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알게 되는 것들 - 1부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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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무시하려고 했는데, 두번째 톡을 받고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H와 ‘부자행님’이라는 닉을 쓰는 사람의 대화방을 캡쳐한 이미지였는데, 아마도 그 사람이 A인듯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H에게 톡을 보냈다.
“이게 도대체 뭐야?”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서 답이 왔다.
“만나자. 만나서 다 이야기 해 줄께” 결국 한사코 만나서 이야기 해 주겠다는 그의 고집을 꺽지 못했다.

여름이 오기 시작한 주말 낮, 홍대입구에 있는 조그만 까페로 들어서자, 구석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H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디에 있든 눈에 잘 띈다.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 순진하게 웃는 모양의 눈매와 하얀피부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한때는 나 역시 그런 그에게 끌렸더랬다. 그는 나를 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인사를 건냈다.

의례적인 말들이 몇번 오고 간 후, 나는 참아왔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보내 준 이미지는 뭐야?” 그가 잠시 입을 벌린 채 주저하는 것 같더니, 내 질문을 다시 질문으로 받았다.
“너...그날 그 사람이랑 잤니?”
“그게 지금 중요해?”
“응 중요해. 사실대로 말해줘” 그는 테이블 위로 양손을 모은 채,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무일도 없었다구 말했잖아” 내 말에 H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자신의 손 끝을 바라보았다. 마치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한 모습을 연기하는 사람처럼.
“이제 오빠가 대답해. 보내준 이미지는 뭐야? 그 아저씨랑은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거야?” 내 질문에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던 H가 안타깝다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만나지 마.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걸 왜 오빠가 정해주는데? 그럼 오빠는 좋은 사람이야?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냐구?” 목소리 톤이 높아지자, H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에 한발짝 다가가는 느낌이 들면서 머리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참을 수 있는 한계선에 거의 다 갔다고 느낄 때쯤, H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 형님을 알고 지내기 시작한 건 1년 정도된거 같아. 사이트에 올린 사진을 보고 그 형님이 쪽지를 보내서 친해지게 됐지. 서로 잘 맞고 여자에 대한 취향도 비슷해서 자주 어울리게 됐어. 호형호제 하면서 말야. 나중에 알고보니 엄청 잘나가는 사람이었어. 부자집 출신에 유학도 다녀오고, 지금은 회사를 몇개나 운영하는 그런 사람말야. 우리랑은 삶의 차원이 다른 사람..” 그의 입가에 쓰디 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금전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그 형님이 선뜻 돈을 빌려준다고 하더라. 염치 없었지만 그땐 그런거 가릴 형편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그 사람한텐 큰돈이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구, 상황만 잘 풀리면 금방 갚으려고 했어. 그 형님은 괜찮다고 천천히 갚으라고 했고...사실 차용증도 쓰지 않았으니까” 여기까지 말한 H가 잠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너랑 만나게 된거야. 친하니까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네 이야길 꺼냈지. 자랑삼아 한 말이었는데 그 형님이 사진좀 보자고 하더라. 그래서 보여줬지. 그랬더니 자기도 무척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며 부러워했어. 난 우쭐해져서는 만날때마다 너랑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고, 그 형님도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듣더라구.” H가 A에게 어떤 사진을 보여줬을지, 나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을지는 안봐도 뻔했다. 어느 순간부터 잠자리에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이유가 그것이었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H는 목이 타는 듯 식어버린 커피를 벌컥 마시더니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 형님이 빌려간 돈 이야길 꺼내는거야. 당장 갚으라는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그 주제가 나오니까 나는 좀 당황했었어. 갚으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여건이 그렇게 금방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구. 그런 사정 이야길 좀 하려고 만나서 소주를 마시는데, 이 형님이 또 네 이야길 자연스럽게 꺼내더라구.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너같은 여자를 안아볼 수 있다면, 삼천만원 정도는 아깝지 않다는 말을 지나가듯이 했는데...”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삼천만원? 삼천만원??” 너무 큰소리를 냈는지 주위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우리쪽을 돌아보았다.
“오빠. 지금 오빠가 그 아저씨한테 빌린 돈이 삼천만원이고, 나랑 만나게 해 준 댓가로 그 돈을 안갚아도 된다. 이 말을 하고 싶은거야?”
“처음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 솔직히 내가 막 살긴 하지만 그건 아니잖아. 워낙 큰돈이니까 혹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황당하고 놀라웠다. 맥이 탁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미쳤으면 잠깐의 재미때문에 삼천만원을 쓸 수 있을까? 삼만원, 삼십만원도 아닌 삼천만원.

궁핍하고 제대로 된 무엇도 하지 못하는 내가 뜻하지 않게 삼천만원을 H에게 선물한 꼴이 되다니. 어쩌면 그라도 이득을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너와 관계도 좀 소원해지고, 그 형님의 요구는 갈수록 집요해지고...그런 상황이 되니까 술한잔 하고 나도 모르게 너한테 그런 이야길 던졌던 건데, 네가 바로 좋다고 할 줄은 몰랐어” 책임이라는 공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는데, 그 모습을 보고 H가 물었다.
“재밌니? 넌 이 상황이?”
“그럼 슬퍼해야 해?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뭔데? 결국 오빠는 내덕에 큰돈 벌었고, 그 사람은 원을 풀었고, 그럼 다 행복한거 아냐?”
“그 사람이랑 섹스를 한건 맞지?” 다시 또 그 질문. H의 아둔함과 미성숙함에 치가 떨렸다. 그게 그에게 무슨 차이를 주는 걸까?
“너를 많이 맘에 들어하는 것 같더라. 또 만나고 싶은데 네가 연락을 주지 않는다면서...그 형님은 우릴 애인사이로 생각해. 그래서 나한테 자꾸 연락도 오구....너를 자기랑 지속적으로 만나게만 해 준다면...”
“해 주면?” H의 눈빛이 흔들렸다.
“평생 먹고 사는데 지장없이 해 주겠다구..너도 마찬가지구”

지속적인 만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라. 돈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나는 A가 갑자기 신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돈이 차고 넘치면 아무 상관없는 타인의 삶을 이렇게 쥐락펴락 할 수 있는걸까? 가지지 못한 내가, 가녀린 갈대처럼 흔들리는 H가, 우리가 너무나 불쌍했다.
“아깐 그 아저씨 만나지 말라며?”
“아니...난..네 마음을 알고 싶어. 그날 모텔밖에 서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넌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내가 그렇게 도망치듯이 나와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 많이 좋아해. 너만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마음과 같다면 당장 그 형님과 관계 끊어버리고 너랑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 진짜야” 테이블 위로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축축한 땀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말을 잘 이해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의 말은 100% 이해되고 정리되었다. 남주긴 아까우니, 나랑 진지하게 사귈래? 아니면 그 아저씨 만나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팔자 한번 바꿔볼래? 두가지 떡을 놓고서 고민했을 H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오빠 핸드폰 줘봐”
“내꺼? 왜?” 그가 화들짝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오빠 말이 맞는지 마지막 확인 정도는 해야 하잖아. 그 사람과 대화내용 보여줘” H는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패턴을 풀고 대화창을 열어 나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부자행님’과의 대화창은 길고도 길었다. 대충 본 바로는 H의 고해성사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그리고 그날의 A와 이곳의 A는 완전 다른 사람같다는 점은 확실했다. 대화의 어떤 부분들은 온통 나에 대한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대화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참혹한 심정이라고 해야할까? 핸드폰을 건네자 H는 지금 내 심정이 어떤지, 어떤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오늘 나 만난다구 말했어?”
“아니..왜?”
“지금 나랑 함께 있다구 톡 보내봐”
“응?”
“그렇게 보내. 주말 저녁인데 술한잔 할꺼라구”
“온다구 하면 어떻해?”
“오라구 해” 잠시동안 알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H가 결심한 듯 핸드폰 키보드를 눌러댔다. 몇번의 톡이 오고 간 후, H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크게 한 숨을 쉬었다.

“온데?”
“응. 자리잡으면 알려달라네... 근데 어떻게 할 생각인데?”
“글쎄...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가야지. 안그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찡끗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석양 속에서 H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하게 일그러져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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