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5부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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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여인들 - 5부 3장
이박삼일 동안 연수원을 들썩거리게 했던 학생들은 아침을 먹고 바로 돌아갔다. 관광버스 십여 대가 정신없이 들락거리며 학생들을 싣고 나갔다. 사무실에서 창 밖으로 운동장 쪽을 내다보며 알 없는 안경을 쓴 여선생을 찾아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아침에 입었던 옷차림은커녕 입었던 옷 색깔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전날밤 입었던 운동복 차림과 그 빨갛던 입술밖에...
마지막 버스가 연수원 진입로를 돌아나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건물 현관 앞까지 나와 있었다. 교육관들은 문 밖에 모여 담배피우며 웃고 떠들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다시 들어와 벤치 한켠에 앉았다. 아침에 나와 마주치기 전까지 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그 벤치...
생각에 빠질 틈도 없이, 여자 교육관들이 담배연기를 피해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 교육관들 사이에는 서팀장 애인 정아씨도 끼어 있었다. 그 수련회는 주말 목, 금, 토요일에 진행되었고, 금요일은 이따금 서팀장의 애인 정아씨가 오는 요일이었다. 그날도 정아씨가 왔던 날이었다.
정아씨는 이미 여자 교육관들과 언니동생하며 지낼 정도로 친해진 사이였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지, 그 아가씨들은 서로 툭탁거리며 깔깔대고 웃었다. 젊은 여인들의 밝은 모습은 언제 봐도 싫지 않았다. 내 맘에 드는 여자가 없어서 문제지... 여자 교육관들 중에 좀 귀여운 친구도 있었지만 그때는 전혀 끌리는 느낌이 없었다. 어떤 여자를 봐도 그랬다.
학생들이 사용했던 생활관을 정리하기 위해 교육관들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정아씨는 벤치로 다가와 내 반대쪽 끝에 앉았다. 다리를 꼬아 뻗고 기지개 켜듯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착 달라붙는 스키니진을 입은 다리가 늘씬했다. 갑자기 정아씨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 과장님, 어제 야구 보셨어요?
- 네?... 야구요?
- 네, 아깝게 졌죠?. 아우, 정말...
어느 팀 얘기일까... 막판에 턱밑까지 쫓아갔지만 한점차로 진 한화 얘기일까, 9회말 노아웃 주자 3루 끝내기 찬스를 어이없이 놓치고 연장에서 진 엘지 얘기일까... 서울에 산다고 했으니 엘지 팬인가?
- 엘지 말인가요?
- 네. 다 이긴 게임이었잖아요. 그죠?
- 뭐, 올 시즌은 엘지 기대 안 해요.
- 그래도 응원해 줘야죠.
- 응원할 맛이 나야 말이죠.
준우승한 감독을 갑자기 경질한 이후, 엘지는 몇 년 연속으로 죽을 쑤고 있었다. 김재현을 방출하듯 FA로 내보낸 데다가, 십년 전에 전성기를 일구었던 이광환 감독도 한 시즌만에 맥없이 사퇴하고, 또 새 감독이 들어선 후에는 유지현을 은퇴시키고 이상훈까지 내치면서, 팀은 구심점 없이 헤매고 있었다. 투수나 타자나 다들 힘이 없어 보였고, 말 그대로 영 아니었다.
게다가, 수민이와 헤어진 후로는 야구도 별로 재미없었다. 재미있는 게 없던 때였다. 교육관들과 새로운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술을 마시는 게 그나마 재미있는 일이었다.
- 어머, 과장님도 엘지 팬이시구나?
- 네? 아뇨... 그냥 다 좋아해요.
- 그럼, 어젯밤에는 좋으셨겠네요?
- 네?
- 엘지가 졌는데도, 과장님은 좋으셨겠다구요.
좋았겠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찔리는 게 있었다. 말도 못 하고 눈만 꿈벅꿈벅거리며 정아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 입도 헤벌린 채 다물지 못했을 거다. 아니, 야구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얘기가 그렇게 이어지는 거지? 거기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아?.... 그러나, 정아씨는 의아해하는 나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냥 앞만 바라보며 말했다.
- 아... 참 좋으셨겠다...
이 여자... 뭐지? 정말 의아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아씨는 내가 무슨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아씨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리자 서팀장이 들어오고 있었다.
- 오빠, 과장님도 엘지 팬이래.
- 아, 그랬어요? 진작 말하시지, 야구 같이 보게.
- 뭐, 그냥 보는 거야. 요즘은 재미도 없어.
- 그래두요. 같이 보면 재밌잖아요.
- 난 이제 한화나 응원할래. 아니다, 에스케이가 나으려나?
- 오호~, 그럼 이제 적군인가요?
- 오빠, 나 차 시간...
- 아, 맞다. 야, 석호야...
자리에 앉으려던 서팀장은 석호를 부르며 도로 뒤돌아 나갔고, 정아씨도 따라 나갔다.
서팀장은 차가 없었다. 차를 가진 사람은 막내 교육관 석호와 나를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한 빼빼 마른 교육관 신병진, 그리고 나... 그렇게 셋이었다. 차가 없을 때 연수원에서 시내 터미널까지 나가려면 콜택시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서팀장이 애인에게 말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 어떡하지? 석호도 오늘 집에 간대.
- 그럼... 택시 불러야 돼?
막내교육관은 터미널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쪽이었다. 터미널에 갔다가 집에 가려면 갔던 길을 다시 돌아와 반대쪽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병진이는 아침 일찍 연수원을 나갔고, 남은 건 내 차 뿐이었다. 연수원 승합차가 있지만 서팀장은 운전을 못했고 면허도 없었다. 바람도 쐴 겸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려고 일어서는데, 서팀장이 먼저 다가왔다.
- 과장님, 죄송하지만 터미널까지 한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친구가 웬일이지? 서팀장의 평소 말투 같으면 터미널 한번 데려다 주면 안 돼요? 하고 물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아주 정중하게 물어 와서 속으로 살짝 놀랐다. 정중한 말투로 말하는 사람은,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암,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은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지...
- 몇 시 차지?
- 정아야, 몇 시 차야?
서팀장은 건물 밖에 있는 정아씨를 향해 소리를 질러 물었다.
- 열한시이~
- 그거 되겠어? 바로 출발해도 좀 촉박할 거 같은데...?
- 그런가요? 정아야, 다음 차는 몇 시야?
- 열한시 오십부~운.
- 그건 뭐, 충분하겠고... 까짓 거, 한번 밟아 보자. 열한시 차 탈 수 있게...
- 고맙습니다. 과장님.
- 고맙긴... 안 그래도 바람 쐬러 어디 나갈까 했었어.
서팀장이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게 머리숙여 감사할 일인가... 평소 편하게 하던 서팀장이 웬일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원장실 문이 열리더니 부장이 서팀장을 불렀다.
- 서팀장~!
- 예?
- 원장님 기다리신다.
- 예? 아, 부장님, 오후에 하시면 안될까요? 잠깐 나가볼 일이 생겨서요.
- 오후엔 안 된다니까, 원장님 스케줄 때문에...
- 아, 씨... 아침에 갑자기 바꾸면 나보고 어쩌라고...
서팀장은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죽여 투덜거렸다. 나는 속으로만 웃었다. 이 친구, 저 좋은 일인 줄은 모르고...
교육팀, 즉 지도교육관 팀에서 제일 선배인 데다가 팀장 역할을 하고 있어서 서팀장이라고 불렀지만, 원래 교육팀장은 과장급 보직이었다. 전임 과장이 갑자기 퇴사한 이후부터, 대리 직급인 서창일 교육관이 팀장 역할을 맡아 이끌어 왔었다. 그때부터 서팀장이라고 부른 거였다.
내가 들어간 후, 원장이나 부장과 교육팀에 대해서 얘기할 때, 서팀장을 과장 직급으로 승진시키는 게 낫다고 부장과 원장에게 이따금씩 은근히 얘기를 했었다. 급여는 그대로 대리 연봉을 주더라도 직급만이라도 과장을 달아 주면 다른 교육관들에게도 서팀장의 위신이 달라 보이는 효과가 있고, 무엇보다도 서팀장 자신의 동기 부여를 위해서도 좋다고. 부장은 내가 하는 얘기를 아무 생각 없이 서팀장에게 흘렸다. 한과장이 이런 얘기 하더라... 서팀장은 그 후로는 더욱 더 나에게 친밀감을 보였다.
그리고 그 며칠 전에, 원장이 부장과 나를 불러 차를 마시면서 서팀장 승진 얘기를 꺼냈다. 부장은 서팀장에게 그 얘기를 전하면서 승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냥 원장이 팀장에게 물어볼 게 좀 있다고만 전했다. 면담 날짜를 잡을 때 서팀장이 토요일 오후가 괜찮다고 해서 그렇게 정한 건데, 하필 그 날 오후에 원장이 약속을 잡는 바람에 아침으로 당겼고, 시간 변경한 걸 아침 먹기 직전에 서팀장에게 알려준 거였으니, 서팀장이 짜증낼 만도 했다. 이유를 알고 나면 짜증낼 일이 아니지만...
- 오빠, 다음 차 탈까?
- 다음 차...? 음~... 정아야, 오늘만 그냥 혼자 가. 응? 과장님, 부탁 좀 드릴게요.
- 정아씨만?
- 어떡해요? 원장님이 지금밖에 안 된다는데...
나는 짐짓 곤란한 척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옳다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딱 맞게 생기는 걸까... 정아씨와 단 둘이 가게 되면 아까 한 얘기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물어보고 싶었다. 진짜 궁금했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 정아씨, 그래도 괜찮겠어요?
- 네? 저야 데려다 주시면 고맙죠.
- 정아야, 그럼 가, 응?
- 응...
- 야, 서팀장!
- 예, 지금 갑니다.
- 잠깐만 기다리실래요? 차 열쇠 가지고 올게요.
- 네...
부장이 짜증스럽게 불렀고, 서팀장은 원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차 열쇠는 사무실에 두고 다녔었다. 열쇠를 챙기고, 의자에 걸쳐 두었던 가벼운 점퍼를 집어들고 나섰다. 건물 현관을 나오는데, 정아씨가 기다리다가 따라왔다. 정아씨는 성큼성큼 걷는 나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불쑥 말을 걸었다.
- 과장님.
- 네?
- 우리, 팔짱끼고 갈까요?
- 네...?
- 팔짱 끼고 가자구요.
- ......
뜻밖의 제안에 깜짝 놀란 내가 당황해서 말을 못하고 있는데, 그녀는 자기 혼자 가슴 앞에서 팔짱을 끼고 가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 자, 과장님도 끼세요. 깔깔깔...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데, 그녀는 혼자 휘적휘적 걸어갔다. 뒤에서 본 그녀는 늘씬하게 빠진, 예쁜 몸매였다. 스키니진으로 타이트하게 감싼 둥근 힙이 걸을 때마다 탄력있게 흔들렸다. 애써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주차장에는 내 차밖에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차에 거의 다가갈 때쯤 리모콘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삑삑~... 그러나 그녀는 먼저 타지 않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렸다.
- 타시죠.
- 네.
정아씨는 차 옆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운전석 문을 열자 그제서야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기본적인 예의를 아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두 번째 여자였다. 이 차에 타는 두 번째 여자... 수민이 생각이 났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진저리치듯 고개를 떨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수민이 생각이 나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수민이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 왜 그러세요?
- 네? 하하, 아니요. 그냥 좀...
- 운전... 괜찮으시겠어요?
- 네?
- 술 다 깨셨어요?
- 어젠 술 안 마셨어요. 술 때문에 그런 거 아니예요.
- 그럼, 술도 안 드셨는데 어제 그러셨던 거예요?
시동을 걸고 키에서 떼던 손을 멈춘 채, 조수석의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여자, 진짜 뭐지...? 당돌하다고 간단히 말하기엔 너무 당돌했다. 여자는 빤히 바라보면서 생글거리며 물었다.
- 밟는다고 안 하셨나요? 오십분 차 태워주시게요?
- ......
말하는 그녀의 빨간 입술 사이에 치아가 하얗게 빛났다. 치약광고가 생각났다. TV 화면 속에서 그녀의 입술이 사과를 와삭 베어무는 상상을 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앞만 보고 운전했다. 그 고갯길을 내려갈 때, 뒤에 차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온다 해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추월하는 경우는 아예 없었으니까. 그 길을 다닐 때는 진짜 앞만 보고 운전했다. 습관적으로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는 거 말고는... 구불구불한 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고개 넘는 꼬부랑 길은 경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갈 땐 엔진브레이크를 써야 하고 올라갈 때에도 저단으로만 다녀야 한다.
- 이 길, 운전하기 힘드시겠어요.
- 운전... 하세요?
- 집 근처에서만요.
- 여기도 뭐, 그냥 다닐 만해요.
- 고마워요. 일부러...
- 아니예요. 저도 바람 쐬러 나오려고 했었어요.
- 어젠...
- 네?
- 좋으셨어요?
의례적인 인사를 하다가, 여자가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하긴 했었는데 오히려 여자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 여자, 왜지? 의도가 뭘까? 한번 힐끗 쳐다보고 다시 앞만 보고 운전했다.
- ......
- 호호호... 놀라셨나 봐요?
- 네, 좀...
- 창일오빠 말로는 애인이랑 헤어진 다음부터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신다던데...
- 서팀장 이거, 별 얘길 다 했구만?
- 그런데 어제는 왜죠? 예뻐서?...는 아닌 것 같고...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뭐,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내 자지를 물고 빨던 입술 윤곽과 짙었던 속눈썹이 생각났다. 어제 그 여자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게 생겼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 여자를 예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예뻤다. 충분히 그렇게... 아니, 그 여자와는 급이 다르게 예뻤다. 둥글고 큰 눈매도, 오똑한 콧날도, 붉은 입술도 예뻤다. 어디 성형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뻤다.
그러나 어젯밤 여자의 미모와 상관 없이,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다. 여자가 그냥 들어왔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이 여자는 믿을까? 나 같아도 쉽게 믿기 힘든 얘기였다. 산책할 때부터 따라왔다고 말할까? 오랫동안 사정을 못 했는데, 내가 사정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해 볼까? 이 여자가 그런 말을 믿을까...? ㅋㅋㅋ 내가 생각하고도 우스웠다.
- 훗~
- 왜 웃으시죠? 그렇게 좋았나요?
- ......
허... 또 말문이 막혀 입만 헤벌리고 여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얘, 진짜 뭐지? 날 놀리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얘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가 있지? 그런데 내가 불편할 건 또 뭐가 있을까? 있기는 있나...? 이 여자랑 어떤 얘기를 해도 내가 불편할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좀 민망할 수는 있어도, 다시 볼 사람도 아니고...
- 어떻게... 아셨죠?
- 그 여자가 과장님 방에서 나오는 걸 봤거든요.
여자는 넘겨짚는 게 아니었다. 봤다. 이 여자가 봤다. 이 여자가 서팀장을 만나러 연수원에 올 때마다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아는 건 아닐 테니 대충 넘어가 볼까?
- 뭐, 별 일 없었어요.
- 별 일 없었는데 그 여자는 왜 그리 눈치 보면서 몰래 나갔을까요?
- ......
- 혹시 도둑이었나요? 없어진 건 없구요?
- 흠... 직접 보셨군요?
- 네, 우연히... 화장실에 가다가.
- 후우~ 거짓말로 모면할 방법은 없겠군...
- 섹스... 하신 건가요?
직설적이다. 그저 우직하기만 한 서팀장이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집요하게 묻는 건 관심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찔러 보기로 했다. 얘기도 해 보지 않고 절절매며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고...
- 그럼.... 키스는 하고 섹스는 안 했다?
- 질문이 그게 아니었잖아?
- .....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갑자기 반말로 대답해서일까... 여자를 한번 힐끗 보고는 다시 앞만 바라봤다. 내리막길의 굽이를 돌 때마다 여자의 몸이 좌우로 기울었다. 안전띠가 느슨한가? 점검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그렇군요. 그럼, 섹스는 했는데 사정은 안 했다, 맞죠?
- 사정 안 하려면 뭐하러 하니?
- 그러면 뭐죠?
- 반대야.
- 섹스는 안 하고 사정만? 그게 어떻게... 혹시 손으로?
- 손보다 조금만 더 가 봐.
- 아하~. 근데 오럴섹스도 섹스 아닌가요?
- 글쎄...? 그래서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라고...
-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죠?
- 언제는 무슨... 그저께 온 학굔데...
- 학교? 수련회 온 학교... 선생?
- 자기 말로는 국어선생이래.
- 그럼... 그저께부터?
- 아니, 어제 처음.
- 전에도 그런 적 있었나요?
- 한번도.
- 진짜?
- 안 믿어도, 뭐...
- ......
- 쯧~, 어쩔 수 없고.
어젯밤 그 여자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투가 되었다. 억양 없이 딱딱 끊는... 내가 언제부터 이런 말투를 썼지? 내 말투에 내가 어색했다. 마주보고 말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제 그 여자도, 오늘 이 여자도, 나는 마주보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완전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등받이에 옆으로 눕듯이 기댔다. 안전벨트가 느슨하게 늘어졌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여자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했다.
- 바르게 앉아. 위험해.
- 어떻게 꼬셨어요?
- 안 꼬셨어. 바르게 앉으라니까.
- 안 꼬셨다구요? 그런데, 어떻게...?
- ......
- 네? 어떻게 과장님 방으로 끌어들였죠?
- ......
여자는 내 말은 듣지도 않는 듯 무시하고 자기 얘기만 계속했다. 여자를 힐끗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안전띠를 한번 당겨 보았다. 운전석의 안전띠는 이상 없었다. 그걸 보고 여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고개는 내 쪽으로 향한 채였다.
- 알았어요. 자요. 됐죠?
- 응. 착하네.
- 자, 그럼 말해 봐요. 어떻게 끌어들였어요?
- 그 여자가 그냥 내 방에 찾아왔을 뿐이야.
- 진짜? 허~, 대단하시네...
- 안 믿어도, 뭐...
- 어쩔 수 없고.
여자가 내 말을 자르고, 내 말투를 흉내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 후후후... 잘 하는데? 똑같다, 야.
- 헤헷~
- ......
- 별로 예쁘지도 않았었는데... 혹시,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나요?
- 글쎄...? 어떻게 생겼었지?
- 오럴까지 한 여자를 기억도 못 해요?
- 입술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 와우~
- ......
- 오럴은 좋았었나요?
- 뭐... 그리 나쁘진 않았어.
- 헤어진 애인보다 좋았었나요?
이 여자, 진짜 왜 이러는 거지? 또 수민이 생각이 났고, 또 진저리를 쳤다. 그 순간, 내가 그러는 이유를 여자가 알아챘다.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 헤어진 애인 생각날 때 그러는 거죠? 맞죠?
- ......
- 잊지 못하나 보죠?
- 잊고 싶은데 잘 안 될 뿐이야.
- 흥~, 거짓말.
- 거짓말? 훗~
- 잊으려고 노력해 봤어요?
- 이르...
이런 씨발년이... 거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꾸욱 눌러 침과 함께 삼켰다. 웃어 넘기려 했는데, 여자는 거기서 한 발 더 치고 들어왔다. 힐난하는 듯한 여자의 말투가 내 인내의 선을 넘었다. 그날, 그 여자는 좀 함부로 들이댔다. 그날 처음 대화하는 사이에 할 수 있는 말일까?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지? 여자는 초면인데도 사정 봐 주지 않고 마구 치고 들어왔다.
말하는 건 싸가지 없었지만, 그렇게 대드는 여자는 대들기 전보다 더 예뻐 보였다. 예쁜 년은 싸가지 좀 없어도 된다. 또, 그런 년일수록 사랑은 몰라도 섹스하는 맛은 난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섹시하다는 생각보다 짜증이 먼저 났다. 심하게. 아주 심하게...
- 하~ 참... 내가 왜 너한테 그걸 해명해야 되지?
- 말 돌리는 건, 내 말이 맞다는 뜻이죠?
- 하~, 제멋대로네...
- 아니면 말해 봐요.
- ......
- ......
-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니야.
- 합리화하는군요?
- 합리화? 허~
- 합리화죠. 잊기 싫으면서 잊지 못한다고...
- 넌...
- ......
- 잊고 싶으면 맘대로 잊을 수 있어?
- 네?
- 나랑 일년쯤 사귀다가 갑자기 한 순간에 다 잊어 볼래?
- ......
- 일년동안 매일 만나서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매일 키스하고, 거의 매일 섹스하다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날 잊어 봐. 가능해?
- ......
- 언젠가는 잊겠지, 물론... 그치만 노력한다고 더 빨리 잊을 수 있는 건 아니야.
- 그렇군요...
- ......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다가 여자가 고분고분 대답하는 바람에 더 화낼 수가 없었다. 여자는 갑자기 달라졌다. 게다가, 여자는 목소리도 낮추면서 수그러들었다. 또 왜지? 마구 치받다가 갑자기 수그러든 이유가 뭐지? 왜지? 화낸 내가 민망하잖아...?
- ......
- 너한테 화난 건 아니야....
- 이해해요.
- 이해? 훗~
아유, 이걸 확 그냥...? 수그러든 것 같았던 여자가 또 사람을 흥분시켰다. 이해한다고? 뭘 이해해? 헤어진 걸? 헤어진 이유를? 헤어지고 아파하는 걸? 내가 갑자기 소리지른 걸? 네가 도대체 뭘 이해해?... 이런 생각으로 살짝 열 받으려는데, 여자가 갑자기 또 치고 들어왔다.
- 나는요?
- 뭐라고?
- 나요. 나.
- 너? 너, 뭐?
- 난 어떠냐구요?
- 어떠냐니, 뭐가?
- 기억...할 만한가요?
- 말했잖아.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고.
- 어떻게 하면 기억할 건데요?
어떻게 해야 내가 기억할 거냐고? 내가 왜 얘를 기억해야 하지? 왜 갑자기 얘기가 이렇게 됐지? 여자를 몰아붙여 잠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싶었는데, 어느 새 다시 여자의 얘기에 끌려가고 있었다. 무엇이든 붙잡고, 그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조용히 좀 해, 운전하는데...
- 지금까지 잘만 했으면서...
- 그건...
여자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릴 정도로 높아졌다. 머릿속에 뭔가가 확 치밀었지만 여자를 한번 돌아보았을 뿐, 말문이 막혔다. 여자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때까지는 대화하면서도 운전 잘 했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나한테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지? 도저히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도로 한 옆에 천천히 차를 세웠다. 다행히도 마침 내리막길이 끝나고 쭉 뻗은 평탄한 도로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주차브레이크를 걸고 돌아본 조수석엔 해맑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예쁜 여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새삼 놀랄 정도로 예뻤다. 이 여자가 이렇게 예뻤었나?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동료의 애인이라는 생각에, 이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았던 걸까?
그 동그란 눈이 너무 예쁘고 맑아서 할 말을 잃고 그냥 쳐다 보기만 하는데, 여자는 나를 그냥 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었으니까. 여자는 금새 평정을 되찾고 예쁜 목소리로 애교스럽게 말했다.
- 네? 어떻게 하면 나 기억할 거예요?
- ......
대답을 못하고 여자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자기를 기억할 거냐는 여자... 왜 그랬을까? 어떻게 하면 기억할 거냐고 묻는 여자가 한층 더 예뻐 보였다. 날 유혹하는 걸까? 여자가 날 유혹하는 거라면 넘어가고 싶었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게 지는 거라면 일부러라도 지고 싶을 정도로 예쁜 여자였다. 유혹에 넘어가 주는 거나, 유혹당해 넘어가 버리는 거나...
- 이름만 기억하면 돼? 정아라 그랬나?
- 이름이 아니라 날, 나라는 사람을 기억해야죠.
- 내가 왜 널 기억해야 되지?
- 그건...
- 어떻게 해야 내가 널 기억할까? 널 기억할 이유를 한번 만들어 봐. 내 전 애인처럼.
- ......
여자가 정색을 했다. 생글생글 웃던 여자의 입꼬리와 눈초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자는 입을 꼭 다물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원아웃.
- 아주 오래오래 남을 기억을 만들어 줘 봐. 할 수 있지?
- 지금요?
- 그럼, 언제 하게?
- ......
여자는 입을 꼭 다물지 못하고 살짝 벌린 채, 또 대답하지 못했다.. 투아웃.
- 내가 어떻게 하면 날 기억할 거죠?
- 네 재주껏 해야지.
-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 그 여자는 한번도 그런 거 물어본 적 없어.
- ......
여자가 한번 반발했지만 소용없었고,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헤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 큰 눈이 진짜 예뻤지만 미모와 상관 없이... 쓰리아웃, 공수 교대.
일분도 안 되어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다. 여자의 말은 분명히 도발이었지만 당황한 건 오히려 도발한 쪽이었다. 여자가 나에게 일부러 접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날 유혹하는 건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했다. 나는 여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내 전 애인을 강조했다. 그 전에도 섹스에 대해서 강조하며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생각이 그쪽으로 쏠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가 예뻤으니까. 어린애처럼 귀여우면서도 섹시하고 도도한, 섹스하고 싶게 만드는 여자였으니까. 한번 안고 싶었으니까.
빤히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뒤로 하고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구불구불한 비탈길은 다 내려왔고, 여자를 데려다 줘야 할 터미널은 온 만큼만 더 가면 되었다. 온 거리가 아니라 온 시간만큼. 시각은 열한 시를 이미 지나고 있었고, 열한 시 차를 타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이 필요했지만 열한시 오십분 차를 타려면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
이박삼일 동안 연수원을 들썩거리게 했던 학생들은 아침을 먹고 바로 돌아갔다. 관광버스 십여 대가 정신없이 들락거리며 학생들을 싣고 나갔다. 사무실에서 창 밖으로 운동장 쪽을 내다보며 알 없는 안경을 쓴 여선생을 찾아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아침에 입었던 옷차림은커녕 입었던 옷 색깔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전날밤 입었던 운동복 차림과 그 빨갛던 입술밖에...
마지막 버스가 연수원 진입로를 돌아나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건물 현관 앞까지 나와 있었다. 교육관들은 문 밖에 모여 담배피우며 웃고 떠들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다시 들어와 벤치 한켠에 앉았다. 아침에 나와 마주치기 전까지 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그 벤치...
생각에 빠질 틈도 없이, 여자 교육관들이 담배연기를 피해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 교육관들 사이에는 서팀장 애인 정아씨도 끼어 있었다. 그 수련회는 주말 목, 금, 토요일에 진행되었고, 금요일은 이따금 서팀장의 애인 정아씨가 오는 요일이었다. 그날도 정아씨가 왔던 날이었다.
정아씨는 이미 여자 교육관들과 언니동생하며 지낼 정도로 친해진 사이였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지, 그 아가씨들은 서로 툭탁거리며 깔깔대고 웃었다. 젊은 여인들의 밝은 모습은 언제 봐도 싫지 않았다. 내 맘에 드는 여자가 없어서 문제지... 여자 교육관들 중에 좀 귀여운 친구도 있었지만 그때는 전혀 끌리는 느낌이 없었다. 어떤 여자를 봐도 그랬다.
학생들이 사용했던 생활관을 정리하기 위해 교육관들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정아씨는 벤치로 다가와 내 반대쪽 끝에 앉았다. 다리를 꼬아 뻗고 기지개 켜듯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착 달라붙는 스키니진을 입은 다리가 늘씬했다. 갑자기 정아씨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 과장님, 어제 야구 보셨어요?
- 네?... 야구요?
- 네, 아깝게 졌죠?. 아우, 정말...
어느 팀 얘기일까... 막판에 턱밑까지 쫓아갔지만 한점차로 진 한화 얘기일까, 9회말 노아웃 주자 3루 끝내기 찬스를 어이없이 놓치고 연장에서 진 엘지 얘기일까... 서울에 산다고 했으니 엘지 팬인가?
- 엘지 말인가요?
- 네. 다 이긴 게임이었잖아요. 그죠?
- 뭐, 올 시즌은 엘지 기대 안 해요.
- 그래도 응원해 줘야죠.
- 응원할 맛이 나야 말이죠.
준우승한 감독을 갑자기 경질한 이후, 엘지는 몇 년 연속으로 죽을 쑤고 있었다. 김재현을 방출하듯 FA로 내보낸 데다가, 십년 전에 전성기를 일구었던 이광환 감독도 한 시즌만에 맥없이 사퇴하고, 또 새 감독이 들어선 후에는 유지현을 은퇴시키고 이상훈까지 내치면서, 팀은 구심점 없이 헤매고 있었다. 투수나 타자나 다들 힘이 없어 보였고, 말 그대로 영 아니었다.
게다가, 수민이와 헤어진 후로는 야구도 별로 재미없었다. 재미있는 게 없던 때였다. 교육관들과 새로운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술을 마시는 게 그나마 재미있는 일이었다.
- 어머, 과장님도 엘지 팬이시구나?
- 네? 아뇨... 그냥 다 좋아해요.
- 그럼, 어젯밤에는 좋으셨겠네요?
- 네?
- 엘지가 졌는데도, 과장님은 좋으셨겠다구요.
좋았겠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찔리는 게 있었다. 말도 못 하고 눈만 꿈벅꿈벅거리며 정아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 입도 헤벌린 채 다물지 못했을 거다. 아니, 야구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얘기가 그렇게 이어지는 거지? 거기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아?.... 그러나, 정아씨는 의아해하는 나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냥 앞만 바라보며 말했다.
- 아... 참 좋으셨겠다...
이 여자... 뭐지? 정말 의아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아씨는 내가 무슨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아씨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리자 서팀장이 들어오고 있었다.
- 오빠, 과장님도 엘지 팬이래.
- 아, 그랬어요? 진작 말하시지, 야구 같이 보게.
- 뭐, 그냥 보는 거야. 요즘은 재미도 없어.
- 그래두요. 같이 보면 재밌잖아요.
- 난 이제 한화나 응원할래. 아니다, 에스케이가 나으려나?
- 오호~, 그럼 이제 적군인가요?
- 오빠, 나 차 시간...
- 아, 맞다. 야, 석호야...
자리에 앉으려던 서팀장은 석호를 부르며 도로 뒤돌아 나갔고, 정아씨도 따라 나갔다.
서팀장은 차가 없었다. 차를 가진 사람은 막내 교육관 석호와 나를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한 빼빼 마른 교육관 신병진, 그리고 나... 그렇게 셋이었다. 차가 없을 때 연수원에서 시내 터미널까지 나가려면 콜택시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서팀장이 애인에게 말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 어떡하지? 석호도 오늘 집에 간대.
- 그럼... 택시 불러야 돼?
막내교육관은 터미널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쪽이었다. 터미널에 갔다가 집에 가려면 갔던 길을 다시 돌아와 반대쪽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병진이는 아침 일찍 연수원을 나갔고, 남은 건 내 차 뿐이었다. 연수원 승합차가 있지만 서팀장은 운전을 못했고 면허도 없었다. 바람도 쐴 겸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려고 일어서는데, 서팀장이 먼저 다가왔다.
- 과장님, 죄송하지만 터미널까지 한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친구가 웬일이지? 서팀장의 평소 말투 같으면 터미널 한번 데려다 주면 안 돼요? 하고 물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아주 정중하게 물어 와서 속으로 살짝 놀랐다. 정중한 말투로 말하는 사람은,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암,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은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지...
- 몇 시 차지?
- 정아야, 몇 시 차야?
서팀장은 건물 밖에 있는 정아씨를 향해 소리를 질러 물었다.
- 열한시이~
- 그거 되겠어? 바로 출발해도 좀 촉박할 거 같은데...?
- 그런가요? 정아야, 다음 차는 몇 시야?
- 열한시 오십부~운.
- 그건 뭐, 충분하겠고... 까짓 거, 한번 밟아 보자. 열한시 차 탈 수 있게...
- 고맙습니다. 과장님.
- 고맙긴... 안 그래도 바람 쐬러 어디 나갈까 했었어.
서팀장이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게 머리숙여 감사할 일인가... 평소 편하게 하던 서팀장이 웬일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원장실 문이 열리더니 부장이 서팀장을 불렀다.
- 서팀장~!
- 예?
- 원장님 기다리신다.
- 예? 아, 부장님, 오후에 하시면 안될까요? 잠깐 나가볼 일이 생겨서요.
- 오후엔 안 된다니까, 원장님 스케줄 때문에...
- 아, 씨... 아침에 갑자기 바꾸면 나보고 어쩌라고...
서팀장은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죽여 투덜거렸다. 나는 속으로만 웃었다. 이 친구, 저 좋은 일인 줄은 모르고...
교육팀, 즉 지도교육관 팀에서 제일 선배인 데다가 팀장 역할을 하고 있어서 서팀장이라고 불렀지만, 원래 교육팀장은 과장급 보직이었다. 전임 과장이 갑자기 퇴사한 이후부터, 대리 직급인 서창일 교육관이 팀장 역할을 맡아 이끌어 왔었다. 그때부터 서팀장이라고 부른 거였다.
내가 들어간 후, 원장이나 부장과 교육팀에 대해서 얘기할 때, 서팀장을 과장 직급으로 승진시키는 게 낫다고 부장과 원장에게 이따금씩 은근히 얘기를 했었다. 급여는 그대로 대리 연봉을 주더라도 직급만이라도 과장을 달아 주면 다른 교육관들에게도 서팀장의 위신이 달라 보이는 효과가 있고, 무엇보다도 서팀장 자신의 동기 부여를 위해서도 좋다고. 부장은 내가 하는 얘기를 아무 생각 없이 서팀장에게 흘렸다. 한과장이 이런 얘기 하더라... 서팀장은 그 후로는 더욱 더 나에게 친밀감을 보였다.
그리고 그 며칠 전에, 원장이 부장과 나를 불러 차를 마시면서 서팀장 승진 얘기를 꺼냈다. 부장은 서팀장에게 그 얘기를 전하면서 승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냥 원장이 팀장에게 물어볼 게 좀 있다고만 전했다. 면담 날짜를 잡을 때 서팀장이 토요일 오후가 괜찮다고 해서 그렇게 정한 건데, 하필 그 날 오후에 원장이 약속을 잡는 바람에 아침으로 당겼고, 시간 변경한 걸 아침 먹기 직전에 서팀장에게 알려준 거였으니, 서팀장이 짜증낼 만도 했다. 이유를 알고 나면 짜증낼 일이 아니지만...
- 오빠, 다음 차 탈까?
- 다음 차...? 음~... 정아야, 오늘만 그냥 혼자 가. 응? 과장님, 부탁 좀 드릴게요.
- 정아씨만?
- 어떡해요? 원장님이 지금밖에 안 된다는데...
나는 짐짓 곤란한 척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옳다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딱 맞게 생기는 걸까... 정아씨와 단 둘이 가게 되면 아까 한 얘기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물어보고 싶었다. 진짜 궁금했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 정아씨, 그래도 괜찮겠어요?
- 네? 저야 데려다 주시면 고맙죠.
- 정아야, 그럼 가, 응?
- 응...
- 야, 서팀장!
- 예, 지금 갑니다.
- 잠깐만 기다리실래요? 차 열쇠 가지고 올게요.
- 네...
부장이 짜증스럽게 불렀고, 서팀장은 원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차 열쇠는 사무실에 두고 다녔었다. 열쇠를 챙기고, 의자에 걸쳐 두었던 가벼운 점퍼를 집어들고 나섰다. 건물 현관을 나오는데, 정아씨가 기다리다가 따라왔다. 정아씨는 성큼성큼 걷는 나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불쑥 말을 걸었다.
- 과장님.
- 네?
- 우리, 팔짱끼고 갈까요?
- 네...?
- 팔짱 끼고 가자구요.
- ......
뜻밖의 제안에 깜짝 놀란 내가 당황해서 말을 못하고 있는데, 그녀는 자기 혼자 가슴 앞에서 팔짱을 끼고 가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 자, 과장님도 끼세요. 깔깔깔...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데, 그녀는 혼자 휘적휘적 걸어갔다. 뒤에서 본 그녀는 늘씬하게 빠진, 예쁜 몸매였다. 스키니진으로 타이트하게 감싼 둥근 힙이 걸을 때마다 탄력있게 흔들렸다. 애써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주차장에는 내 차밖에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차에 거의 다가갈 때쯤 리모콘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삑삑~... 그러나 그녀는 먼저 타지 않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렸다.
- 타시죠.
- 네.
정아씨는 차 옆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운전석 문을 열자 그제서야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기본적인 예의를 아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두 번째 여자였다. 이 차에 타는 두 번째 여자... 수민이 생각이 났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진저리치듯 고개를 떨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수민이 생각이 나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수민이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 왜 그러세요?
- 네? 하하, 아니요. 그냥 좀...
- 운전... 괜찮으시겠어요?
- 네?
- 술 다 깨셨어요?
- 어젠 술 안 마셨어요. 술 때문에 그런 거 아니예요.
- 그럼, 술도 안 드셨는데 어제 그러셨던 거예요?
시동을 걸고 키에서 떼던 손을 멈춘 채, 조수석의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여자, 진짜 뭐지...? 당돌하다고 간단히 말하기엔 너무 당돌했다. 여자는 빤히 바라보면서 생글거리며 물었다.
- 밟는다고 안 하셨나요? 오십분 차 태워주시게요?
- ......
말하는 그녀의 빨간 입술 사이에 치아가 하얗게 빛났다. 치약광고가 생각났다. TV 화면 속에서 그녀의 입술이 사과를 와삭 베어무는 상상을 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앞만 보고 운전했다. 그 고갯길을 내려갈 때, 뒤에 차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온다 해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추월하는 경우는 아예 없었으니까. 그 길을 다닐 때는 진짜 앞만 보고 운전했다. 습관적으로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는 거 말고는... 구불구불한 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고개 넘는 꼬부랑 길은 경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갈 땐 엔진브레이크를 써야 하고 올라갈 때에도 저단으로만 다녀야 한다.
- 이 길, 운전하기 힘드시겠어요.
- 운전... 하세요?
- 집 근처에서만요.
- 여기도 뭐, 그냥 다닐 만해요.
- 고마워요. 일부러...
- 아니예요. 저도 바람 쐬러 나오려고 했었어요.
- 어젠...
- 네?
- 좋으셨어요?
의례적인 인사를 하다가, 여자가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하긴 했었는데 오히려 여자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 여자, 왜지? 의도가 뭘까? 한번 힐끗 쳐다보고 다시 앞만 보고 운전했다.
- ......
- 호호호... 놀라셨나 봐요?
- 네, 좀...
- 창일오빠 말로는 애인이랑 헤어진 다음부터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신다던데...
- 서팀장 이거, 별 얘길 다 했구만?
- 그런데 어제는 왜죠? 예뻐서?...는 아닌 것 같고...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뭐,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내 자지를 물고 빨던 입술 윤곽과 짙었던 속눈썹이 생각났다. 어제 그 여자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게 생겼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 여자를 예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예뻤다. 충분히 그렇게... 아니, 그 여자와는 급이 다르게 예뻤다. 둥글고 큰 눈매도, 오똑한 콧날도, 붉은 입술도 예뻤다. 어디 성형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뻤다.
그러나 어젯밤 여자의 미모와 상관 없이,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다. 여자가 그냥 들어왔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이 여자는 믿을까? 나 같아도 쉽게 믿기 힘든 얘기였다. 산책할 때부터 따라왔다고 말할까? 오랫동안 사정을 못 했는데, 내가 사정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해 볼까? 이 여자가 그런 말을 믿을까...? ㅋㅋㅋ 내가 생각하고도 우스웠다.
- 훗~
- 왜 웃으시죠? 그렇게 좋았나요?
- ......
허... 또 말문이 막혀 입만 헤벌리고 여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얘, 진짜 뭐지? 날 놀리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얘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가 있지? 그런데 내가 불편할 건 또 뭐가 있을까? 있기는 있나...? 이 여자랑 어떤 얘기를 해도 내가 불편할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좀 민망할 수는 있어도, 다시 볼 사람도 아니고...
- 어떻게... 아셨죠?
- 그 여자가 과장님 방에서 나오는 걸 봤거든요.
여자는 넘겨짚는 게 아니었다. 봤다. 이 여자가 봤다. 이 여자가 서팀장을 만나러 연수원에 올 때마다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아는 건 아닐 테니 대충 넘어가 볼까?
- 뭐, 별 일 없었어요.
- 별 일 없었는데 그 여자는 왜 그리 눈치 보면서 몰래 나갔을까요?
- ......
- 혹시 도둑이었나요? 없어진 건 없구요?
- 흠... 직접 보셨군요?
- 네, 우연히... 화장실에 가다가.
- 후우~ 거짓말로 모면할 방법은 없겠군...
- 섹스... 하신 건가요?
직설적이다. 그저 우직하기만 한 서팀장이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집요하게 묻는 건 관심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찔러 보기로 했다. 얘기도 해 보지 않고 절절매며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고...
- 그럼.... 키스는 하고 섹스는 안 했다?
- 질문이 그게 아니었잖아?
- .....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갑자기 반말로 대답해서일까... 여자를 한번 힐끗 보고는 다시 앞만 바라봤다. 내리막길의 굽이를 돌 때마다 여자의 몸이 좌우로 기울었다. 안전띠가 느슨한가? 점검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그렇군요. 그럼, 섹스는 했는데 사정은 안 했다, 맞죠?
- 사정 안 하려면 뭐하러 하니?
- 그러면 뭐죠?
- 반대야.
- 섹스는 안 하고 사정만? 그게 어떻게... 혹시 손으로?
- 손보다 조금만 더 가 봐.
- 아하~. 근데 오럴섹스도 섹스 아닌가요?
- 글쎄...? 그래서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라고...
-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죠?
- 언제는 무슨... 그저께 온 학굔데...
- 학교? 수련회 온 학교... 선생?
- 자기 말로는 국어선생이래.
- 그럼... 그저께부터?
- 아니, 어제 처음.
- 전에도 그런 적 있었나요?
- 한번도.
- 진짜?
- 안 믿어도, 뭐...
- ......
- 쯧~, 어쩔 수 없고.
어젯밤 그 여자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투가 되었다. 억양 없이 딱딱 끊는... 내가 언제부터 이런 말투를 썼지? 내 말투에 내가 어색했다. 마주보고 말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제 그 여자도, 오늘 이 여자도, 나는 마주보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완전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등받이에 옆으로 눕듯이 기댔다. 안전벨트가 느슨하게 늘어졌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여자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했다.
- 바르게 앉아. 위험해.
- 어떻게 꼬셨어요?
- 안 꼬셨어. 바르게 앉으라니까.
- 안 꼬셨다구요? 그런데, 어떻게...?
- ......
- 네? 어떻게 과장님 방으로 끌어들였죠?
- ......
여자는 내 말은 듣지도 않는 듯 무시하고 자기 얘기만 계속했다. 여자를 힐끗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안전띠를 한번 당겨 보았다. 운전석의 안전띠는 이상 없었다. 그걸 보고 여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고개는 내 쪽으로 향한 채였다.
- 알았어요. 자요. 됐죠?
- 응. 착하네.
- 자, 그럼 말해 봐요. 어떻게 끌어들였어요?
- 그 여자가 그냥 내 방에 찾아왔을 뿐이야.
- 진짜? 허~, 대단하시네...
- 안 믿어도, 뭐...
- 어쩔 수 없고.
여자가 내 말을 자르고, 내 말투를 흉내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 후후후... 잘 하는데? 똑같다, 야.
- 헤헷~
- ......
- 별로 예쁘지도 않았었는데... 혹시,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나요?
- 글쎄...? 어떻게 생겼었지?
- 오럴까지 한 여자를 기억도 못 해요?
- 입술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 와우~
- ......
- 오럴은 좋았었나요?
- 뭐... 그리 나쁘진 않았어.
- 헤어진 애인보다 좋았었나요?
이 여자, 진짜 왜 이러는 거지? 또 수민이 생각이 났고, 또 진저리를 쳤다. 그 순간, 내가 그러는 이유를 여자가 알아챘다.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 헤어진 애인 생각날 때 그러는 거죠? 맞죠?
- ......
- 잊지 못하나 보죠?
- 잊고 싶은데 잘 안 될 뿐이야.
- 흥~, 거짓말.
- 거짓말? 훗~
- 잊으려고 노력해 봤어요?
- 이르...
이런 씨발년이... 거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꾸욱 눌러 침과 함께 삼켰다. 웃어 넘기려 했는데, 여자는 거기서 한 발 더 치고 들어왔다. 힐난하는 듯한 여자의 말투가 내 인내의 선을 넘었다. 그날, 그 여자는 좀 함부로 들이댔다. 그날 처음 대화하는 사이에 할 수 있는 말일까?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지? 여자는 초면인데도 사정 봐 주지 않고 마구 치고 들어왔다.
말하는 건 싸가지 없었지만, 그렇게 대드는 여자는 대들기 전보다 더 예뻐 보였다. 예쁜 년은 싸가지 좀 없어도 된다. 또, 그런 년일수록 사랑은 몰라도 섹스하는 맛은 난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섹시하다는 생각보다 짜증이 먼저 났다. 심하게. 아주 심하게...
- 하~ 참... 내가 왜 너한테 그걸 해명해야 되지?
- 말 돌리는 건, 내 말이 맞다는 뜻이죠?
- 하~, 제멋대로네...
- 아니면 말해 봐요.
- ......
- ......
-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니야.
- 합리화하는군요?
- 합리화? 허~
- 합리화죠. 잊기 싫으면서 잊지 못한다고...
- 넌...
- ......
- 잊고 싶으면 맘대로 잊을 수 있어?
- 네?
- 나랑 일년쯤 사귀다가 갑자기 한 순간에 다 잊어 볼래?
- ......
- 일년동안 매일 만나서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매일 키스하고, 거의 매일 섹스하다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날 잊어 봐. 가능해?
- ......
- 언젠가는 잊겠지, 물론... 그치만 노력한다고 더 빨리 잊을 수 있는 건 아니야.
- 그렇군요...
- ......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다가 여자가 고분고분 대답하는 바람에 더 화낼 수가 없었다. 여자는 갑자기 달라졌다. 게다가, 여자는 목소리도 낮추면서 수그러들었다. 또 왜지? 마구 치받다가 갑자기 수그러든 이유가 뭐지? 왜지? 화낸 내가 민망하잖아...?
- ......
- 너한테 화난 건 아니야....
- 이해해요.
- 이해? 훗~
아유, 이걸 확 그냥...? 수그러든 것 같았던 여자가 또 사람을 흥분시켰다. 이해한다고? 뭘 이해해? 헤어진 걸? 헤어진 이유를? 헤어지고 아파하는 걸? 내가 갑자기 소리지른 걸? 네가 도대체 뭘 이해해?... 이런 생각으로 살짝 열 받으려는데, 여자가 갑자기 또 치고 들어왔다.
- 나는요?
- 뭐라고?
- 나요. 나.
- 너? 너, 뭐?
- 난 어떠냐구요?
- 어떠냐니, 뭐가?
- 기억...할 만한가요?
- 말했잖아.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고.
- 어떻게 하면 기억할 건데요?
어떻게 해야 내가 기억할 거냐고? 내가 왜 얘를 기억해야 하지? 왜 갑자기 얘기가 이렇게 됐지? 여자를 몰아붙여 잠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싶었는데, 어느 새 다시 여자의 얘기에 끌려가고 있었다. 무엇이든 붙잡고, 그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조용히 좀 해, 운전하는데...
- 지금까지 잘만 했으면서...
- 그건...
여자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릴 정도로 높아졌다. 머릿속에 뭔가가 확 치밀었지만 여자를 한번 돌아보았을 뿐, 말문이 막혔다. 여자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때까지는 대화하면서도 운전 잘 했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나한테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지? 도저히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도로 한 옆에 천천히 차를 세웠다. 다행히도 마침 내리막길이 끝나고 쭉 뻗은 평탄한 도로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주차브레이크를 걸고 돌아본 조수석엔 해맑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예쁜 여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새삼 놀랄 정도로 예뻤다. 이 여자가 이렇게 예뻤었나?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동료의 애인이라는 생각에, 이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았던 걸까?
그 동그란 눈이 너무 예쁘고 맑아서 할 말을 잃고 그냥 쳐다 보기만 하는데, 여자는 나를 그냥 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었으니까. 여자는 금새 평정을 되찾고 예쁜 목소리로 애교스럽게 말했다.
- 네? 어떻게 하면 나 기억할 거예요?
- ......
대답을 못하고 여자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자기를 기억할 거냐는 여자... 왜 그랬을까? 어떻게 하면 기억할 거냐고 묻는 여자가 한층 더 예뻐 보였다. 날 유혹하는 걸까? 여자가 날 유혹하는 거라면 넘어가고 싶었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게 지는 거라면 일부러라도 지고 싶을 정도로 예쁜 여자였다. 유혹에 넘어가 주는 거나, 유혹당해 넘어가 버리는 거나...
- 이름만 기억하면 돼? 정아라 그랬나?
- 이름이 아니라 날, 나라는 사람을 기억해야죠.
- 내가 왜 널 기억해야 되지?
- 그건...
- 어떻게 해야 내가 널 기억할까? 널 기억할 이유를 한번 만들어 봐. 내 전 애인처럼.
- ......
여자가 정색을 했다. 생글생글 웃던 여자의 입꼬리와 눈초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자는 입을 꼭 다물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원아웃.
- 아주 오래오래 남을 기억을 만들어 줘 봐. 할 수 있지?
- 지금요?
- 그럼, 언제 하게?
- ......
여자는 입을 꼭 다물지 못하고 살짝 벌린 채, 또 대답하지 못했다.. 투아웃.
- 내가 어떻게 하면 날 기억할 거죠?
- 네 재주껏 해야지.
-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 그 여자는 한번도 그런 거 물어본 적 없어.
- ......
여자가 한번 반발했지만 소용없었고,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헤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 큰 눈이 진짜 예뻤지만 미모와 상관 없이... 쓰리아웃, 공수 교대.
일분도 안 되어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다. 여자의 말은 분명히 도발이었지만 당황한 건 오히려 도발한 쪽이었다. 여자가 나에게 일부러 접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날 유혹하는 건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했다. 나는 여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내 전 애인을 강조했다. 그 전에도 섹스에 대해서 강조하며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생각이 그쪽으로 쏠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가 예뻤으니까. 어린애처럼 귀여우면서도 섹시하고 도도한, 섹스하고 싶게 만드는 여자였으니까. 한번 안고 싶었으니까.
빤히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뒤로 하고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구불구불한 비탈길은 다 내려왔고, 여자를 데려다 줘야 할 터미널은 온 만큼만 더 가면 되었다. 온 거리가 아니라 온 시간만큼. 시각은 열한 시를 이미 지나고 있었고, 열한 시 차를 타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이 필요했지만 열한시 오십분 차를 타려면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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