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 조금 더 진한 그레이 - 10부

작성자 정보

  • AV야동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애쉬, 조금 더 진한 그레이 -10부-



혹시 존경하는 사람 같은 거 있어요?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한 후 여자와 나는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바로 일층 로비에 있는 바BAR로 갔다. 아직 저녁을 못했기에 여자와 나는 간단한 식사와 술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바에 있는 커다란 전면 유리창으로 끝도 없는 바다가 들어왔다. 은은한 조명은 푸른빛으로 실내를 아스라이 밝히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한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는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는 모파상처럼 뚜껑이 덮힌 채로 고요하게 놓여있었고, 새해의 아침을 맞으러 들른 몇몇 사람들만이 늦은 시간 속에서 두런두런 속삭이며 고요를 잠재웠다. 골든베르크 변주곡은 나직하게 공간 속에 침잠하고 있었다. 실내는 평온했고, 절망이 들어설 자리는 이곳의 그 어디에도 없어보였다. 나는 피아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치 짝을 잃은 사람처럼. 나는 안식 속에서 알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나와는 동떨어진 모든 안식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푸른 절멱 아래로 떠밀것만 같았다. 여자는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림은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과 도메니코 페티의 참회하는 막달레나가 걸려있었다. 여자는 그 중 참회하는 막달레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한참 그림을 보고 있던 여자는 저 여자가 창녀였던 그 여자 맞죠? 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며 그림을 힐끗 쳐다본 다음 불을 붙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근데 가슴에 안고 있는 건 아기인가봐.

여자가 그림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단정하듯 말했다. 나는 담배연기를 한껏 들이마신 후 얘기했다.

해골이야.

예? 해골?

그래. 해골.

나의 말에 여자는 성녀라더니 무슨 해골을 보고 있대?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정말 창녀 맞나봐, 라고 했다. 여자는 웨이터가 들고 온 양주를 나의 잔에 따라주었다. 나는 여자가 보고 있던 그림을 다시 쳐다보았다. 어스름한 불빛의 어둠 안에서 턱을 괸 채 해골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막달레나는 인상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잠든 바다의 몽환처럼 보였다. 나는 시선을 돌려 술을 마시고 있던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술잔에 다시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창녀였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막달레나는 회개했다는 거야. 회개. 그게 중요한거야. 본질을 희석시키지 마.

나의 말에 여자는 술잔을 내려놓고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그럼 존경할만도 하겠네요, 라고 했다. 그리고 턱을 괴더니 나도 성녀까지는 아니더라도 회개정도는 할 수 있는데, 라고 말하며 술잔의 술을 비웠다. 여자의 목소리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여자의 술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여자는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을 경험한 후 절망의 끝을 확인한 사람처럼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뭔가 더 얘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여자의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여자는 비어버린 나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아저씨는 어쩜 그렇게 잘 알아요? 정말 교회에 다녔던 거 아니에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의 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만 축이더니 잠깐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바 한쪽에서는 히스패닉 계열의 남자와 백인 여자가 연주용 의상과 드레스를 입은 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곧 흘러나오건 골든베르크 변주곡이 끝나고 실내는 잠시 적막에 잠겼다. 멀리 바다가 해안으로 부딪히며 몸을 비벼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여자가 흐릿한 눈으로 내게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혹시 존경하는 사람 같은 거 있어요?

모든 것이 잠시 소음을 멈추었던 실내에 나른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조금 전 피아노로 가있던 히스패닉 남자와 백인 여자가 나란히 서더니 손님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곧 그 남자는 튜닝을 하듯 피아노를 가볍게 쳤고, 백인 여자는 마이크를 잡았다. 여자는 턱을 괸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 사람들, 부부 같지 않아요? 라고 혼잣말처럼 말하더니 이내 나를 향해 우리는 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 것 같아요? 하고 물었다. 나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히스패닉 남자는 피아노 조율이 끝났는지 백인 여자에게 눈짓을 했고, 백인 여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실내에는 재즈 선율의 Let it be가 흘러나왔다. 헬렌 메릴의 곡이었다. 짙은 목소리의 백인 여자는 눈을 감고는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나의 영혼도 흔들릴 것만 같았다. 나는 오래전에 좋아했던 어떤 영화를 떠올리며 음악에 잠겨 들었다. 내가 말없이 술만 마시자 여자는 나의 빈 잔에 술을 부어주며 존경하는 사람, 없어요? 라고 다시 물었다. 난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과 입술을 잠시 쳐다본 후 시선을 피아노로 옮기며 말했다.

노자.

난 다시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매캐한 기운이 아래로부터 끓어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시려 고개를 들 때 노래를 부르고 있던 백인 여자와 잠시 눈이 마주 쳤다. 백인 여자의 표정은 안개에 젖어든 사람처럼 한없이 허무해 보였다. 여자는 술 좀 천천히 마시세요, 이러다 바닷가에도 한 번 못 가보겠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얼굴을 바싹 내밀고 다시 물었다.

왜요?

왜, 노자를 존경해요? 여자의 말에 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한껏 연기를 뿜은 후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어냈다. 시커먼 재가 재떨이에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문득 차 앞유리에 붙어 있던 나방 조각이 신경쓰였다. 조금 전 차에서 내릴 때 보니 날파리들이 들러붙어 죽은 나방의 시체 조각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차의 주변으로는 시커먼 파리들이 붕붕거리며 달려들 태세를 하고 있었고, 여자는 입가에 묻어 번들거리는 정액찌꺼기를 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차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휴지였다. 그 휴지로 유리를 닦았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곳에 와서까지 그런 것들에 얽매이고 있는 나 자신이 불편했다. 생각은 나를 경계의 언저리까지 인도했는데, 결국 경계 안으로 나를 밀어 넣는 건 나 자신 같았다. 나는 자꾸 이어지는 생각을 담배 연기와 함께 비벼 내 안에서 내보냈고, 생각을 끊어버리려 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여자는 다시 왜요? 라고 물었다. 노래를 부르던 백인 여자의 노래가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사라졌거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추가로 안주를 날라 오던 웨이터가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여자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 후 나에게 드세요, 맛있어 보여요, 라고 얘기했다. 웨이터에게 미소를 보내던 여자를 보며 나는 아직 그 입술에 내 정액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나는 문득 여자의 입 속에 내 음모가 남아 뿌리를 내리는 환상을 생각했다. 생각하다가 공연히 내 입 속이 깔깔해짐을 느끼고는 잔에 남아있는 술을 털어 입 안에 가득 채웠다. 나는 술을 입 안에서 작게 굴려서 목구명 안으로 넘겼다. 마치 내 입 속에 남아있는 여자의 잔여물을 위장 속으로 넘겨버리듯. 여자는 다시 내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그런 말, 이제 싫어요.

여자는 턱을 괴더니 텅 빈 눈빛을 하고 피아노 쪽을 쳐다보았다. 백인 여자의 노래는 이미 끝이 났고, 다시 나른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다음 곡은 클래식 피아노 연주곡입니다, 라는 안내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나는 여자를 잠시 쳐다본 뒤 다시 여자의 시선을 따라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자의 말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그것들의 경계는 모호해서 내가 설 곳이 어디인지는 불분명한 듯했다. 나는 순간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어졌다. 내가 머물 곳은 오직 그것뿐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곧 들려오는 피아노 음악의 전주 부분을 듣고는 참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나의 안식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신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피아노의 선율을 흐릿하게 듣고 있던 여자가 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야, 아무것도.

왜요? 술 때문에? 이제 그만 마셔요.

그런거 아니야. 신경 꺼.

난 다시 담배를 물었다. 멀리 파도소리가 부서지며 나에게 몰려왔다. 파도소리는 아득한 것들을 함께 들고서 빚쟁이처럼 나를 졸라댔다.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잠을 자고 싶었다. 영원의 숲으로 가서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없기를 빌고 싶었다. 나는 술을 마셨다. 여자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음악소리에 다시 영혼을 맡긴 듯했다. 여자는 머리를 한껏 괸 채로 말했다.

근데, 음악 좋다.

나는 참담했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뿜었다. 한숨을 쉬듯. 나는 겨우 말했다.

쇼팽.

쇼팽?

쇼팽의 녹턴 C단조야.

그래요? C단조?

아저씨는 모르는게 없네, 라며 나에게 말하며, C단조, 쇼팽, 이라며 외우듯 중얼거렸다. 음악은 잔잔한 파도가 거센 풍랑이 되어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어차피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넌 상관없을거야.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넌 내가 아니니까. 의미 없는 단어 하나 따위에도 왜 이토록 무력해야 하는지도. 넌 마지막에 가서도 모를거야. 넌 나를 위해 기도나 해. 나의 마지막에 대고. 내가 해야할 일을 결정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뿐이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단어 하나에 짓이겨지는 하찮은 벌레일 뿐이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기억들에 짓밟힌 채 겨우 말했다.

다른 말로, 야상곡이라고도 해. 쇼팽의 야상곡.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967 / 242 페이지
번호
제목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