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어린 여친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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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윤이의 언니 지원이는 다시 나와 마주친 것을 그리 반겨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자신의 동생과 사귀는 것을 탐탁찮아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대학시절 나쁜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입생이었던 대학교 1학년 때는 심심찮게 어울려 다니면서 밥을 같이 먹거나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지원이와 나는 1학년 때 나란히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당연히 기숙사 건물은 남녀로 나뉘어 있었지만 식당은 공동 공간이었기에 아침과 저녁을 먹으면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같은 과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보면 ‘하쓰미’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묘하게 지원이가 하쓰미 캐릭터와 겹쳐보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하쓰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게도 하쓰미 씨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마트하고 멋지고, 미드나이트 블루 원피스에 금귀고리가 잘 어울리고, 당구도 잘 치는 누나 말이죠.”
과연 지원이가 당구를 잘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서 이러한 향기를 느낀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지원이는 재수를 해서 나 보다 한 살 위였으니 비록 대학동기라고는 하지만 나이로는 누나였다.
그런 지원이와 서먹해진 것은 2학년 때 있었던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개강한지 얼마되지 않은 가을이었는데, 나는 과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 주점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간에 잠시 술을 깰 겸 근처 편의점에 커피를 사 마시러 갔는데, 그때 어렴풋이 지원이를 닮은 여자가 한 남자와 팔짱을 낀 채 모텔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것이다.
사실 술에 워낙 많이 마셨던지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었다. 다만 흘깃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여성이 지원이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 정도. 나중에 술에서 깨고 난 후 생각해봐도 그 여자는 지원이가 확실했고, 그녀도 분명히 나와 눈이 마주치며 나를 알아봤을 것이다.
별 일 아닌 거 같았지만 그 이후 지원이가 나를 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지윤이의 남자친구로서 다시 지원이를 마주했을 때, 지원이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는 지원이 보다 한 살 위의 남자로, 둘은 3년 가까이 교제했다고 한다.(물론 모텔촌 앞에서 지원이 옆에 있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사실 처음 지원이의 신랑감을 봤을 때는 ‘왜 지원이가 겨우 이런 남자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지원이와 나란히 섰을 때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작은 키에 도드라지도록 동그랗게 나온 배, 그리고 도수 높아 보이는 두꺼운 안경, 우울해 보이는 낯빛. 게다가 몇 번 대화를 나눠보니 인간성 역시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형부네 집이 좀 산다던데? 울산에서 손꼽히는 부자래.”
실제로 그의 집은 그 지역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이었다. 대체 얼마나 부자길래 지윤이가 이렇게 말하자 싶었는데, 역시나 대단한 부자라는 것을 지원이의 결혼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가본 결혼식 중 가장 사람을 기죽이게 하는 결혼식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자들에게는 결혼에 대한 판타지가 꽉꽉 충족되는 결혼식이었고, 남자라면 결혼식에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결혼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할 정도의 ‘돈지랄’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지원이를 마음에 들어 했던 시댁 쪽에서 식을 울산에서 올리는 대신 모든 비용부담을 업기로 했다는 것. 서울에 마련한 신접살림 역시 지원이는 몇 가지 혼수만 준비한 것이고, 이외의 모든 것은 남자 쪽에서 부담했다 한다. 까닭 모를 위화감이 들 정도의 부(富)였다.
---
지원이가 나를 결정적으로 반대하게 된 것은 ‘그 날’의 일 때문이었다. 2011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지윤이와 나는 비어있는 그녀의 본가에 들어가 스릴 있는 섹스를 즐기곤 하였다. 지윤이가 미리 가족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확실하게 안전한 시간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뒤처리를 하고 나오는 식이었다.
나는 충분히 스릴 있다고 느꼈지만 지윤이는 아직 모자랐나보다. 그녀는 언니 지원이가 있는 시간대에 집에서 섹스를 즐기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침대 위에서는 솔직한 청순 여대생의 당돌한 제안이었다.
“언니 방이랑 내 방이랑 완전 멀잖아. 큰 소리 내지 않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해보자!”
“너희 언니 예민하잖아. 난 내키지 않는데.”
“그러니까 더 재밌는 거지!”
“글쎄, 난 분명 내키지 않는다고 했어.”
하지만 어린 여자 친구의 징징거림을 무시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동생이 남자를 데려왔을 때 신경 쓰지 않을 언니가 어디 있을까?
아무리 조심해도 소리는 세어나가기 마련이다. 소리를 단속한다 해도 벌개진 얼굴과 미묘하게 가빠진 호흡을 숨기기는 어려웠다.
똑똑했던 지원이는 촉도 좋았다. 어쩌면 예전 지원이의 침대에서 지윤이와 섹스를 나눴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윤이는 똑똑한 자기 언니를 멘토로 생각했기에,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곤 했었다. 당연히 연애문제에 있어서도 언니 지원이의 의견을 많이 듣곤 하였다. 이따금 나와 크게 싸우면 쪼르르 언니에게 달려가 상담을 빙자한 나의 욕을 한 바가지 붓곤 하였고, 나와 화해한 이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언니가 오빠랑 헤어지라고 했어.”라는 말을 하곤 하였다.
처음에는 언니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들이 계속 될수록 나 역시 지원이가 고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
지윤이를 만나기 전까지 적잖은 여자를 만나보았고 지윤이와 헤어진 이후에도 여러 여자를 만나보았지만, 섹스를 나눈 횟수를 꼽자면 지윤이와 나눈 섹스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섹스의 질, 만족의 정도와는 별개로 단순히 횟수만 생각하면 우린 신혼부부만큼이나 서로를 찾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녀의 학교 화장실에서 나눈 섹스. 지윤이는 전공 특성상 밤늦게까지 연습실에 남는 날이 많았다 나는 퇴근 후 가끔씩 그녀를 찾아가 밤참을 사주곤 하였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학교 친구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고, 나는 그녀들 사이에서 ‘형부’로 불렸다. 특히나 그녀들이 좋아하는 밤참을 챙겨갈 때면 나는 ‘그냥 형부’에서 ‘우리 형부’가 될 수 있었다. 주로 지윤이가 좋아하는 BR31을 그녀들의 먹성을 생각하여 넉넉히 사 가곤 하였다.
한번은 지윤이를 비롯해 그녀의 친구들과 빙 둘러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지윤이가 잠시 나오라며 손을 잡아끄는 게 아닌가? 그녀는 친구들 들으라는 듯이 학교 한 바퀴 돌고 오자고 했지만 나는 그녀의 의도가 무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대에서의 섹스라....... 솔직히 딱히 내키지 않았다.
....... 뻥이다. 나도 못하는 생각을 한 지윤이의 대담함이 기특할 정도였다.
사실 그 전부터 성적 판타지 비슷하게 숨겨왔던 욕구가 있었다. 바로 암컷 냄새 가득한 지윤이의 학교에서 숨 죽여 즐기는 섹스. 그동안 지윤이의 학교를 오가며 봐둔 장소는 여대 ‘화장실’이었다. 아무래도 여대이다 보니 남자화장실에 누군가 들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지윤이의 연습실이 있는 음악실기동에는 홀수층에만 남자화장실이 있었는데, 세면대 하나와 좌변기 하나만 있는 매우 좁은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한 명이 들어가면 다른 이용자는 밖에서 기다려야만 하는. 완전 딱이었다.
우선 사람들 눈을 피해 화장실에 들어간 후 안쪽에서 문을 잠궜다. 그리고 양변기 칸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걸었다. 화장실에서 할 수 있는 체위는 한정적이었다. 기껏해야 내가 양변기 위에 앉고 그 위에 지윤이를 앉히는 자세, 혹은 내가 지윤이 뒤에 서서 그녀의 허리를 안고 들어가는 자세.
자세만큼이나 화장실 밖을 의식해야 하는 것도 거슬렸다. 여대이니만큼 남자의 출입은 많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화장실이 잠겨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앞에 기다리고 서있다면, 나중에 지윤이가 화장실을 나가기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윤이는 한 번 신음이 터지면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사정에 이르기 위해 속도를 높였고, 속도에 비례하여 지윤이의 달뜬 신음도 가빠졌다.
“하아, 아, 하악!”
행여나 눈 먼 신음 한 줄기가 화장실 밖으로 세어나가 누군가 듣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 했다. 빨리 끝내려는 마음에 더욱 속도를 높이면 지윤이의 신음 역시 그만큼 높아갔다.
결국 어떻게 다다랐는지도 모를 정도로 절정 끝에 긴 정액줄기를 지윤이 엉덩이 위에 흘렸다. 의도치 않은 섹스였기에 콘돔도 없었고, 그렇다고 바닥에 정액을 떨어뜨리는 것도 찜찜했다. 내가 지윤이 엉덩이 위를 휴지로 훔치는 순간에도 지윤이는 섹스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벽을 짚고 “하아, 하아.” 숨만 고를 뿐이었다. 나 역시 사정 후에 제대로 된 이성이 돌아와 화장실 밖에서 들리는 여자들의 이야기 소리에 잔뜩 오그라 들어버렸다.
화장실에 비해 연습실은 섹스를 위한 완벽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음대 연습실답게 방음이 완벽했다. 연습실은 미리 예약만 하면 정해진 시간 내에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문에는 작은 창이 있었지만 각도만 잘 조절하면 얼마든지 사각지대를 찾을 수 있었다.
“예전부터 유명했어. 남자친구 데려와서 이상한 짓 많이 한다고.”
지윤이는 애무를 받으며 말했다.
처음 연습실에서 섹스를 하던 날, 지윤이는 교복을 연상시키는 흰 블라우스와 체크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자는 블라우스의 단추만 푼 상태에서, 치마를 올리고 팬티만 벗긴 채로 그녀 안에 들어갔다. 알몸이 되는 것 보다 벗다시피 스쿨룩을 걸치고 하는 게 더 흥분되었다.
자세는 화장실에서의 그것과 다를 것 없었지만 완벽한 방음 덕에 느슨한 마음으로 여유있게 섹스를 마무리 지었다. 지윤이가 뱉는 신음과 살이 부딪히고 쓸리는 모든 소리는 방음시설이 잡아먹었다. 어쩌다 새어나가는 소리도 다른 연습실에서 나오는 악기 소리들과 화음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연습실 문을 열고 나갈 때면 얼굴에 닿는 시원한 바깥 공기가 참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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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이와 나의 헤어짐에 대해, 지윤이는 나의 무신경함이 원인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녀의 감정적인 언행과 철없는 모습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나 술에 취하면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오래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균열이 시작된 건 지원이의 결혼식 이후 부터였다. 언니의 성대한 결혼식을 본 지윤이는 이후 말버릇처럼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직 스물세 살 밖에 안 된 여대생이 꿈꾸기엔 결혼이 조금 이른 것 아닌가 싶었지만, 웨딩샵을 지나칠 때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서성이는 지윤이의 모습이 귀여워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윤이가 꾸는 결혼이라는 꿈이, 이르게 찾아온 몽상이 아니라, 아직 철없고 어리기만한 소녀가 꾸는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혼의 제대로 된 의미나 과정, 그리고 그 후에 따르는 책임 같은 것은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단지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미고 주인공의 위치에 서는 것만이 결혼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지윤이가 생각하는 결혼은 일곱 살 여자아이가 생각하는 소꿉놀이의 신부와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결혼식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나름의 계획을 짰다며 나에게 내민 결혼식 스케치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엄청난 부를 자랑하듯 치러진 언니의 결혼식을 능가하는 스케일이었다.
이런 결혼식을 치른 후에는 어떤 결혼생활을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도 망상에 가까운 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결혼관은 잘못 되어도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문제는 나에게도 있었다.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영원히 책임감 없는 어른으로 살고 싶었던 나는, 결혼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에 대해 계산하며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를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결혼 따위는 하지 않은 채 영원한 boy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가정을 꾸려 가장으로서 누군가를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주변의 친구들이 결혼적령기에 접어들어(스물아홉 살, 이미 동갑의 여자애들은 상당수 결혼을 했거나 준비 중이었고, 남자애들은 천천히 유부남이 되기 시작하는 나이) 주말마다 식장에 불려 다닐 때도 축하와 함께 ‘나는 이런 책임의식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나였다.
처음엔 관망하기만 했던 지윤이의 왜곡된 결혼관이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지윤이에게 다그치듯 짜증을 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지윤이의 결혼관을 바로 잡아 주었거나, 스스로 조금은 책임을 인지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면 우리는 파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서서히 우리 사이를 파고든 균열은 결국 잦은 다툼으로 경고신호를 보내왔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지윤이와 그런 지윤이를 다그치듯 이성적으로만 반응하는 나는 협박하듯 ‘헤어지자’는 말로 서로를 할퀴었다.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의 시효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져 버린 우리는 얼마지 않아 다시 서로를 찾았고, 이내 다투기를 반복했다. 나와 헤어져 있을 때면 지윤이는 지원이에게 쪼르르 달려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다툼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그 조언은 보나마나 나와의 헤어짐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철없는 지윤이 보다, 나를 낮춰보는 지원이에 대한 반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방귀가 모이면 똥이 되고, 구름이 모이면 비가 된다. 우리의 잦은 다툼은 결국 한 달동안의 헤어짐으로 똥이 되고 비가 되었다. 내가 실직을 고백하던 그 날이었다.
“그만 두다니 무슨 말이야?”
나는 사실상 퇴직을 권고 받은 내막을 감춘 채, 그저 잠시 쉬고픈 마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미리 상의하지 못하고 나 혼자 생각하고 행동한 건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나이 서른을 눈앞에 두고 대책 없이 일을 그만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스물세 살 여대생은 잘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잠시 쉰다는 내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들었기 때문일까? 지윤이는 심각한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이 하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식장은 어디에, 하객은 얼마나, 드레스는 어떻게, 신부화장은 어디서, 피로연 드레스는 어떤 색으로, 주례는 누구에게, 이벤트와 축가는 이런 식으로, 하객들 대접은 호텔코스로.......
그냥 들어도 짜증나는 그녀의 망상을 매우 디테일하게 쪼개어 듣자니 두통이 밀려왔다. 듣다 못한 나는 그녀를 말리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녀의 망상은 오히려 개미굴처럼 끝을 모르고 밑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결국 버럭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잘못이었다.
이후 우린 정확히 한 달 동안 연락을 끊었다. 나는 지윤이 없이 서른 살을 맞이하였고, 신정과 구정까지 보냈다. 나는 이 기간 동안 그녀와 완전히 헤어졌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 다시 호감을 갖고, 사랑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운 좋게 새로운 직장을 잡게 되었다. 예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수더분한 친구가 새로운 직장에 적을 두면서 나를 추천한 것이다. 마침 그곳 연구소의 국장님은 나의 대학은사이기도 했기에 나의 처지를 어루만져주며 손을 내민 것이다. 옛 은사의 전화를 받은 나는 세부조건을 묻지도 않고 그렇게 하겟다고 답을 드렸다.
연락이 온 곳은 또 있었다. 바로 지윤이었다. 첫 출근 이틀 전이었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나, 그날 나와 몸을 섞은 지윤이는 나에게 물었다. 자신과 헤어져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나는 무심하게 없다고 했다. 그럼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했었냐고 물었다. 나는 역시나 무심하게 그렇다고 답했다. 지윤이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며 내 가슴을 쳐댔다. 나는 짧게 답했다. 그 한 달 내내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정지윤, 너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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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 계속
지윤이의 언니 지원이는 다시 나와 마주친 것을 그리 반겨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자신의 동생과 사귀는 것을 탐탁찮아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대학시절 나쁜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입생이었던 대학교 1학년 때는 심심찮게 어울려 다니면서 밥을 같이 먹거나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지원이와 나는 1학년 때 나란히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당연히 기숙사 건물은 남녀로 나뉘어 있었지만 식당은 공동 공간이었기에 아침과 저녁을 먹으면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같은 과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보면 ‘하쓰미’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묘하게 지원이가 하쓰미 캐릭터와 겹쳐보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하쓰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게도 하쓰미 씨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마트하고 멋지고, 미드나이트 블루 원피스에 금귀고리가 잘 어울리고, 당구도 잘 치는 누나 말이죠.”
과연 지원이가 당구를 잘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서 이러한 향기를 느낀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지원이는 재수를 해서 나 보다 한 살 위였으니 비록 대학동기라고는 하지만 나이로는 누나였다.
그런 지원이와 서먹해진 것은 2학년 때 있었던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개강한지 얼마되지 않은 가을이었는데, 나는 과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 주점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간에 잠시 술을 깰 겸 근처 편의점에 커피를 사 마시러 갔는데, 그때 어렴풋이 지원이를 닮은 여자가 한 남자와 팔짱을 낀 채 모텔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것이다.
사실 술에 워낙 많이 마셨던지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었다. 다만 흘깃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여성이 지원이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 정도. 나중에 술에서 깨고 난 후 생각해봐도 그 여자는 지원이가 확실했고, 그녀도 분명히 나와 눈이 마주치며 나를 알아봤을 것이다.
별 일 아닌 거 같았지만 그 이후 지원이가 나를 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지윤이의 남자친구로서 다시 지원이를 마주했을 때, 지원이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는 지원이 보다 한 살 위의 남자로, 둘은 3년 가까이 교제했다고 한다.(물론 모텔촌 앞에서 지원이 옆에 있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사실 처음 지원이의 신랑감을 봤을 때는 ‘왜 지원이가 겨우 이런 남자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지원이와 나란히 섰을 때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작은 키에 도드라지도록 동그랗게 나온 배, 그리고 도수 높아 보이는 두꺼운 안경, 우울해 보이는 낯빛. 게다가 몇 번 대화를 나눠보니 인간성 역시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형부네 집이 좀 산다던데? 울산에서 손꼽히는 부자래.”
실제로 그의 집은 그 지역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이었다. 대체 얼마나 부자길래 지윤이가 이렇게 말하자 싶었는데, 역시나 대단한 부자라는 것을 지원이의 결혼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가본 결혼식 중 가장 사람을 기죽이게 하는 결혼식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자들에게는 결혼에 대한 판타지가 꽉꽉 충족되는 결혼식이었고, 남자라면 결혼식에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결혼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할 정도의 ‘돈지랄’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지원이를 마음에 들어 했던 시댁 쪽에서 식을 울산에서 올리는 대신 모든 비용부담을 업기로 했다는 것. 서울에 마련한 신접살림 역시 지원이는 몇 가지 혼수만 준비한 것이고, 이외의 모든 것은 남자 쪽에서 부담했다 한다. 까닭 모를 위화감이 들 정도의 부(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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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가 나를 결정적으로 반대하게 된 것은 ‘그 날’의 일 때문이었다. 2011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지윤이와 나는 비어있는 그녀의 본가에 들어가 스릴 있는 섹스를 즐기곤 하였다. 지윤이가 미리 가족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확실하게 안전한 시간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뒤처리를 하고 나오는 식이었다.
나는 충분히 스릴 있다고 느꼈지만 지윤이는 아직 모자랐나보다. 그녀는 언니 지원이가 있는 시간대에 집에서 섹스를 즐기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침대 위에서는 솔직한 청순 여대생의 당돌한 제안이었다.
“언니 방이랑 내 방이랑 완전 멀잖아. 큰 소리 내지 않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해보자!”
“너희 언니 예민하잖아. 난 내키지 않는데.”
“그러니까 더 재밌는 거지!”
“글쎄, 난 분명 내키지 않는다고 했어.”
하지만 어린 여자 친구의 징징거림을 무시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동생이 남자를 데려왔을 때 신경 쓰지 않을 언니가 어디 있을까?
아무리 조심해도 소리는 세어나가기 마련이다. 소리를 단속한다 해도 벌개진 얼굴과 미묘하게 가빠진 호흡을 숨기기는 어려웠다.
똑똑했던 지원이는 촉도 좋았다. 어쩌면 예전 지원이의 침대에서 지윤이와 섹스를 나눴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윤이는 똑똑한 자기 언니를 멘토로 생각했기에,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곤 했었다. 당연히 연애문제에 있어서도 언니 지원이의 의견을 많이 듣곤 하였다. 이따금 나와 크게 싸우면 쪼르르 언니에게 달려가 상담을 빙자한 나의 욕을 한 바가지 붓곤 하였고, 나와 화해한 이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언니가 오빠랑 헤어지라고 했어.”라는 말을 하곤 하였다.
처음에는 언니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들이 계속 될수록 나 역시 지원이가 고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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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이를 만나기 전까지 적잖은 여자를 만나보았고 지윤이와 헤어진 이후에도 여러 여자를 만나보았지만, 섹스를 나눈 횟수를 꼽자면 지윤이와 나눈 섹스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섹스의 질, 만족의 정도와는 별개로 단순히 횟수만 생각하면 우린 신혼부부만큼이나 서로를 찾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녀의 학교 화장실에서 나눈 섹스. 지윤이는 전공 특성상 밤늦게까지 연습실에 남는 날이 많았다 나는 퇴근 후 가끔씩 그녀를 찾아가 밤참을 사주곤 하였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학교 친구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고, 나는 그녀들 사이에서 ‘형부’로 불렸다. 특히나 그녀들이 좋아하는 밤참을 챙겨갈 때면 나는 ‘그냥 형부’에서 ‘우리 형부’가 될 수 있었다. 주로 지윤이가 좋아하는 BR31을 그녀들의 먹성을 생각하여 넉넉히 사 가곤 하였다.
한번은 지윤이를 비롯해 그녀의 친구들과 빙 둘러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지윤이가 잠시 나오라며 손을 잡아끄는 게 아닌가? 그녀는 친구들 들으라는 듯이 학교 한 바퀴 돌고 오자고 했지만 나는 그녀의 의도가 무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대에서의 섹스라....... 솔직히 딱히 내키지 않았다.
....... 뻥이다. 나도 못하는 생각을 한 지윤이의 대담함이 기특할 정도였다.
사실 그 전부터 성적 판타지 비슷하게 숨겨왔던 욕구가 있었다. 바로 암컷 냄새 가득한 지윤이의 학교에서 숨 죽여 즐기는 섹스. 그동안 지윤이의 학교를 오가며 봐둔 장소는 여대 ‘화장실’이었다. 아무래도 여대이다 보니 남자화장실에 누군가 들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지윤이의 연습실이 있는 음악실기동에는 홀수층에만 남자화장실이 있었는데, 세면대 하나와 좌변기 하나만 있는 매우 좁은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한 명이 들어가면 다른 이용자는 밖에서 기다려야만 하는. 완전 딱이었다.
우선 사람들 눈을 피해 화장실에 들어간 후 안쪽에서 문을 잠궜다. 그리고 양변기 칸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걸었다. 화장실에서 할 수 있는 체위는 한정적이었다. 기껏해야 내가 양변기 위에 앉고 그 위에 지윤이를 앉히는 자세, 혹은 내가 지윤이 뒤에 서서 그녀의 허리를 안고 들어가는 자세.
자세만큼이나 화장실 밖을 의식해야 하는 것도 거슬렸다. 여대이니만큼 남자의 출입은 많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화장실이 잠겨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앞에 기다리고 서있다면, 나중에 지윤이가 화장실을 나가기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윤이는 한 번 신음이 터지면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사정에 이르기 위해 속도를 높였고, 속도에 비례하여 지윤이의 달뜬 신음도 가빠졌다.
“하아, 아, 하악!”
행여나 눈 먼 신음 한 줄기가 화장실 밖으로 세어나가 누군가 듣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 했다. 빨리 끝내려는 마음에 더욱 속도를 높이면 지윤이의 신음 역시 그만큼 높아갔다.
결국 어떻게 다다랐는지도 모를 정도로 절정 끝에 긴 정액줄기를 지윤이 엉덩이 위에 흘렸다. 의도치 않은 섹스였기에 콘돔도 없었고, 그렇다고 바닥에 정액을 떨어뜨리는 것도 찜찜했다. 내가 지윤이 엉덩이 위를 휴지로 훔치는 순간에도 지윤이는 섹스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벽을 짚고 “하아, 하아.” 숨만 고를 뿐이었다. 나 역시 사정 후에 제대로 된 이성이 돌아와 화장실 밖에서 들리는 여자들의 이야기 소리에 잔뜩 오그라 들어버렸다.
화장실에 비해 연습실은 섹스를 위한 완벽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음대 연습실답게 방음이 완벽했다. 연습실은 미리 예약만 하면 정해진 시간 내에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문에는 작은 창이 있었지만 각도만 잘 조절하면 얼마든지 사각지대를 찾을 수 있었다.
“예전부터 유명했어. 남자친구 데려와서 이상한 짓 많이 한다고.”
지윤이는 애무를 받으며 말했다.
처음 연습실에서 섹스를 하던 날, 지윤이는 교복을 연상시키는 흰 블라우스와 체크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자는 블라우스의 단추만 푼 상태에서, 치마를 올리고 팬티만 벗긴 채로 그녀 안에 들어갔다. 알몸이 되는 것 보다 벗다시피 스쿨룩을 걸치고 하는 게 더 흥분되었다.
자세는 화장실에서의 그것과 다를 것 없었지만 완벽한 방음 덕에 느슨한 마음으로 여유있게 섹스를 마무리 지었다. 지윤이가 뱉는 신음과 살이 부딪히고 쓸리는 모든 소리는 방음시설이 잡아먹었다. 어쩌다 새어나가는 소리도 다른 연습실에서 나오는 악기 소리들과 화음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연습실 문을 열고 나갈 때면 얼굴에 닿는 시원한 바깥 공기가 참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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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이와 나의 헤어짐에 대해, 지윤이는 나의 무신경함이 원인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녀의 감정적인 언행과 철없는 모습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나 술에 취하면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오래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균열이 시작된 건 지원이의 결혼식 이후 부터였다. 언니의 성대한 결혼식을 본 지윤이는 이후 말버릇처럼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직 스물세 살 밖에 안 된 여대생이 꿈꾸기엔 결혼이 조금 이른 것 아닌가 싶었지만, 웨딩샵을 지나칠 때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서성이는 지윤이의 모습이 귀여워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윤이가 꾸는 결혼이라는 꿈이, 이르게 찾아온 몽상이 아니라, 아직 철없고 어리기만한 소녀가 꾸는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혼의 제대로 된 의미나 과정, 그리고 그 후에 따르는 책임 같은 것은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단지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미고 주인공의 위치에 서는 것만이 결혼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지윤이가 생각하는 결혼은 일곱 살 여자아이가 생각하는 소꿉놀이의 신부와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결혼식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나름의 계획을 짰다며 나에게 내민 결혼식 스케치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엄청난 부를 자랑하듯 치러진 언니의 결혼식을 능가하는 스케일이었다.
이런 결혼식을 치른 후에는 어떤 결혼생활을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도 망상에 가까운 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결혼관은 잘못 되어도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문제는 나에게도 있었다.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영원히 책임감 없는 어른으로 살고 싶었던 나는, 결혼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에 대해 계산하며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를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결혼 따위는 하지 않은 채 영원한 boy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가정을 꾸려 가장으로서 누군가를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주변의 친구들이 결혼적령기에 접어들어(스물아홉 살, 이미 동갑의 여자애들은 상당수 결혼을 했거나 준비 중이었고, 남자애들은 천천히 유부남이 되기 시작하는 나이) 주말마다 식장에 불려 다닐 때도 축하와 함께 ‘나는 이런 책임의식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나였다.
처음엔 관망하기만 했던 지윤이의 왜곡된 결혼관이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지윤이에게 다그치듯 짜증을 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지윤이의 결혼관을 바로 잡아 주었거나, 스스로 조금은 책임을 인지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면 우리는 파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서서히 우리 사이를 파고든 균열은 결국 잦은 다툼으로 경고신호를 보내왔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지윤이와 그런 지윤이를 다그치듯 이성적으로만 반응하는 나는 협박하듯 ‘헤어지자’는 말로 서로를 할퀴었다.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의 시효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져 버린 우리는 얼마지 않아 다시 서로를 찾았고, 이내 다투기를 반복했다. 나와 헤어져 있을 때면 지윤이는 지원이에게 쪼르르 달려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다툼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그 조언은 보나마나 나와의 헤어짐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철없는 지윤이 보다, 나를 낮춰보는 지원이에 대한 반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방귀가 모이면 똥이 되고, 구름이 모이면 비가 된다. 우리의 잦은 다툼은 결국 한 달동안의 헤어짐으로 똥이 되고 비가 되었다. 내가 실직을 고백하던 그 날이었다.
“그만 두다니 무슨 말이야?”
나는 사실상 퇴직을 권고 받은 내막을 감춘 채, 그저 잠시 쉬고픈 마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미리 상의하지 못하고 나 혼자 생각하고 행동한 건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나이 서른을 눈앞에 두고 대책 없이 일을 그만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스물세 살 여대생은 잘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잠시 쉰다는 내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들었기 때문일까? 지윤이는 심각한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이 하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식장은 어디에, 하객은 얼마나, 드레스는 어떻게, 신부화장은 어디서, 피로연 드레스는 어떤 색으로, 주례는 누구에게, 이벤트와 축가는 이런 식으로, 하객들 대접은 호텔코스로.......
그냥 들어도 짜증나는 그녀의 망상을 매우 디테일하게 쪼개어 듣자니 두통이 밀려왔다. 듣다 못한 나는 그녀를 말리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녀의 망상은 오히려 개미굴처럼 끝을 모르고 밑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결국 버럭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잘못이었다.
이후 우린 정확히 한 달 동안 연락을 끊었다. 나는 지윤이 없이 서른 살을 맞이하였고, 신정과 구정까지 보냈다. 나는 이 기간 동안 그녀와 완전히 헤어졌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 다시 호감을 갖고, 사랑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운 좋게 새로운 직장을 잡게 되었다. 예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수더분한 친구가 새로운 직장에 적을 두면서 나를 추천한 것이다. 마침 그곳 연구소의 국장님은 나의 대학은사이기도 했기에 나의 처지를 어루만져주며 손을 내민 것이다. 옛 은사의 전화를 받은 나는 세부조건을 묻지도 않고 그렇게 하겟다고 답을 드렸다.
연락이 온 곳은 또 있었다. 바로 지윤이었다. 첫 출근 이틀 전이었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나, 그날 나와 몸을 섞은 지윤이는 나에게 물었다. 자신과 헤어져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나는 무심하게 없다고 했다. 그럼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했었냐고 물었다. 나는 역시나 무심하게 그렇다고 답했다. 지윤이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며 내 가슴을 쳐댔다. 나는 짧게 답했다. 그 한 달 내내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정지윤, 너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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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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