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 조금 더 진한 그레이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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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 조금 더 진한 그레이 -2부-



언젠가 자살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깨끗하고 자연스러운 죽음. 아무도 자살이라고 생각지 못할 자연사. 그 당시 나를 지배했던 구원자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난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의지는 실행을 따라가려 했지만 본능이 놓아주지 않았다. 난 의지박약아였다. 오피스텔 창밖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난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와 함께 근처 대학교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친구를 잠시 떠올렸다. 그 녀석은 자살하기 얼마 전 교실 책상에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던 내 귓속에 대고 어젯밤에 여자 친구랑 그거 했어, 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자다 일어나 눈곱도 떼지 않고 뭘, 이라고 묻는 나에게 녀석은 자랑스러운 듯 왼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그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아래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하늘로 날아가는 느낌이었어.

희멀건 한 눈으로 난 녀석을 쳐다보았고, 친구는 빙긋 웃었다.

. 하늘은 나중에 올라가시고, 가서 잠이나 주무셔.

나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좋겠다, 새끼, 라고 생각했다. 이 새끼는 언제나 나보다 한 발 빠르네, 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동정이었다. 녀석은 자신의 가슴을 툭툭치더니 승리에 포효하는 사자처럼 한 손을 위로 쭉 뻗었다.

녀석의 자살 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등굣길에서 포뮬러 레이서처럼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한 번 뛰어들어볼까? 라고 생각만 하고는 또 다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다시 무기력하게 뒤돌아서 출석한 교실에서였다. 담임은 무덤덤한 얼굴로 이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너무 신경쓰지 말고 들어라, 하고는 녀석이 어제 자살했다, 라고 짧은 단신뉴스를 전하듯 소식을 전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하고 담임이 말할까봐 나는 두려웠다. 나는 담임이 아나운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속한 세상이 뉴스 속의 무관심한 세계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곧 이어. 곧 이어, 나는. 곧 이어. 나는 무너졌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지나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느낌이 내 안에서 무참하게 일어섰다가 다시 뭉개졌다. 나는 붕괴되어버렸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의 여자 친구가 임신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다 어느 새벽에 함께 근처 대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그래. 그들만의 고민. 그들이 잠시 머물렀다던 벤치 아래에는 수북한 담배꽁초가 비에 젖은 것처럼 나뒹굴고 있었다고 했다. 경찰은 그 소식마저 무표정하게 얘기했다. 발견된 녀석의 유서에는 우리 영원히 사랑하자, 사랑하는 아가야 널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엄마 아빠를 부디 용서해주렴,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날 용서하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나는 녀석이 날아가 버린 하늘을 쳐다보며 이번에도 네가 한 발 빨랐네, 이런 건 내가 빨라도 되는데,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새끼 이렇게 갈거면 진작에 미리 얘기라도 좀 해주지, 그 날 눈곱이나 떼고 대답해 줄 걸, 하고 후회하며 밤새도록 울었다. 나의 울음은 계통도 주체도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허망하게 종적을 감춰 소멸해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해 나는 대학에 붙었다. 녀석은 단 한 번에 죽음의 하늘에 도달했다. 그러나 녀석과는 다르게 나의 깨끗하고 자연스러운 자살은 언제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의지는 본능을 쉽게 이기지 못했다. 의지는 쉽게 문을 열어 주었지만, 기회는 그 문턱을 쉽게 넘지 못했다.

한 달쯤 전에도, 그러니까 여자를 만나기 이전인 지난달 초순 경, 룸살롱에서 만난 어떤 아가씨와 함께 내 오피스텔에서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그 날, 마셔도 취하지 않던 양주를 세 시간에 걸쳐 마신 후 아가씨를 재우고 나서, 나는 복층 난간에 전깃줄을 묶었다. 올가미는 쉽게 세상의 경계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너무 쉬워, 올가미 속 세상은 당황스러웠다. 난 다시 양주를 꺼내 마셨다. 양주의 독한 기운은 나를 쓰러뜨리지 못했고, 나 역시 독하지 못했다. 한참 후 난 겨우 올가미에 머리를 끼워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잠든 줄 알았던 아가씨가 깨어났고, 한쪽 팔과 머리가 같이 낀 채 어수룩한 죽음의 모습으로 버둥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온 몸을 비틀며 올가미의 줄을 간신히 풀고 나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아가씨의 목을 휘어잡아 그 목구멍에 내 성기를 쑤셔 박아 버렸다. 비명은 무참했고, 무참한 성기엔 안도가 스며있었다.


가서 술이나 사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아버지는 항상 나를 그렇게 불렀다. 쓰레기 같은 새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개만도 못한 새끼. 나의 이름은 그것으로 굳어진 듯했다. 호칭은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명목에 쫓겨 다녔고 허상에 짓밟혔다. 다만 폭력은 허상이 아니었다. 하얀 절벽같은 현실이었다. 울지 못했고, 울 수 없었던 정신은 가장 무거운 짐을 겨우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나는 사자가 되지 못한 영원한 낙타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언제나 도망 다녀야 했다. 내 동생은 한 마리의 울음벌레가 되었다. 우는 것이 동생의 할 일이었다. 그리고 맞는 것. 술은 아버지의 안식처이자 그의 친구였고, 폭력은 그의 구원자였는데 왜 내가 부서져야 되는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너무 어렸다. 아버지는 부지런한 농부처럼 폭력을 행사했고, 폭력은 매일같이 계속 되었다. 밤은 악몽이었고, 낮은 재난이었다. 그곳에 신은 없었고, 구원은 요원했다. 희망은 쓰레기통에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폭압도 얼마 후 끝이 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아버지보다 힘이 세진 것이었다. 이건 지옥에서 선사하는 개그. 결국 구원은 나 자신이었다. 신은 일찌감치 죽어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폭력은 자연사했다. 그러내 가슴 속의 절망은 죽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어린 새싹의 꺾인 뿌리는, 생장이 되어도 땅 속에 거꾸로 처박힌 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니체의 구현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절망의 한 가운데 서 있던 어느 날이었다. 대기를 가득 메운 절망은 나를 주저앉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날도 난 도서관에서 RADIOHEAD의 CREEP을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었다. 하늘은 파랬고, 대기는 싱그러운데 내가 당도하고 있는 이 곳이 어디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난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불쾌하고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 채로 나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울음은 꽉 막힌 채 사소한 눈물만 벌레의 진액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벌레가 된 것 같았다. 흘러나오던 노래의 테이프가 조금 늘어졌을 때쯤, 그녀가 나타났다. 깃털 같은 천사처럼, 파란 스커트를 입고, 긴 생머리를 질끈 묶은, 가슴에 품은 성경책을 두 손으로 받히고 있던, 지독하게도 특별해 보였던, 그녀가 말이다.


오빠.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나는, 나를 부르는 기억을 따라 걸었다. 빛이 가득했지만 곧 어둠이 다시 엄습해왔다. 기억은 캄캄했고 그럴수록 선명했다. 난 오빠, 라는 부름에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니 웃고 있었다. 그것은 미소였다. 한없이 투명한 순수의 미소. 아직 찬송가의 감동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얗게 표백된 순백의 성가대 옷이 보였다. 그 속에 담긴 진실. 나는 그녀가 부활한 성모 마리아인줄로 착각했다.

응. 왔어?

오빠, 표정 봐.

까르르, 웃는 그녀의 웃음. 그 웃음을 보며 난 출구도 깊이도 없는 자궁의 어둠에서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암흑에 파묻혔던, 작고 초라했던 점이 갑자기 확대되어 빛이 되는 순간.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노래, 아니 찬송가, 잘 부르더라.

잘 부르긴. 얼마나 많이 틀렸는데.

아니야. 정말 잘 불렀어. 나, 감동까지 받았는데.

그녀는 혀를 쏙 내밀고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그녀의 모습에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몸의 일부가 꿈틀거렸다. 나는 그것이 불결한 타락의 상징처럼 느껴져 두려웠다. 교회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래, 적어도 그때의 난 그랬다.

우리 오빠 교회 자주 나오게 하면 안 되겠다. 자주 나오면 내가 찬송가 부를 때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다 알게 될 거 아냐. 안 그래?

아니야. 그래도 난 좋을 거야. 그리고 교회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않아? 나오지 말라니, 자주 나오라고 해야지. 벌 받을지도 몰라.

난 십자가를 힐끔 쳐다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녀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 우리 오빠는 너무 착해,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하얀 성가대 옷이 그녀의 웃음을 따라 나풀거렸다. 우리 오빠, 라는 말이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 귀에서 웅웅거렸다. 우리 오빠. 우리 오빠. 우리. 우리. 너와 나, 우리. 나는 그녀를 빛처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어쩌면 내가 말한 벌은 그때부터 나를 조금씩 갉아먹은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방금 그 찬송가 제목이 뭐니?

어메이징 그레이스.

나의 물음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란 곡이야, 좋지? 라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노예상인이었던 존 뉴턴이 풍랑에서 살아남은 후 회개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후에 자신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가 만든 곡, 이라고 그녀는 설명해 주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는 거대한 은총을 그녀에게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허무의 대지에서 방황하던 나 같은 죄인도 존 뉴턴처럼 살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존 뉴턴은 죽었고, 신도 사라졌는데 나는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희망을 품었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녀가 있었기에 그런 멍청한 꿈을 꾸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룸살롱 천장을 향해 풍랑처럼 몰려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조금도 때가 묻지 않은, 하얀 순수의 상징 같던 그녀에게 희망 같던 기대를 품고 싶었는지도.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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