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CLUB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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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만나는 지현 씨는 천상 처녀의 모습이었다. 과연 이 여자는 뭐기에 만날 때마다 이미지가 변하는가 싶은 생각에 한참을 뜯어보았다.
“왜요? 오늘따라 지승 씨 되게 이상하네요.”
그녀는 내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가지런히 드러나는 그녀의 치아와 선명하고 또렷한 눈동자를 보며 나는 어떻게든 되바라진 썅년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지난 밤 칫솔을 구멍에 넣고 한숨 쉬던 그녀는 없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집어내자면, 지난번 만났을 때 보다 눈두덩이와 눈꼬리가 진정된 느낌이었다. 더욱 뜯어보니 이마도 조금 도톰해진 것이 그 며칠사이에 산소탱크에서 숨만 쉬다 나온 듯 보였다. 설마하니 그 며칠 동안 드라마틱하게 살이 빠졌을 리는 없었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기한 변화였다.
어쩌면 그녀의 옷차림이 이미지를 변화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짧은 기장의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결코 들춰보고 싶은 가벼움이 아니었다. 면 소재의 원피스에는 허리 라인을 잡아 주는 연갈색 가죽 벨트가 걸려있었다. 매우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여성미였다.
하지만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 셋은 나의 마지막 휴가의 첫날, 또 다시 건대 입구에서 만났다. 사실 이곳에서 만남을 가진 것은 우리집에서 가까운 것도 있지만, 근처에 있는 테크노마트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아침도 거른 채 휴가 신고를 하고 부대를 나와,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곧장 테크노마트로 달려가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쓸 데 없는 욕심인데, 나는 군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소망 같은 것이 있었다. 전역하면 가장 최신 기종의 휴대전화기를 사겠다는 것. 내가 일시불로 구입한 전화기는 팬텍에서 나온 폴더폰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320만 화소의 카메라를 내장하고 있는 모델이었다.
강 중위는 내 전화기를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카메라 기능이 만족스러웠는지 지현 씨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하지만 지현 씨는 손을 뻗어 카메라를 막고서는 “절대! 절대 안 돼!”라며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 중위가 나에게 말했다.
“너, 기회 좀 봐서 지현이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
“지현 씨 말씀이십니까?”
“응, 사실은 지현이가 사진 찍는 걸 엄청 싫어하거든.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이 찍은 적 없어서, 니가 다른 거 하는 척 하면서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거 좀 찍어주라.”
설마하니 정말로 한 번도 사진을 안 찍었냐는 말에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라면 체인점에서 인스턴트 라면과 주먹밥을 먹는 것으로 이른 저녁 끼니를 해결했다. 인스턴트 라면이라고는 하지만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는, 직접 면과 스프를 생산하는 체인이었다. 라면은 된장맛과 몹시 매운맛, 그렇게 두 가지밖에 없었는데, 다섯 테이블 남짓 되는 그 작은 가게의 모든 손님들이 매운맛을 먹고 있었다. 우리 역시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매운맛을 주문했다. 라면은 몹시 훌륭했다. 냉방이 잘된 작은 가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라면을 먹었지만, 입안이 얼얼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분명 면발을 호로록 거릴 때마다 ‘맵다, 몹시 맵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술이라든가 혀, 입안의 피부조직이 느끼는 얼얼함은 거의 없었다. 가게 밖으로 줄을 서있는 대기 손님이 없었다면 우린 한 그릇을 추가 주문하여 나눠 먹었을 것이다.
한 여름이라 해가 길었다. 우린 ‘blue"라는 근사한 바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강 중위의 진급과 표창을 축하하기로 했다. 바는 간판 그대로 푸른색으로 조명으로 사이버틱한 인테리어를 강조한 곳이었다.
“오늘은 내 축하연이니까 무엇이든 마음껏 주문하라고. 어차피 계산은 아버지가 하실 테지만.”
강 중위는 표창처럼 빳빳한 크레디트 카드를 꺼내 보이며 선전포고하였다. 지현 씨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오빠 멋져!”라며 그의 팔에 매달리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보면 정말 멋진 여자 같은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맛 좋은 위스키는 처음이었다. 첫맛은 진한 향과 쓰릴 정도의 달달함이 혀끝에서 톡 퍼지더니 목을 넘길 무렵에는 탄산이 적당히 빠진 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부담스럽지 않은 청량함이 목구멍에 남았다.
나는 중간에 웨이터에게 우리 셋의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하며 전화기를 넘겼다. 하지만 지현 씨는 끝끝내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어두운 조명이니 얼굴이 잘 안 나올 것이다, 오늘 지현 씨 상당히 예쁘게 하고 나왔으니 사진을 남기자, 라고 꼬드겨봤지만 소용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앨범 찍은 게 마지막이었어요. 대학교 졸업앨범도 안 찍었다고요, 난.”
그녀는 그렇게 웃으며 셔터를 피했다.
역시나 강 중위는 언더락 세잔에서부터 조금씩 발개지기 시작하더니, 다섯 잔째부터는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며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번 같은 불상사만은 막고 싶어 그의 잔을 채우면서 콜라도 비슷한 비율로 섞어주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며 지현 씨는 싱긋 웃었다.
강 중위가 자리를 비웠을 때 지현 씨가 나에게 물었다.
“또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사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얼굴에 붓기가 좀 있었어요. 몸이 안 좋았거든요. 지금은 붓기가 빠져서 좀 달라 보일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어디 아팠냐고 묻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제대로 못 쉬니까 가끔씩 그렇게 붓는다고 말했다.
“회사 일이 만만찮은가 봐요?”
“아무래도 그래요.”
우린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우린 처음부터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있었다. 첫맛의 달달함과 뒷맛의 청량함을 모두 느낀 후에는 과일 안주를 이쑤시개로 찍어 오물거리며 위장벽을 달랬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가족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에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당진에 있는 모 제철소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그 보수가 꽤나 괜찮다고, 동생이 기특하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면서 동생이 스스로 세웠다는 계획을 들려줬는데, 2년 정도 돈을 모았다가 영장이 나오면 부사관으로 4년 복무하고, 전역 후에는 제철소에서 모든 돈과 부사관으로 모은 돈을 합하여 대학에 진학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6년이 지난 후에는 화폐의 가치가 물가상승률을 못 따라잡을 테니 좋은 계획이 아닌 거 같다고 말해주었고, 그리고 농담조로 2년도 토 나오는데 4년은 정말 끔찍할 거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가?”라고 갸우뚱 거렸다. 그런 모습이 강 중위에겐 귀엽게 보였는지, 그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던 손은 그녀의 목덜미로 내려가 거기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노골적으로 지현 씨의 목덜미를 터치하는 그의 손과, 그녀를 바라보는 강 중위의 풀린 눈을 보며 지난밤의 민망한(사실 더러운) 기억이 다시 상기되기 시작했다. 짐짓 자리를 피해 억지로 화장실에 다녀오니 두 사람은 키스하고 있었다. 술 마시면 흐트러지는 강 중위의 모습은 내가 아는 그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나는 그렇게 눈치 없는 ‘예비’ 예비역이 아니었다. 술이 1/3정도 남았을 때 ‘이 정도면 지현 씨 혼자서도 충분히 마시겠거니’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 중위는 나를 붙잡으려 들었지만 나는 지난번의 그런 상황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지현 씨가 악수를 청했다. 이례적이었다.
“왠지 지승 씨는 말이죠,” 그녀가 말했다. “다음에 또 만날 거 같아요. 어디선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적당히 달아오른 뺨의 열기를 손등으로 달래면서 어떻게든 두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래, 누구나 저마다의 성적 취향이 있는 거고 그걸 존중해줘야지, 중위님이 정말 발기부전이라도 그걸로 그의 남성성을 판단할 수 없는 거지, 라고.
나는 폴더를 열고 지현 씨 몰래 찍은 두 사람의 사진 몇 장을 계속해서 돌려보았다. 라면 가게에서 두 사람이 라면을 먹는 사진 서너 장과 조명이 어둡고 푸른 바에서 찍은 두세 장.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로딩이 길었다. 모자이크 된 듯한 화면이 2초 정도 뜨다가 선명한 화면으로 변환되었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너무도 예쁘게 잘 어울리는 스물일곱 스물다섯 커플이었다.
지난밤의 일 때문에 괜히 지현 씨를 썅년으로 매도한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몇 번이고 두 사람의 사진을 넘겨 보다 보니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전한 사진으로 변환되기 전의 2초-그 2초 동안 모자이크 된 듯 보이는 그 장면에서 지현 씨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굴곡진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지현 씨 몰래 찍은 사진임에도 그 2초 동안의 그녀는 마치 나를 아래에서 위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고, 그 2초 동안 그녀의 미소는 지난밤 나를 향해 누운 채 쪼개던 그 것이었다.
나는 식겁했다.
물론 그 2초가 지난 후 완전한 화면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녀는, 오늘 내가 본, 그리고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느꼈던 순수한 처녀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지금 생각하니 그 얼굴로 다시 돌아와 있다는 게 더 무섭다)
그리고 왜 그랬을까? 그 순간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영화관을 나오며 했던 말이 교실 앞문으로 들어와 교실 뒷문으로 휘익 하고 빠져나간 ‘귀신바람’처럼 떠올랐다.
“사람은 절대 안 바뀌어요.”
그녀가 그때 그 말을 했을 때, 나와 강 중위는 어떤 반응을 보였었는데....... 그때 우리가 뭐라 반응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휴가의 마지막 밤, 나는 먼저 군대에 다녀온 친구 녀석 둘과 술자리를 가졌다. 복귀가 신경 쓰여 술을 가렸던 나와는 다르게, 두 녀석 모두 흥건하게 취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다보니- 옆 테이블의 여성들과 합석을 하였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짝이 지어졌다. 하지만 나란히 술집에서 나온 것은 나와 파트너뿐이었다.
그녀와 나는 맨정신이었다. 하지만 섹스를 시작했을 땐 우리 모두 이성을 침대 밑으로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은 못난 편이었지만 바디라인은 훌륭했다. 씻지도 않은 그녀의 알몸을 베어 물면서 감탄하자 그녀는 열심히 운동하고 가꿔왔다고 자랑했다. 정말 대학생 맞냐는 말에 그녀는 그냥 웃으며 넘겼다. 아마도 그녀는 나 보다 두세 살 연상 같았다.
하지만 섹스에 알맹이가 없었다, 피스톤 운동은 동작이 컸지만 농밀한 맛이 없었고, 그녀의 신음은 컸지만 깊은 맛은 없었다. 콘돔이 중간에 말라 다시 하나 뜯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원나잇이었다.
한 번의 사정 후 그녀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나로서는 다시 한 번 그녀 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자는 여자를 깨울 수는 없었다. 나는 체념한 채 욕조에 들어가 물을 받으며 맥주를 하나 땄다. 맥주를 반 정도 마셨을까, 알몸의 그녀가 말없이 욕조에 들어왔다. 먹다 남은 맥주캔을 건네자 그녀는 그 미지근한 맥주를 달다는 듯 마셔넘겼다.
가슴이 예쁘다고 다시 칭찬하자 그녀는 내 턱선이 예쁘다고 칭찬해주었다. 어쩌다 보니 그녀는 나에게 빽허그 자세로 안겼고, 나는 그녀의 가슴을 만지며 그녀의 목덜미와 뺨에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키스를 남겼다.
우린 이후 두 번의 섹스를 더 나눴는데, 마지막 섹스가 끝난 후 “항문으로 하는 사람도 있을까?”라고 그녀에게 물으니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더러워.”라고 짧게 답했다.
새벽녘 함께 손잡고 모텔에서 나온 후 그녀는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 나는 아직 군인이라 연락처가 없다고 거짓을 흘렸다. 그녀는 제대가 얼마나 남았냐고, 편지할 테니 주소 알려 달라고 물었지만, 나는 전역이 1년 넘게 남았다고 둘러대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녀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한 번 거짓말을 하니 다시 보기 미안했다.
인연이 되면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냐고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아마도 우린 그러지 못할 거 같다고 말해주었다.
8. 강 중위의 실종 혹은 탈영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에서 자유낙하에 대한 실험을 하였다. 무게가 다른 두 개의 공을 피사의 사탑에서 떨어뜨려 어느 쪽이 먼저 지상에 도달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린다면 무거운 물체가 먼저 지상에 도달할 거라는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깨는, 매우 간단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이었다. 손바닥 위에 테니스공을 올려놓은 채 자이로드롭을 하면, 낙하하는 ‘나’와 추락하는 공이 매우 자연스럽게 지상에 함께 착지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하지만 과연 한 인간이 추락하여 밑바닥에 박히는 데에도 이 법칙이 유효할까?
나는 강 중위가 한 순간 자기인생을 말아먹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인간들의 추락속도는 가늠할 수 없는 거라고. 특히나 강 중위처럼 이미 오른 계단도 대단하지만 앞으로 오를 계단도 어마어마한 젊은이의 추락은 더욱 그렇다고.
마지막 3박4일의 휴가에서 복귀한 날은 화요일이었다. 나는 그저 부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건네줄 선물을 쇼핑백에 담아 들고 복귀했다가, 전투화 끈 풀 사이도 없이 그 다음날 전역신고를 하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나는 일부러 일찍 복귀했다. 규정은 8시까지 복귀였으나, 나는 이례적으로 4시에 복귀하여 부지런히 후임들에게 전할 마지막 선물을 돌리고 있었다. 수입담배와 남성잡지, 보급품이 채울 수 없는 편의용품을 후임들 입맛에 맞게 나눠주면서 우린 환담을 나눴다.
그런데 강 중위가 보이지 않았다.
“근데 소대장님 안 보이신다?”
“아, 그게, 오늘 결근이시네.......”
결근이라고? 월요일 월차를 쓰고 화요일부터 출근했어야 할 양반이.
“왜? 아프대?”
나와 강 중위의 각별한 관계를 아는 후임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게 말이야, 형....... 소대장 님 영내이탈이라던데.......”
안 좋은 방향으로 feel이 왔다.
나는 윤 중사에게도 물어봤고, 행정계원에게도 물어봤다.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월요일 8시까지 영내복귀를 안 했는데, 일단 사정이 있나 싶어 연대로 영내이탈 신고하는 걸 미뤘다고. 하지만 출근시간이 지나서도 연락이 안 닿기에 어쩔 수 없이 헌병대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강 중위가 대위 진급까지 한 달, 대통령 표창 수여까지 2주를 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내 애가 탔다.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게 언제인지 생각해봤다. "blue"를 나와 집에 돌아와 그대로 잠들었고, 이른 새벽 목이 타 잠에서 깬 김에 그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던 게 생각났다. 6시도 되지 않은 퍼런 새벽이었는데 그에게 즉각 답문이 왔다.
우리 계속 재밌었는데 왜 먼저 갔냐, 다음에는 끝까지 같이 놀자.
그게 마지막이었다. 생각해보니 부대 복귀 날 아침 -원나잇 녀와 헤어진 후- ‘부탁했던 지현 씨 사진, 현상해서 가지고 들어간다’라고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점호 전, 나는 중대장의 호출을 받고 그에게 내가 아는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지난 토요일 그와 서울에서 만나 건대에서 술을 마시다 먼저 일어났다, 다음날 새벽 문자를 하나 주고받은 게 끝이다, 나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 라고. 술이 과했나? 여자랑 관계있는 것 같나?라는 중대장의 질문에는 술은 그다지 과하지 않았고 여자와는 관계없을 거 같다고 거짓을 둘러댔다. 나중에 그가 돌아오더라도 그의 죄를 가볍게 하고 싶어서였다.
결국 내 전역신고 때도 그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나의 소대장인 강 중위가 아닌, 옆 소대의 윤 중사에게 대신 전역신고를 하게 되었다.
“신, 고, 합니다. 병장 김지승은 2006년 8월 23일부터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 고, 합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전역신고를 했지만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강 중위가 걱정됐다.
위문소를 나오면서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김얼벌을 불렀다. 그리고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강 중위에게 주려 했던 사진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거 니가 가지고 있다가 중위님 오면 드려라.”
그는 사진을 받아 들자마자 내 허락도 없이 꺼내보기 시작했다.
“이거 소대장님 아니십니까? 여친인가.......”
허벌쭉 웃으며 사진을 보던 녀석은 “어?!”라고 정색하더니 “이 여자분 소대장님 여친 맞습니까?”라고 황망히 물어왔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녀석은 사진을 자신의 코앞까지 가져가며 다시금 사진을 꼼꼼히 살펴봤다.
설마하니 아는 사람인가 싶어 “왜?”라고 묻자 녀석은 역시나 “아는 사람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답을 재촉하자 녀석은 한 발 물러서는 태도로 “아닌가....... 닮은 거 같기도 하고 맞는 거 같기도 하고.......”라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내가 아는 얼굴인 거 같긴 한데 이미지가 좀 변해서.......”라며 사진에서 눈을 못 뗐다.
나는 알고 싶었다.
네가 아는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람이냐, 그 사람의 이름은 무어냐, 라고 물으니 녀석이 답했다.
“예전 오락실에서 일할 때 봤던 여자랑 닮은 거 같은데.......”
오락실? 그 매춘이 성행한다는?
전역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네가 안다는 그 여자의 이름이 뭐냐고 다그치듯 묻자 녀석은 “아, 몰라. 그냥 오다가다 얼굴만 봐서....... 그냥 닮은 사람입니다. 다시 보니 아니네, 아니야. 닮았는데 느낌이랑 이미지가 살짝살짝 다릅니다.”라며 사진을 자신의 건빵 주머니에 넣으려 들었다.
녀석에게 사진을 맡기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내가 직접 전해주는 게 나을 거 같다고 그 사진을 다시 받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TMO(군 수송수단) 안에서 유독 그녀의 얼굴이 깨끗이 나온 한 장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이미 나와 김얼벌의 지문이 어지러이 묻어 있던 지현 씨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면발을 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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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CLUB] 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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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오늘따라 지승 씨 되게 이상하네요.”
그녀는 내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가지런히 드러나는 그녀의 치아와 선명하고 또렷한 눈동자를 보며 나는 어떻게든 되바라진 썅년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지난 밤 칫솔을 구멍에 넣고 한숨 쉬던 그녀는 없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집어내자면, 지난번 만났을 때 보다 눈두덩이와 눈꼬리가 진정된 느낌이었다. 더욱 뜯어보니 이마도 조금 도톰해진 것이 그 며칠사이에 산소탱크에서 숨만 쉬다 나온 듯 보였다. 설마하니 그 며칠 동안 드라마틱하게 살이 빠졌을 리는 없었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기한 변화였다.
어쩌면 그녀의 옷차림이 이미지를 변화시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짧은 기장의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결코 들춰보고 싶은 가벼움이 아니었다. 면 소재의 원피스에는 허리 라인을 잡아 주는 연갈색 가죽 벨트가 걸려있었다. 매우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여성미였다.
하지만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 셋은 나의 마지막 휴가의 첫날, 또 다시 건대 입구에서 만났다. 사실 이곳에서 만남을 가진 것은 우리집에서 가까운 것도 있지만, 근처에 있는 테크노마트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아침도 거른 채 휴가 신고를 하고 부대를 나와,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곧장 테크노마트로 달려가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쓸 데 없는 욕심인데, 나는 군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소망 같은 것이 있었다. 전역하면 가장 최신 기종의 휴대전화기를 사겠다는 것. 내가 일시불로 구입한 전화기는 팬텍에서 나온 폴더폰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320만 화소의 카메라를 내장하고 있는 모델이었다.
강 중위는 내 전화기를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카메라 기능이 만족스러웠는지 지현 씨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하지만 지현 씨는 손을 뻗어 카메라를 막고서는 “절대! 절대 안 돼!”라며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 중위가 나에게 말했다.
“너, 기회 좀 봐서 지현이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
“지현 씨 말씀이십니까?”
“응, 사실은 지현이가 사진 찍는 걸 엄청 싫어하거든.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이 찍은 적 없어서, 니가 다른 거 하는 척 하면서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거 좀 찍어주라.”
설마하니 정말로 한 번도 사진을 안 찍었냐는 말에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라면 체인점에서 인스턴트 라면과 주먹밥을 먹는 것으로 이른 저녁 끼니를 해결했다. 인스턴트 라면이라고는 하지만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는, 직접 면과 스프를 생산하는 체인이었다. 라면은 된장맛과 몹시 매운맛, 그렇게 두 가지밖에 없었는데, 다섯 테이블 남짓 되는 그 작은 가게의 모든 손님들이 매운맛을 먹고 있었다. 우리 역시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매운맛을 주문했다. 라면은 몹시 훌륭했다. 냉방이 잘된 작은 가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라면을 먹었지만, 입안이 얼얼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분명 면발을 호로록 거릴 때마다 ‘맵다, 몹시 맵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술이라든가 혀, 입안의 피부조직이 느끼는 얼얼함은 거의 없었다. 가게 밖으로 줄을 서있는 대기 손님이 없었다면 우린 한 그릇을 추가 주문하여 나눠 먹었을 것이다.
한 여름이라 해가 길었다. 우린 ‘blue"라는 근사한 바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강 중위의 진급과 표창을 축하하기로 했다. 바는 간판 그대로 푸른색으로 조명으로 사이버틱한 인테리어를 강조한 곳이었다.
“오늘은 내 축하연이니까 무엇이든 마음껏 주문하라고. 어차피 계산은 아버지가 하실 테지만.”
강 중위는 표창처럼 빳빳한 크레디트 카드를 꺼내 보이며 선전포고하였다. 지현 씨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오빠 멋져!”라며 그의 팔에 매달리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보면 정말 멋진 여자 같은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맛 좋은 위스키는 처음이었다. 첫맛은 진한 향과 쓰릴 정도의 달달함이 혀끝에서 톡 퍼지더니 목을 넘길 무렵에는 탄산이 적당히 빠진 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부담스럽지 않은 청량함이 목구멍에 남았다.
나는 중간에 웨이터에게 우리 셋의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하며 전화기를 넘겼다. 하지만 지현 씨는 끝끝내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어두운 조명이니 얼굴이 잘 안 나올 것이다, 오늘 지현 씨 상당히 예쁘게 하고 나왔으니 사진을 남기자, 라고 꼬드겨봤지만 소용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앨범 찍은 게 마지막이었어요. 대학교 졸업앨범도 안 찍었다고요, 난.”
그녀는 그렇게 웃으며 셔터를 피했다.
역시나 강 중위는 언더락 세잔에서부터 조금씩 발개지기 시작하더니, 다섯 잔째부터는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며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번 같은 불상사만은 막고 싶어 그의 잔을 채우면서 콜라도 비슷한 비율로 섞어주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며 지현 씨는 싱긋 웃었다.
강 중위가 자리를 비웠을 때 지현 씨가 나에게 물었다.
“또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사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얼굴에 붓기가 좀 있었어요. 몸이 안 좋았거든요. 지금은 붓기가 빠져서 좀 달라 보일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어디 아팠냐고 묻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제대로 못 쉬니까 가끔씩 그렇게 붓는다고 말했다.
“회사 일이 만만찮은가 봐요?”
“아무래도 그래요.”
우린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우린 처음부터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있었다. 첫맛의 달달함과 뒷맛의 청량함을 모두 느낀 후에는 과일 안주를 이쑤시개로 찍어 오물거리며 위장벽을 달랬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가족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에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당진에 있는 모 제철소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그 보수가 꽤나 괜찮다고, 동생이 기특하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면서 동생이 스스로 세웠다는 계획을 들려줬는데, 2년 정도 돈을 모았다가 영장이 나오면 부사관으로 4년 복무하고, 전역 후에는 제철소에서 모든 돈과 부사관으로 모은 돈을 합하여 대학에 진학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6년이 지난 후에는 화폐의 가치가 물가상승률을 못 따라잡을 테니 좋은 계획이 아닌 거 같다고 말해주었고, 그리고 농담조로 2년도 토 나오는데 4년은 정말 끔찍할 거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가?”라고 갸우뚱 거렸다. 그런 모습이 강 중위에겐 귀엽게 보였는지, 그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던 손은 그녀의 목덜미로 내려가 거기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노골적으로 지현 씨의 목덜미를 터치하는 그의 손과, 그녀를 바라보는 강 중위의 풀린 눈을 보며 지난밤의 민망한(사실 더러운) 기억이 다시 상기되기 시작했다. 짐짓 자리를 피해 억지로 화장실에 다녀오니 두 사람은 키스하고 있었다. 술 마시면 흐트러지는 강 중위의 모습은 내가 아는 그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나는 그렇게 눈치 없는 ‘예비’ 예비역이 아니었다. 술이 1/3정도 남았을 때 ‘이 정도면 지현 씨 혼자서도 충분히 마시겠거니’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 중위는 나를 붙잡으려 들었지만 나는 지난번의 그런 상황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지현 씨가 악수를 청했다. 이례적이었다.
“왠지 지승 씨는 말이죠,” 그녀가 말했다. “다음에 또 만날 거 같아요. 어디선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적당히 달아오른 뺨의 열기를 손등으로 달래면서 어떻게든 두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래, 누구나 저마다의 성적 취향이 있는 거고 그걸 존중해줘야지, 중위님이 정말 발기부전이라도 그걸로 그의 남성성을 판단할 수 없는 거지, 라고.
나는 폴더를 열고 지현 씨 몰래 찍은 두 사람의 사진 몇 장을 계속해서 돌려보았다. 라면 가게에서 두 사람이 라면을 먹는 사진 서너 장과 조명이 어둡고 푸른 바에서 찍은 두세 장.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로딩이 길었다. 모자이크 된 듯한 화면이 2초 정도 뜨다가 선명한 화면으로 변환되었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너무도 예쁘게 잘 어울리는 스물일곱 스물다섯 커플이었다.
지난밤의 일 때문에 괜히 지현 씨를 썅년으로 매도한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몇 번이고 두 사람의 사진을 넘겨 보다 보니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전한 사진으로 변환되기 전의 2초-그 2초 동안 모자이크 된 듯 보이는 그 장면에서 지현 씨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굴곡진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지현 씨 몰래 찍은 사진임에도 그 2초 동안의 그녀는 마치 나를 아래에서 위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고, 그 2초 동안 그녀의 미소는 지난밤 나를 향해 누운 채 쪼개던 그 것이었다.
나는 식겁했다.
물론 그 2초가 지난 후 완전한 화면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녀는, 오늘 내가 본, 그리고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느꼈던 순수한 처녀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지금 생각하니 그 얼굴로 다시 돌아와 있다는 게 더 무섭다)
그리고 왜 그랬을까? 그 순간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영화관을 나오며 했던 말이 교실 앞문으로 들어와 교실 뒷문으로 휘익 하고 빠져나간 ‘귀신바람’처럼 떠올랐다.
“사람은 절대 안 바뀌어요.”
그녀가 그때 그 말을 했을 때, 나와 강 중위는 어떤 반응을 보였었는데....... 그때 우리가 뭐라 반응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휴가의 마지막 밤, 나는 먼저 군대에 다녀온 친구 녀석 둘과 술자리를 가졌다. 복귀가 신경 쓰여 술을 가렸던 나와는 다르게, 두 녀석 모두 흥건하게 취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다보니- 옆 테이블의 여성들과 합석을 하였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짝이 지어졌다. 하지만 나란히 술집에서 나온 것은 나와 파트너뿐이었다.
그녀와 나는 맨정신이었다. 하지만 섹스를 시작했을 땐 우리 모두 이성을 침대 밑으로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은 못난 편이었지만 바디라인은 훌륭했다. 씻지도 않은 그녀의 알몸을 베어 물면서 감탄하자 그녀는 열심히 운동하고 가꿔왔다고 자랑했다. 정말 대학생 맞냐는 말에 그녀는 그냥 웃으며 넘겼다. 아마도 그녀는 나 보다 두세 살 연상 같았다.
하지만 섹스에 알맹이가 없었다, 피스톤 운동은 동작이 컸지만 농밀한 맛이 없었고, 그녀의 신음은 컸지만 깊은 맛은 없었다. 콘돔이 중간에 말라 다시 하나 뜯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원나잇이었다.
한 번의 사정 후 그녀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나로서는 다시 한 번 그녀 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자는 여자를 깨울 수는 없었다. 나는 체념한 채 욕조에 들어가 물을 받으며 맥주를 하나 땄다. 맥주를 반 정도 마셨을까, 알몸의 그녀가 말없이 욕조에 들어왔다. 먹다 남은 맥주캔을 건네자 그녀는 그 미지근한 맥주를 달다는 듯 마셔넘겼다.
가슴이 예쁘다고 다시 칭찬하자 그녀는 내 턱선이 예쁘다고 칭찬해주었다. 어쩌다 보니 그녀는 나에게 빽허그 자세로 안겼고, 나는 그녀의 가슴을 만지며 그녀의 목덜미와 뺨에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키스를 남겼다.
우린 이후 두 번의 섹스를 더 나눴는데, 마지막 섹스가 끝난 후 “항문으로 하는 사람도 있을까?”라고 그녀에게 물으니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더러워.”라고 짧게 답했다.
새벽녘 함께 손잡고 모텔에서 나온 후 그녀는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 나는 아직 군인이라 연락처가 없다고 거짓을 흘렸다. 그녀는 제대가 얼마나 남았냐고, 편지할 테니 주소 알려 달라고 물었지만, 나는 전역이 1년 넘게 남았다고 둘러대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녀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한 번 거짓말을 하니 다시 보기 미안했다.
인연이 되면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냐고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아마도 우린 그러지 못할 거 같다고 말해주었다.
8. 강 중위의 실종 혹은 탈영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에서 자유낙하에 대한 실험을 하였다. 무게가 다른 두 개의 공을 피사의 사탑에서 떨어뜨려 어느 쪽이 먼저 지상에 도달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린다면 무거운 물체가 먼저 지상에 도달할 거라는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깨는, 매우 간단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이었다. 손바닥 위에 테니스공을 올려놓은 채 자이로드롭을 하면, 낙하하는 ‘나’와 추락하는 공이 매우 자연스럽게 지상에 함께 착지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하지만 과연 한 인간이 추락하여 밑바닥에 박히는 데에도 이 법칙이 유효할까?
나는 강 중위가 한 순간 자기인생을 말아먹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인간들의 추락속도는 가늠할 수 없는 거라고. 특히나 강 중위처럼 이미 오른 계단도 대단하지만 앞으로 오를 계단도 어마어마한 젊은이의 추락은 더욱 그렇다고.
마지막 3박4일의 휴가에서 복귀한 날은 화요일이었다. 나는 그저 부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건네줄 선물을 쇼핑백에 담아 들고 복귀했다가, 전투화 끈 풀 사이도 없이 그 다음날 전역신고를 하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나는 일부러 일찍 복귀했다. 규정은 8시까지 복귀였으나, 나는 이례적으로 4시에 복귀하여 부지런히 후임들에게 전할 마지막 선물을 돌리고 있었다. 수입담배와 남성잡지, 보급품이 채울 수 없는 편의용품을 후임들 입맛에 맞게 나눠주면서 우린 환담을 나눴다.
그런데 강 중위가 보이지 않았다.
“근데 소대장님 안 보이신다?”
“아, 그게, 오늘 결근이시네.......”
결근이라고? 월요일 월차를 쓰고 화요일부터 출근했어야 할 양반이.
“왜? 아프대?”
나와 강 중위의 각별한 관계를 아는 후임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게 말이야, 형....... 소대장 님 영내이탈이라던데.......”
안 좋은 방향으로 feel이 왔다.
나는 윤 중사에게도 물어봤고, 행정계원에게도 물어봤다.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월요일 8시까지 영내복귀를 안 했는데, 일단 사정이 있나 싶어 연대로 영내이탈 신고하는 걸 미뤘다고. 하지만 출근시간이 지나서도 연락이 안 닿기에 어쩔 수 없이 헌병대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강 중위가 대위 진급까지 한 달, 대통령 표창 수여까지 2주를 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내 애가 탔다.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게 언제인지 생각해봤다. "blue"를 나와 집에 돌아와 그대로 잠들었고, 이른 새벽 목이 타 잠에서 깬 김에 그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던 게 생각났다. 6시도 되지 않은 퍼런 새벽이었는데 그에게 즉각 답문이 왔다.
우리 계속 재밌었는데 왜 먼저 갔냐, 다음에는 끝까지 같이 놀자.
그게 마지막이었다. 생각해보니 부대 복귀 날 아침 -원나잇 녀와 헤어진 후- ‘부탁했던 지현 씨 사진, 현상해서 가지고 들어간다’라고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점호 전, 나는 중대장의 호출을 받고 그에게 내가 아는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지난 토요일 그와 서울에서 만나 건대에서 술을 마시다 먼저 일어났다, 다음날 새벽 문자를 하나 주고받은 게 끝이다, 나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 라고. 술이 과했나? 여자랑 관계있는 것 같나?라는 중대장의 질문에는 술은 그다지 과하지 않았고 여자와는 관계없을 거 같다고 거짓을 둘러댔다. 나중에 그가 돌아오더라도 그의 죄를 가볍게 하고 싶어서였다.
결국 내 전역신고 때도 그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나의 소대장인 강 중위가 아닌, 옆 소대의 윤 중사에게 대신 전역신고를 하게 되었다.
“신, 고, 합니다. 병장 김지승은 2006년 8월 23일부터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 고, 합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전역신고를 했지만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강 중위가 걱정됐다.
위문소를 나오면서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김얼벌을 불렀다. 그리고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강 중위에게 주려 했던 사진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거 니가 가지고 있다가 중위님 오면 드려라.”
그는 사진을 받아 들자마자 내 허락도 없이 꺼내보기 시작했다.
“이거 소대장님 아니십니까? 여친인가.......”
허벌쭉 웃으며 사진을 보던 녀석은 “어?!”라고 정색하더니 “이 여자분 소대장님 여친 맞습니까?”라고 황망히 물어왔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녀석은 사진을 자신의 코앞까지 가져가며 다시금 사진을 꼼꼼히 살펴봤다.
설마하니 아는 사람인가 싶어 “왜?”라고 묻자 녀석은 역시나 “아는 사람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답을 재촉하자 녀석은 한 발 물러서는 태도로 “아닌가....... 닮은 거 같기도 하고 맞는 거 같기도 하고.......”라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내가 아는 얼굴인 거 같긴 한데 이미지가 좀 변해서.......”라며 사진에서 눈을 못 뗐다.
나는 알고 싶었다.
네가 아는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람이냐, 그 사람의 이름은 무어냐, 라고 물으니 녀석이 답했다.
“예전 오락실에서 일할 때 봤던 여자랑 닮은 거 같은데.......”
오락실? 그 매춘이 성행한다는?
전역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네가 안다는 그 여자의 이름이 뭐냐고 다그치듯 묻자 녀석은 “아, 몰라. 그냥 오다가다 얼굴만 봐서....... 그냥 닮은 사람입니다. 다시 보니 아니네, 아니야. 닮았는데 느낌이랑 이미지가 살짝살짝 다릅니다.”라며 사진을 자신의 건빵 주머니에 넣으려 들었다.
녀석에게 사진을 맡기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내가 직접 전해주는 게 나을 거 같다고 그 사진을 다시 받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TMO(군 수송수단) 안에서 유독 그녀의 얼굴이 깨끗이 나온 한 장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이미 나와 김얼벌의 지문이 어지러이 묻어 있던 지현 씨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면발을 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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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CLUB] 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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