 운영자금도 있어야 하기에 여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기에 조금 더 팔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11만 4천주나 남아 있다.
이건 좀더 지켜보라는 지수의 이야기도 있어서 내버려 두고 지켜 볼 생각이다.

창구의 직원은 조금 더 오를 것 같은데, 왜 파느냐며 조금 더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부도설이 있으니 위험하다고 사지 말라고 했던 그 강대리이다.
그게 다 팔리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들 내리고 있는 IMF 에 더 오르는 주식이라니.
하긴 통신사의 주식도 오르고, 수출기업들의 주식도 오르고, 통신 장비를 만드는 회사들의 주식도 무척이나 오르고 있다.
그 외에도 주가가 오르는 회사가 무척 많다.
IMF 상황과 상관관계가 어찌 되는지는 몰라도 많은 회사들이 나빠지고 있지만, 그 중에도 좋아지는 회사도 대단히 많다.

* * *

주식을 팔고나자 정말 큰 돈이 손에 쥐어 졌다.
일찌기 상상속에서도 이런돈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IMF 이후에 이자가 얼마나 오르는지, 이 돈을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만 받아도 사업하는것보다 훨씬 더 수입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년 이자를 따져보니 현재 현석의 1년치 월급 정도는 거의 껌 수준이다.
사업을 하면 이보다 수입이 더 좋아질까?
그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 아니다 라는 생각은 든다.

집값을 받아서 지수 말대로 이 주식에 투자할 때만해도, 이렇게 주가가 엄청나게 뛰게 될지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지수를 만나면서부터 인생이 피기 시작하는 것인가?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런 행운이 찾아드는것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긴 뒤돌아보면 그녀를 만나고부터 불행하거나, 가슴 아픈 일은 생기지 않았다.
언제나 행운이 뒤따르고 있고, 언제나 좋은 소식 만 있다.
유일하게 가슴아픈 일이라면, 예리의 일이 가슴이 아프고, 현아를 내 딸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하긴 그것은 지수와 상관이 있는 일이 아니니 조금 다른것이다.

* * *

4월 중순에 분사가 결정되었다.
분사가 결정되자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한편으로는 법인을 설립하고, 또 한편으로는 분사시킬 현재 회사의 자산을 재평가하여 이관시킬 준비를 하는데, 현석은 현석이 맡고있는 거래처를 돌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어차피 분사한 뒤에도 거래를 이어가야 한다.

관공서들은 법인이 바뀌면, 실적이 초기화 되는 리스크를 안고 있는 점이 문제이긴 했지만, 전회사의 실적서류를 충분히 준비해 두고, 분사한 회사로 승계한다는 서류들도 미리미리 준비했다.
법적으로 유용한 서류가 될지, 소용없는 서류가 될지는 몰라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기는 할 것 같았다.

총무와 경리등 관련 직원을 충원하고, 바로 뒷건물에 사무실도 구해서 이사도 했다.
IMF로 인해 부도가 나는 회사가 많다보니, 빌딩의 공실이 증가해서 사무실 구하기가 쉬워진 것 같다.
새로이 셋업되는 회사는 기존의 사업부분을 그대로 가져 오기에 문제는 별로 없었지만, 새로이 조직을 만드는 과정은 시간이 필요로 했고, 안정화 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공장은 인수를 했으니 이전할 것도 없이 그대로 상호만 바꾸면 된다.
공장장은 그대로 현직 공장장을 임명했다.
공장장이 임원급이어서 전에는 현석이 하급 직원이었지만, 이제는 상관이 되어 버렸다.
하긴, 그런 사람들이 여렀이 있다.
기술부서의 서부장이 그렇고, 새 회사에 영업총괄 상무로 임명한 최동석부장이 그렇다.
두사람은 부장이었지만, 새 회사에서 상무로 발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과는 달라진 입장을 분명히 이해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그래도, 기존 하던 일과 본부내 다른부서의 일도 담당직원들을 함께 데려 오면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강상무가 욕심을 내었던 사업영역도, 해당본부에 우선권이 있는 것이 맞으니 현석의 계획에 포함된 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직원들을 다 데려 올 수 없었던 것이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소같으면, 봄나들이도 좀 다녔을텐데, 회사 인수시기가 봄이라서 봄나들이 같은것은 구경도 못해보고 지나가 버리는 것 같다.

그러는 중에도 정부에서 외국인 투자유치 종합대책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대책으로 인해 외국인들이, 외국의 펀드들이 우리나라의 큰 기업들을 마구 먹어치우게 될줄은 현석도 몰랐다.
하긴 알았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곧 6월이 된다.
아마 이제부터는 더위와 싸워야 할 것이다.
현아와 예리에 대한 이야기를 지수에게 어떻게 꺼내야 할지 정하지를 못하고, 기회도 잡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띠리링~
그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데 휴대폰이 울렸다.
“감사합니다. 김현석입니다.”
‘나, 엘리.’
전화기 저쪽에서 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웬일이지? 근무시간 중에는 전화를 잘 안하는데.
“응. 왜?”
‘나하고 어디 좀 갔으면 좋겠는데, 시간 가능해요?”
“응, 오후에 중요한 일은 없어, 약속이 하나 있는데, 최상무님하고 같이 만나기로 한 약속이라, 최상무님한테 맡기면 돼.”
최상무는 전 회사에서 직속이 아니긴 해도 분사전까지는 현석보다는 상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석이 사장이니 직급상으로는 부하직원이지만, 나이가 현석보다 훨씬 많아서 그것에 걸맞게 대해주는 입장이다.
“그럼, 좀있다 봐요. 지금 회사에서 한블록 떨어져 있거든요.’
“그래. 알았어.”

정말 지수는 5분도 안되서 회사 문 앞으로 왔다.
주차 안내를 하거나, 방문안내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차를 보고 인사를 하지, 사람을 보고 인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지수가 몰고 들어오는 차가 전에 여기에서 정기주차를 했으니 그들도 본적이 많을 것이다.
그때는 정문앞에 차를 대지는 않았지만, 이젠 지수도 정문앞에 차를 종종 가져다 댄다.
그래도 방문안내 경비원들이 아무소리 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방문 안내를 하는 경비원이 차에다 대고 부동자세로 서면서 경례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현석이 운전석으로 타고, 지수가 내려서는 조수석으로 타자, 안내 경비원이 문을 닫아주면서 경례를 멋있게 붙혔다.

“왜? 무슨일 있어?”
“네, 예리가 입원했어요. 병문안 좀 가요.”
엇, 이런.
또, 예리와 마주쳐야 된다고?
회사 분사와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 너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지수에게 현아와 예리 이야기를 하려던 것을 기회도 잡지 못한 상태로 시간이 제법 지났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에 예리를 찾아가보지도 못했다.
너무 바쁘긴 했다.
그러나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현아의 얼굴이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렸고, 현아만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을만큼 보고싶었지만, 다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당신, 같이 가도 되죠?”
“그럼.”
잠깐 생각했지만, 잠시의 어색함만 참으면 되리라.
그리고, 어차피 예리와의 관계도 고백을 해야 하니 같이 얼굴보는 것도 뭐 어떠랴 싶다.
결혼식 이후, 지수는 여전히 헨리라고 부르지만, 당신이라는 말을 종종 쓴다.
그 말은 또 다른 어감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혼자 가려고 나왔는데, 헨리랑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나하고는 또 막역한 사이이니까 이런때 당신도 좀 친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괜찮아.”
실은 안 괜찮다.
나, 안괜찮아.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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