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5부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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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여인들 - 5부 1장




소제목을 붙이기 애매해서 그냥 5부로 하기로 합니다...

......

연수원이라기보다는 청소년 수련원이었다. 학교 단체 수련회 위주의 수련원... 그 당시 대부분의 연수원 입지가 그랬듯,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건물 한 동과 운동장이라 부르는 공터 하나... 건물과 공터 사이엔 꽤 넓은 면적을 아스팔트로 새까맣게 포장해 놓았고, 여기저기 주차장 구획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도 공사중인, 생긴 지 얼마 안 된 연수원... 그 연수원에 들어가게 된 과정은 4부를 참조하시면 된다.

평일엔 거기서 숙식하고 주말엔 외출하거나 귀가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내가 원하면 주말에도 머무를 수도 있다는 게 제일 맘에 들었고, 그게 바로 내가 그 연수원을 선택한 이유였다. 일년 내내 산 속에 있을 수 있겠다는... 둘러본 직원 숙소는 연수원 건물 맨 위층에 있었고, 숙소는 내가 쓰던 원룸만큼 넓은 데다가 새로 지은 건물이라 깔끔하고 깨끗했다. 원장 부부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것도 원장을 신뢰할 수 있는 점이라 생각했다.

연수원의 간부 직원들은 모두 일가족이었는데, 각급 학교를 대상으로 영업활동을 하고 연수원의 전반적인 업무를 관리하던 교육부장은 원장의 아들이었고, 원장 비서 겸 서무와 출납을 담당하던 총무부장은 원장 딸, 그리고 연수원의 실세인 부원장은 원장 부인이었다. 건물관리와 청소, 그리고 식당 운영을 맡은 외주업체의 대표는 원장의 아우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나 혼자 이방인인 셈이었다.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나도 ‘간부 직원’에 속한다면 말이다.

나는 당시 연수생 교육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프로그램 구성과 개발에만 관여하는, 기획과장이라는 어색한 자리를 새로 만들어서 들어갔다. 새로 만든 자리라 업무분장도 어수선했다. 사실 어수선하다기보다는 기획과장의 업무라 할 만한 게 아예 없었다. 그냥 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 네가 찾아서 일하든지 말든지... 그런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굳이 나를 데려간 건 유명 대기업 연수원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이었다. 대기업 출신이라는 배경은 내가 보기엔 쓸데없는 거였지만, 시골의 신생 연수원 원장에게는 내세울 만한 간판이었고, 연수원 홈페이지에 내 얼굴과 이력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원장과 부장은 거의 하루 종일 같이 붙어 지내면서 좀 편해졌지만 지도교육관들은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다들 같이 일한 지 꽤 된 사람들 틈에 나 혼자 끼어든 데다가, 직급도 갑자기 만들어서 들어온 일종의 낙하산이지... 부장이랑 잡담 아니면 원장실에서 차나 마시지... 지도교육관들에게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일선 군부대에 밥풀떼기 하나짜리 소위 계급장을 갓 달고 처음 부임한 소대장을 보는 사병들의 시각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십대 초중반인 교육관들과 비슷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처음엔 지도교육관들 신경 쓰지 않고 원장과 부장하고만 어울렸지만, 조직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그렇게 서먹하게 지내다가,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는 군대 간 셈 치고 귀찮은 일, 힘든 일에 앞장섰다. 청소도, 교구 정리도 교육관들과 함께 했고, 교육관들이 하는 일들을 모두 같이 했다. 뭔가 작업할 일이 있으면 내가 먼저 나섰다.

연수원에서 작업할 일은 의외로 많았다. 이런저런 레크레이션 게임을 하던 체육시간에도 상당히 많은 도구가 필요하고, 캠프파이어 때 장작을 준비해서 쌓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몸 사리지 않고, 빼지 않고 팔을 걷어붙였다. 아침마다 연수원 현관 앞에 쌓이던 낙엽을 쓸어내는 것도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내가 했다.

그렇게 사서 고생을 시작하기 직전에, 교육팀장인 서창일 대리와 둘이서만 나가서 술을 마시며 내 얘기를 대충 해 주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애인과 헤어져 힘든데 지금 추스르는 중이다... 그래서 내가 가끔 혼자 우울해 해도 업무에는 지장 없도록 하겠다... 잘 부탁한다... 고 솔직히 말했다.

- 아~, 그러셨구나.
- 이거, 개인적인 넋두리를 해서 미안합니다.
-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불편하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 하하, 아니예요. 괜찮아요.
- 그리고, 말씀 낮추세요, 과장님.
- 하하... 이런...
- 뭐, 오래는 안 갈 거예요. 애들하고 친해지실 때까지만 좀...
- 아니요. 뭐, 첨엔 좀 당황스러웠는데 이젠 괜찮아요.
- 에이, 말씀 낮추시라니까요.
- 그럼, 내일부터 그럴게요. 오늘까지만 좀 봐 주시고.
- 과장님, 술은 어떻게... 좀 하시나요?
- 술이요? 뭐, 많이는 못 하고 그냥 남들 먹는 정도..?
- 환영회 때 소주 한 병 원샷하는 거 시킬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 뭐, 내가 안 괜찮다고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 오~... 그러시면 됐습니다.

서팀장은 그리 딱딱한 친구가 아니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나하고 얘기도 잘 통했다. 그렇게 한잔 하며 터놓고 얘기한 이후로 서팀장은 마치 오래 전부터 만났던 후배처럼 살갑게 굴었다. 한달쯤 후, 환영회를 겸한 회식을 하고 나서는 교육관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술도 같이 마시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연수원에서 일한 경력은 있었지만 청소년 수련회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다른 수련원에도 견학을 가고 여기저기 물어보고 검색해 가며 공부했다. 교육관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기로 결정하고 전통문화 전수관에 강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교회에서 반주해 봤다는 교육관을 중심으로 그룹사운드 밴드를 구성했다. 후배들을 통해 학교 응원단에 부탁해서 응원 액션도 배우게 했다.

다행히도 추진하는 일마다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면서, 사람들의 신뢰도 쌓여 갔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때 비로소 폐인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연수원에서도 그냥 하루하루를 보낼 뿐,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몇 가지를 생각하고 검토하면 겨우 한 가지 추진할 수 있었고, 또 몇 가지를 추진해야 한두 가지 성과를 낼 수 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한 일을 추진하고 실행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믿고 따라 주면 더욱 일할 맛이 났다.

아,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러나 전개를 위해 필요한 배경 설명이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각설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성스럽고 경건한 얘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성(性)스럽고 경건[莖建 - 줄기 경(음경), 세울 건]한... 내가 지어낸 이 표현은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는 카피레프트다. ㅋㅋㅋ

......

연수원 지도교육관들은 전부 총각이었다. 20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다들 왕성할 나이였던 만큼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했다. 여자교육관도 몇 명 있었지만 그들에게 나는 그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직장 상사일 뿐이었다. 남자교육관들과 친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된 이후, 주말이면 남자 교육관들을 데리고 가까운 유흥가로 나가 같이 술을 먹었다. 직원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교육관들은 술을 자주 먹었고, 월급을 타면 술 먹는 회비를 모아서 그걸로 먹는다고 했다. 더치페이가 애매한 술자리에서 같이 부담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지만, 내가 데리고 나갈 때에는 내가 샀다.

- 잘 먹었습니다.
- 별 소릴... 자, 2차 가야지?
- 2차는 시원하게 생맥주 한 잔 하시죠?
- 그럴까?

대부분은 갈비집에서 소주 마시고 나면 보통 맥주를 마셨지만 이따금 발동이 걸리면 여자들 앉히고 먹는 집으로 가기도 했다. 그런 집으로 갈 때면 소위 2차라고 말하는, 오입도 시켜 주었었다. 성욕을 주체하기 힘든 이십대 초반 젊은 친구들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나중엔 술을 먹으면 이 친구들이 은근히 그 다음의 무언가를 기대하기도 했다.

여자를 찾을 때마다 항상 성매매를 한건 아니었다. 교육관들과 유흥가에서 술을 먹다 보면 모르는 여자들과도 어울리게 되었고, 아무 감정도 없이 그런 여자들과 술을 먹고 춤을 추고 놀았다. 특히 서팀장과 둘이만 나가서 술을 마실 때면 그럴 기회가 더 많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수민이의 기억에 아프고 힘들었던 탓인지 어떤 여자를 봐도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꼬리치는 여자들은 많았다. 그렇게 술을 먹으며 어울리다 보면 같이 모텔로 가기도 했다. 생리적인 욕구만으로 섹스를 했다.

그러나, 정작 섹스를 해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정을 하지 못했다. 술자리에서 여자를 옆에 끼고 만지다가 모텔로 가서 섹스를 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수민이를 생각한 것도 아니고 흥분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떤 여자와 섹스를 해도, 아무리 싸려고 애를 써도 사정이 되지 않았다. 어떤 야한 상상이나 포르노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박아대도 사정이 되지 않아 시계를 보면 두 시간 넘게 지나 있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박아대도 별로 좋은 느낌도 없었다. 너무 오래 하는 바람에 여자가 힘들어하고 아파해서 머쓱하게 그만두어야 했다. 여자의 느낌을 배려하지도 못했고, 사정이 안된다는 것에 조급해서 그저 싸려고 박아대기만 했다. 그렇게 기를 썼어도 결국 한번도 못 했지만... ㅜ.ㅜ

그 동네 유흥가에 변강쇠로 알려질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지루증 환자라고 소문이 났다. 그런 일을 서너 번 겪은 이후로는 결국, 여자와 같이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놀았던 기간은 무지 짧았다. 한달쯤... 주말에만 그랬으니 횟수로는 너댓 번밖에 되지 않았다. 유월쯤부터 수민이와 섹스하지 않았던 터라, 내가 사정하지 못한 기간은 꽤 길었다.

그리고는 여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술만 먹었는데, 한번은 같이 잘 어울려 놀던 교육관 세 명이 아침부터 들떠서 치장하고 나가더니, 저녁에 한 명만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었다. 미용학원이었나 간호학원이었나... 학원생들과 미팅을 했었다나? 그리고, 여자는 교육관들과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그 지도교육관의 숙소에서 자고는 다음날 또 같이 어울리다가 돌아갔다.

외박한 두 명은 미팅 파트너가 맘에 안 들었는지, 유흥업소에서 마시고 자고 온 거였다. 다음날 들어온 두 사람은 여자를 데리고 왔던 교육관에게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꼬치고치 캐물었고 그는 지난밤 얘기를 자랑스레 풀어놓았다. 사랑한다느니... 결혼할 거라느니...

그러나 그 여자는 몇 번 더 찾아와서 자고 가더니 소식이 끊어졌다. 그 교육관은 헤어졌다고 간단히 한 마디로 말할 뿐,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미팅에서 만난 당일날 결혼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다가 한 달도 안 되어 헤어졌다고 말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그건 사귄 게 아니라 잠깐 서로 즐긴 것에 불과했다. 원나잇이나 투나잇이나...

여자교육관들도 그런 걸 보고도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왕성한 나이에 성욕은 해소해야 하고...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보고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랑은 상관 없는 얘기였고, 남들이 누구랑 연애를 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 중에서도 여자를 가장 밝히는 건 서팀장이었다. 교육관들이 미팅 나갔을 때에도 나와 술 마시느라 같이 가지 못했던 서팀장은 무지 부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심지어는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여선생과도 은밀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언젠가 서팀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 한번은, 어떤 선생이 제 방으로 찾아왔어요.
- 방으로? 왜?
- 자는데 불쑥 들어왔어요. 나 보고 싶다고...
- 허... 진짜? 그래서 어떻게 했어?
- 제 발로 기어들어온 여잔데요, 뭐... 그냥 바로 먹었죠.
- 헐~...

뭐 대충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서팀장의 말을 들으며 그냥 헛웃음만 웃었었다. 애인도 있는 놈이 딴 여자랑... ㅋㅋㅋ 하긴, 애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교육관들 데리고 나가서 술을 먹고 2차로 오입하러 갈 때, 서팀장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었다. 애인이 있다는 건 서팀장이 말해줘서가 아니라, 서팀장 애인이 연수원에 찾아와서 알게 되었다.

내가 연수원에 들어가고 계절이 두 번쯤 바뀌었던 어느 봄날의 주말이었다. 연수 일정도 없던 주말이라서 휴게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신즌을 막 시작한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어떤 여자가 먼저 인사를 해 왔다.

-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 야구 좋아하시나 봐요?
- 네? 네...
- 저도 야구 되게 좋아하는데...

그냥 별 느낌 없이 인사를 받았는데 그녀는 자기도 야구를 좋아한다며 옆에 앉았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통성명도 없이 야구 얘기만 했다. 서팀장이 그 여자 눈치를 보는 듯하길래, 관련이 있나 생각만 했다. 이닝이 끝나고 광고가 나올 때, 분위기가 어색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연스럽게 서팀장을 부르며 일어나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저 여자분 누구지? 교육관 새로 온다는 얘긴 없었는데?
- 아, 정아요? 제 여자친구예요.
- 그랬구나... 누군가 했지, 처음 뵙는 분이라서.
- 주말이라서 놀러 왔어요.
- 야구 좋아하시나 보네?
- 팬클럽 모임에서 만났어요.
- 이야... 좋겠네? 야구 본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 아냐? 크크크...
- 저보다 더 좋아하더라구요.
- 좋겠다, 서팀장... 아, 얼른 들어가 봐. 혼자 어색하겠다...
- 네. 헤헤...

서팀장이 담배 한 대를 피우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서팀장 여자친구인 걸 알게 되었다. 얘기하다가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휴게실을 힐끗 봤더니, 서팀장과 여자친구는 둘이서 가만히 TV로 야구 중계만 보고 있었다.

주말을 연수원에서 함께 보낸 그 여자친구가 가고 난 뒤, 서팀장이 내 방으로 찾아와 얘기를 좀 했다. 그 친구는 상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민을 털어 놓았는데, 여자친구는 대학생이었고 서팀장은 고졸... 서팀장이 학력에 대해 컴플렉스가 좀 있었던 게 문제였다.

- 서로 좋아하면 됐지, 뭘, 그런 걸 신경 써?
-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 대학? 그거 별 거 아니야..
- 과장님은 대학 나왔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 에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근데, 왜? 정아씨가 그거 가지고 뭐라 그래?
- 뭐라 그러지는 않는데 그래도...
- 서팀장이 정아씨 많이 좋아하는구만?
- 헤헤... 좋죠.
- 그래도, 서울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잖아. 정아씨도 서팀장 좋으니까 그런 거지.
- 그런 것 같기는 한데요...
- 괜찮아... 애인 학력 같은 거 신경쓰면 여기까지 찾아오겠어?
- 그런가요?
- 당연하지.

내가 뭐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그저, 그런 거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오는 걸 보니 두 사람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아서 부럽다... 뭐, 그런 얘기를 해 주고 마무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내가 보기엔 서팀장은 이미 자기 직장,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까짓 학력... 자기와 여자친구의 학력을 비교하게 되면서 자기가 가진 장점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렸었다. 서팀장이 훨씬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은근히 말해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기가 못나 보이는 것... 자격지심엔 약이 없다. 자격지심을 없애려면 자신감을 키우는 수밖에. 자신이 뭔가 스스로 자랑스러운 걸 이뤄 내면 자격지심은 금방 없어진다. 서팀장도 여자친구에게 자랑할 만한 뭔가를 성취해서 자기가 먼저 만족하면 한방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자신감이라는 건 남이 어떻게 심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라면 몰라도, 이십대 후반의 성인인 데다가 한 팀을 이끄는 팀장인데.

정아씨는 그후로도 가끔 서팀장을 찾아 그 산골까지 놀러 왔고, 올 때마다 자고 갔다. 그런 밤이면 헐떡이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싫어, 그냥 자... 뭐,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날도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하지, 교육관들 다 자러 갈 때까지 기다리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속으로만 생각했었다. 뭐,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고, 복도 제일 안쪽의 내 방으로 가려면 서팀장 방 앞을 지나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들은 소리였다. 연수원은 새로 지은 건물이었지만 방음이 잘 되는 편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수련활동을 하는 동안, 교사들은 먹고, 마시고, 논다. 낮에는 버스로 인근 관광지 유람을 하고, 밤에는 연수원 지하에 마련된 노래방에서 마시고 논다. 관광비용도 연수원에서 대고, 음식이나 술도 다 연수원에서 제공한다. 그 돈은 당연히 수련회비에 포함되어 있고, 결국 모든 비용은 학생들의 학부모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다.

교장에게 건네는 뒷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돈을 사양하는 교장도 없고, 먹고 마시는 스케줄 대신 교사들에게도 교육적인 과정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는 학교도 없다는 게 부장의 얘기였다. 교장이나 교사들이 어느 교원단체 소속이든 똑같고, 입만 열면 교육개혁을 부르짖는 교사들도 자신들과 관련된 구습 구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교사들 중에서 그런 관행(?)을 싫어하는 교사도 있긴 있지만 용기내어 건의하는 교사도 없고, 반대해 봐야 혼자 미운 털만 박히지, 달라지는 건 없다고 했다. 교사들이 없을 때 연수원에서 학생들 인사사고만 나지 않는다면, 연수원 측에서도 교사들이 수련회 프로그램을 일일이 지켜보는 것보다는 관광을 하든 술을 먹든 그 자리에 없는 게 편했다.

물론, 오래 전 얘기다. 예전의 관행이었을 뿐, 요즘도 그렇게 학생 단체 수련회를 유치하는 연수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오해하지 마시길.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교장, 그런 교사가 요즘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재미없는 연수원 얘기를 길게 늘어놓고, 뜬금없이 학생 수련회에 참가한 학교의 교사들 얘기를 꺼내는 건, 학생들 인솔해 온 교사들 중 한 명으로 인해서 내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성스럽고 경건한 사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봄날 언젠가, 두 개 학교에서 동시에 연수원에 입소했던 수련회가 있었다. 2박 3일 수련회 기간 중 둘쨋날 마지막 과정인 캠프파이어를 마치면서 그 날 일과는 끝났다. 캠프파이어를 보면서 처음엔 참 신기하게 생각했었던 게 있다. 애들 울리기... 교육관들은 촛불의식에서 부모님 얘기를 꺼내 학생들을 울리곤 했다. 그래야 분위기 축 처져서 일찍 잔다나? 어쨌든 학생들을 일찌감치 취침시킨 교육관들은 불타는 금요일 밤의 술자리를 시작했다.

나도 그런 주말 술자리에 가끔씩은 참석했지만, 그날은 교육관들 마시라고 맥주를 한 박스 사주고, 혼자 나와서 또 상념에 빠져 건물 뒤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따라오며 불렀다. 처음엔 나를 부르는지도 몰랐었다.

- 선생님...
- ......
- 같이 좀 가요. 학~, 하유, 숨차... 하아~...
- 누구... 시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헉헉거리며 급히 따라온 사람은 웬 여자였다.

- 어느 학교 선생님이시죠?
- 아, 어떤고등학교도 학교도 와 있었죠? 저는 무슨중학교예요.
- 네에... 그러시군요.

그녀는 자신을 국어교사라고 소개했다. 누가 물어 봤나? 이름도 말했었는데 듣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잊어버렸다.

- 근데, 어디 가시려구요?
- 아니요, 선생님 가시길래 따라 왔어요.
- 아, 네... 전 그냥 산책 좀 하는 건데...
- 저도 산책 좋아해요.

산책을 같이 하는 사람도 있나? 있기는 있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이 산책해본 적이 없었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건데 그걸 혼자 하지 않고 누구랑 같이 한다고? 왜? ... 난 그런 걸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해하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이 여자는 눈치가 없는 건지... 나 혼자 있고 싶으니 돌아가라고 하기도 멋쩍어서 그냥 같이 걸었다.

그녀는 계속 옆에서 뭐라고 조잘댔다. 자기는 몇 살이라느니, 결혼을 하긴 했다느니, 어릴 때 꿈은 교사가 아니었다느니... 결혼을 했으면 한 거지, 하기는 했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이해도 되지 않았고 이상하게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나보다 두어 살 많았었나... 그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기는 뭘 좋아하는데 난 어떠냐느니, 음악이 어떻고, 배우가 어떻고, 가수가 어떻고... 영화 보는 거 좋아한다느니... 이건 뭐, 미팅에서 처음 만난 남녀가 나눌 만한 대화를 쏟아냈다. 마치 연예인 얘기하는 여고생 같았다. 그러나 여고생처럼 신선하고 상큼하지는 않았다. 그녀 혼자서 떠들었고 나는 그냥 이따금 네에... 네에...

평소 산책하는 길은 건물 뒤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연수원 둘레를 한바퀴 돌고 운동장으로 내려와 운동장 가운데에서 별을 좀 보다가 들어오는 코스였는데, 그날은 건물 옆쪽 계단으로 그냥 내려왔다. 보통 30분 이상 하던 산책을 10분도 안 되어 끝냈다.

내가 없는 동안 이 여자도 없다는 걸 학교나 연수원 측에서 알게 되면 오해받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히 돌아왔다. 보통은 산책하고 나면 편안하게 쉴 수 있었는데, 그날은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아서 그리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그냥 돌아와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독자 여러분들이 솔깃해 할 만한 일은 밤에 벌어졌다.



- 2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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