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마검천황(色魔劍天荒) - 2부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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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 괜찮은 물건 하나를 건졌군.”
“그러게 말야. 귀족의 손녀라니... 그것도 아직 건재한 가문의...”

인신매매 길드의 중간간부인 칼로이와 텔만은 갑자기 찾아온 횡재에 입이 찢어질 듯 웃음을 지었다. 귀족출신의 여자는 비쌌다. 그것도 몰락귀족이 아닌 영지와 세력을 지닌 귀족출신이라면 더욱 비쌌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들의 조직이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웃기는 인간이야. 클라인 푸니엘 플로네츠 남작이라던가? 쯧쯧... 사촌의 정부가 되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손녀를 인신매매 조직에 팔아넘기다니...”
“가문의 명예라고 하지 않나? 귀족이라는 얘기지.”
“미친... 먹고 살기 힘들어 딸네미를 넘기는 가난한 평민들도 부끄러운 건 안다구. 그런 걸 귀족이라구...”

또다른 중간간부인 모츠가 분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인신매매 길드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어려운 살림 때문에 어려서 팔려간 누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인신매매 길드에 팔렸으니 인신매매 길드에 들어오면 팔려간 누이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인신매매 길드에 투신했었다. 길드의 배려로 누이를 찾아 지금은 같이 살게 되었지만 과거 자신의 누이가 팔려가서 겪어야 했던 과거가 사라질 리 없었다. 당연히 가문의 명예를 위해 친손녀를 팔아넘기는 플로네츠 남작의 행사는 분노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흐흐... 덕분에 귀족여자를 하나 얻지 않았는가? 귀족여자는 엘프 다음으로 비싸다구. 이번에 죽은 30명의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도 길드에 막대한 이익이 떨어질 거란 말야. 덜떨어진 귀족 덕분에 우리만 횡재했지.”
“글쎄말야. 보아하니 정말 미인이더라구. 귀족만 아니라면 그냥... 꿀꺽...”
“아서라 아서... 원래 귀족은 도도한 맛에 사는 거라구. 괜히 건드렸다가 굴욕이라도 느끼면 값을 절반도 못받는단 말야.”

텔만이 뒤에 따라오는 마차를 보며 침을 삼키자 칼로이가 웃으며 그를 말렸다. 하긴 말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텔만도 길드의 중간간부였다. 중간간부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상품에 흠집을 내서 길드에 손해를 끼칠 행동을 할 리 없었다.

“하긴... 몰락귀족의 딸에 비해 현역귀족의 딸이 몇 배 비싼 이유도 그 건방짐과 도도함 때문이지.”
“크크... 노예로 팔려간 주제에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거든. 하긴 그게 좋아서 사가는 놈들도 있지만 말야.”
“그런 놈들이 더 많지. 이번에 물건을 사기로 한 귀족놈도 그 도도함을 꺾어야겠다며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잖아?”
“중앙의 간부들만 아니었으면 적어도 몇 배의 돈은 더 울궈낼 수 있었은텐데 말야.”

칼로이의 말에 모츠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요구조건이 붙게 된다면 비용도 추가되는 것이 장사의 기본이다. 그런데 중앙간부들이 이번 고객에 대해 배려할 것을 직접 지시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중앙의 명령이기는 하지만 더 받아낼 수 있었을 돈이 떠오르자 중간간부의 입장에서 크게 아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글쎄... 보아하니 이쪽으로 경험이 많은 것 같던데? 안그러면 어떻게 중앙간부들이 직접 그의 의뢰를 들어주었겠어?”
“하긴... 우리 일이라는게 주로 귀족을 상대하는 것이니. 귀족이 없으면 인신매매 길드는 창녀나 공급하며 푼돈이나 만졌어야 했을걸?”
“썩을 귀족들 덕분에 우리가 먹고사는 거라 그 말이지.”
“크크... 그건 자네 말이 맞아 텔만.”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약발은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

칼루이의 말대로 30여명의 조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움직이는 마차는 조용했다.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져 내부에서 소란이 있어도 외부로 전해질 리 없었지만, 오랜 경험으로 내부의 작은 변화까지 알아낼 수 있는 칼루이나 다른 중간간부의 눈에도 마차 안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장사 하루이틀 하나? 내일모레 의뢰인의 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깨어나지 않을걸? 그렇지 않나, 모츠?”
“아니, 하루정도 더 자야해. 의뢰인이 글피쯤 성에 도착한다고 했거든. 괜히 그 전에 깨어나봐야 자칫 상품만 상할 수 있어서 약을 조금 더 썼어.”

모츠의 대답에 칼루이와 텔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츠의 말대로 자칫 물건이 일찍 깨어나봐야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면 물건이 손상될 수 있었다. 귀족 특유의 도도함이나 기품이 꺾일 수도 있었고, 그러다보면 물건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물건을 넘기는 그 순간까지 물건이 깨어날 수 없도록 하는 편이 좋았다.

“그런데 위험하지는 않겠나? 자네 솜씨를 못믿는 건 아니지만 사흘이나 재우는 건 좀...”
“?... 칼루이, 모츠의 실력을 의심하는거야? 저 인간이 약을 쓰면 일주일을 자고서도 멀쩡히 일어날 수 있다구. 괜히 중간간부가 아니란 말야.”
“하긴, 모츠의 약쓰는 솜씨는 중앙의 고위간부들도 인정할 정도니까.”
“크크... 잘보여야 한다구. 우리 가운데 중앙의 고위간부로 승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바로 모츠일테니 말야. 언젠가 자네나 나도 모츠의 명령을 들어야 할 날이 올걸?”
“그건 그렇겠지? 모츠라면 아마 몇 년 안에 중앙으로 불려갈게 확실하니까.”
“그럼그럼...”
“이런... 텔만, 칼루이, 너무 추켜세우지 말게. 그러다 떨어지겠어.”
“??... 소심하긴. 자신을 가지라니까. 나중에 중앙에 올라가면 우리나 잘 봐달라구.”
“흐흐흐... 텔만의 말이 맞아. 우리정도의 검술은 쌔고쌨지만 자네같이 약을 잘쓰는 사람은 길드 안에서도 몇 없으니까.”
“하긴 이런 게 매력이긴 하지만 말야. 인신매매 길드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고 겸손한 모습 때문에 조직원들이나 간부들도 모츠 자네를 신뢰하는 것일테지.”
“흐흐... 확실히 인신매매 길드와는 안어울리긴 하지. 오히려 그게 높은 자리에 적합한 자격요건이긴 하지만 말야.”
“아아... 마음껏 갖고 놀고, 놀고 나서 제자리에만 갖다놔주게.”
“갖고 놀았으면 팔아넘겨야지. 왜 제자리에 갖다놔주나? 자네는 아직 인신매매 길드원으로서는 멀었어.”
“하하하하하.... 맞아! 인신매매 길드에 몸을 담고 있다면 갖고 논 사람을 그냥 제자리에 갖다놓아서는 안되지. 모츠 자네가 고위 간부가 될거라는 말 취소네. 평길드원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어.”
“맞아! 하하하하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구!!”
“하하하하... 이 사람들이...!!!”

모츠, 칼루이, 텔만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두 쌍의 눈이 길드원들이 호위하고 있는 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 한 쌍과 보랏빛이 도는 흰자위 위에 박힌 검은 눈동자 한 쌍이었다. 그 두 쌍의 눈의 주인은 칸피니스의 명령을 받은 디아스루에나와 릴레이나였다.

“루에나, 아무래도 저놈들 뒤에 배후가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렇습니다. 릴레이나님.”
“아무래도 배후까지 알아내서 박살내버리는 것이 좋겠지?”
“예, 칸피니스님도 그러길 바랄 겁니다.”
“당분간 와르디의 몸에 위험은 없을 것 같으니 배후가 드러날 때까지 그냥 놔둬도 괜찮을 것 같아. 이대로 놔두고 저들의 배후를 쫓는 게 낫겠어.”
“제가 저들의 뒤를 쫓겠습니다.”
“그래. 와르디가 위험해지기 전에는 나서지 말고, 칸피니스와 내가 도착할 때까지 감시만 하도록 해. 나는 칸피니스에게 가있을테니까.”
“예. 릴레이나님.”
“그럼 수고하라구.”
“예.”

디아스루에나는 대답과 동시에 다크미스트로 몸을 감싸며 마차의 그림자로 숨어들어갔다. 아무리 낮이라 할지라도 고위급 뱀파이어인 그녀의 움직임을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여름의 뙤약볕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기가 잠시 스치는 것을 이상히 여길 뿐이었다.

여전히 웃으며 떠들고 있는 인신매매 길드의 세 중간간부를 보며 릴레이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마족의 잔혹함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비웃음의 미소였다.

“어리석은 작자들. 몇 푼의 돈 때문에 건드려서는 안될 인간을 건드리다니. 홋... 하긴 칸피니스의 힘은 인간들이 알아채기엔 너무 크지만 말야.”

“나는 그럼 칸피니스가 약속한 보수를 받으러 가보실까? 홋홋홋...”

마족의 권능에 의해 주문 없이 텔레포트가 시전되며 릴레이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텔레포트의 목적지는 플로네츠 남작이 성. 아마도 지금쯤 칸피니스는 그 성에 도착해 있을 것이었다. 릴레이나는 사타구니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욕망에 들뜬 채, 칸피니스와 황도를 오가며 몇차례 들른 와르디의 성으로 이동했다.


플로네츠 남작의 영지는 공식적으로 장원 두 개가 고작이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장원의 작은 마을이 전부였고, 성 주위에는 마을이라고 할만한 것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고작 몇 채의 집들이 들어서서 어쩌다 한 번 오가는 델킨피에르의 상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을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이 작은 마을을 지나면 작은 언덕 위에 서있는 단단한 성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플로네츠 남작의 성이었다.

플로네츠 남작의 성은 델킨피에르 자작가의 성에서 정확히 마차로 8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칸피니스의 게으름과 중간의 사건 덕분에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칸피니스의 일행은 어두워지기 전에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냐?”

칸피니스의 일행이 보이자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창을 곧추세우며 막아섰다.

다각-

경비병이 창을 겨누자 기마대의 선두에 있던 롯시가 손을 들어 말과 마차를 멈추고 마부석에 앉아있는 레인을 돌아보았다. 점심을 먹은 뒤부터 마부노릇을 하던 레인은 롯시가 자신을 돌아보자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통해 칸피니스에게 무언가 말을 건내더니 롯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델킨피에르 자작 칸피니스 포르니르 델킨피에르님이시다. 당장 비켜라!”

델킨피에르 자작이라는 말에 경비병들은 놀랐다. 자작이라면 그들의 영주인 플로네츠 남작보다도 높은 작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었다. 설사 상대가 국왕이라 할지라도 확인되지 않은 상대를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델킨피에르 자작님. 지금 즉시 안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기다려주셔야 하겠습니다.”

경비병의 선임이 창을 거두며 앞으로 나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이며 칸피니스의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상황이 나빴다. 평소라면 경비병의 사정을 고려해서 기다려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안에 기별할 필요 없다. 바로 들어가 남작님을 뵙겠다. 길을 비켜라!”
“그건...”

롯시의 말에 경비병은 할 말을 잃었다. 경비병의 제지를 무시하고 성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은 무례도 보통 무례가 아니었다. 영주의 영지 안에서, 그것도 성으로 들어가면서, 영주의 허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영주의 모든 권한을 무시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작이 남작보다 작위가 높다지만 고작 한단계 높은 것에 불과했다. 어차피 같은 하급귀족인 처지에 이렇게 무례를 보이자 경비병은 분노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안됩니다! 여기는 플로네츠 남작의 영지! 플로네츠 남작가의 성입니다! 플로네츠 남작님의 확인과 허락 없이는 국왕이라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들어가겠다면 어쩔 것인가?”
“막겠습니다.”

경비병들의 선임은 자신이 있었다. 델킨피에르 가문이 자작가라고는 하지만 흑암의 숲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변두리의 소귀족이 불과했다. 델킨피에르 자작가가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거나, 뛰어난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 없었다. 더구나 눈앞의 기사나 다른 기사도 모두 여자였다. 여자가 강한 검술을 지녔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실력으로 기사가 된 것은 아닐 것이라 여겨졌다. 충분히 경비병들만으로도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막아보시지.”

하지만 경비병 선임은 자신의 판단을 확인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롯시의 대답과 동시에 그의 목이 몸에서 분리된 채 하늘로 날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경비병 선임의 목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신호인 듯 딜레인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도 말을 달리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악!!”
“크아악!!”
“컥!!”

순식간에 성문 앞에 서있던 8명의 경비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명소리를 듣고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20여명의 경비병들이 달려왔지만 그들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델킨피에르 기사들이 말이 움직일 때마다,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어둠속에 검게 보이는 피를 뿜으며 하나둘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갔다.

“막아라!!”
“영주님께 연락을!!”
“기사단을 불러! 기사단을!!”
“적은 기사다! 기사단이 올 때까지 버텨라! 유서깊은 플로네츠 남작가의 검은창 기사단이라면 저들을 막을 수 있을 거다!!”
“궁병대 활을 쏴라!”
“그냥 화살이 아니다! 불화살을 쏴라! 불화살을! 마차를 태워버려!!”

성 안에 있던 수백의 경비병들이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달려나오며 끊임없이 소리질러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전술은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조차 없었다. 창을 내뻗기도 전에,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병사들의 목이 날아가버렸으니까.

휘릭--
휘리리리릭---
휘리릭--

마차로 날아가는 화살또한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화살들은 궁병들의 바람을 배신한 채 레인의 검에 막혀 모두 잘려졌다. 불화살은 마차를 불태우기는커녕 검풍에 말려 불까지 꺼진 채 다른 화살들과 마찬가지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병사들은 절망했다. 그들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리고 그런 상대가 살기를 품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절망속에서 그들은 살기 위해 창을 찌르고, 활을 쐈다.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였다. 아니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의 창이, 화살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창을 찌르고, 활을 쏨으로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만족할 뿐이었다.

무기력한 병사들의 저항은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의 공격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었다. 살기조차 잃어버린 채 목적도 없이 발악적으로 가해지는 공격은 기사들에게 작은 위협조차 될 수 없었다. 그저 말을 달리고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저 적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 팔을 휘두르면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적은 물러났다. 물러서지 않는 적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웠다.


“네놈들은 누구냐?”

한참을 양떼 속에 뛰어든 늑대와 같이 날뛰던 델킨피에르 기사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갑주를 걸치고 말을 탄 사람이 검을 곧추세운 채 달려왔다. 그의 갑옷에 새겨진 검은 창의 문양으로 보아 플로네츠 남작가의 기사인 듯 했다.

상대가 기사임을 확인하자 델킨피에르 기사들도 검을 멈춘 채 상대를 주시했다. 어차피 병사들을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이 살육을 벌이는 것은 플로네츠가의 수뇌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기사가 모습을 보였으니 다른 기사도 곧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이다. 기사들을 모두 베어버린다면 수뇌부들도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무의미하게 병사들을 살육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와아아!! 달튼경이시다!! 검은창의 기사다!”

기사의 모습이 보이고 델킨피에르 기사들이 살육을 멈추자 병사들은 기세가 올라 환호성을 질러댔다. 평소 우러러보며 존경하던 검은창의 기사가 적의 기사들을 멈추게 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사가 적의 기사를 베어 지금가지 당한 복수를 해줄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델킨피에르의 붉은혜성들에게 있어 그같은 환호는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흥! 검은창의 기사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딜레인의 조롱에 달튼이라 불리우는 기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검은창의 기사단의 일원임을 항상 자랑으로 여기던 그에게 딜레인의 조롱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여자였다. 기사로서 여자를 상대로 함부로 검을 뽑을 수는 없었다.

“감히 검은창의 기사를 모욕하는 것인가?”
“검은창이 모욕당할 주제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달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달려갔다. 상대가 여자라는 것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감히 자신이 속한 기사단을 모욕했다. 기사를 모욕한 이상 여자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두두둑--!!
히히히히힝!!---!!
히힝--!!

“이얍!!”

병사들의 함성소리를 뚫고 말발굽소리와 말울음소리가 기세좋게 울리며 딜레인에게 달려들었다. 달튼의 우렁찬 기합소리는 기사답게 모든 소음을 뚫고 성안에 울려퍼졌다.

퉁--!!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칼부딪히는 소리조차 없이 달튼은 목을 잃어버린 채 말에서 떨어져버렸다. 그의 팔은 여전히 검을 굳게 쥔 채 앞을 향해 뻗어 있어, 검은창 기사의 기개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목을 잃은 몸은 그저 바닥을 피로 물들이며 목적없이 구를 뿐이었다.

툭--!!

뒤늦게 몸 근처로 투구로 감싸여있는 달튼의 머리가 떨어져내렸다.

“...”
“...”

플로네츠 성의 병사들은 침묵했다. 믿을 수 없었다. 달튼경이라면 플로네츠 남작가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최강은 아니지만 검조차 섞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정도로 약한 실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짧은 시간에 목이 잘린 시체가 땅위에 뒹굴고 있는 것이다.

딜레인이 말을 몰아 병사들에게 다가가자 겁에질린 병사들이 딜레인이 움직인 거리만큼 뒤로 물러섰다. 조금전의 절망에 찬 악다구니 같은 공격은 더 이상 없었다. 차라리 선 채로 죽을 지언정 반항은 꿈조차 꿀 수 없는 공포에 의한 포기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왠 놈들이냐?”

두려움에 떨며 차마 막아설 엄두조차 못내고 좌우로 갈라서는 병사들을 헤치며 칸피니스 일행이 내성에 이르렀을 때 내성에서 10여명의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뛰쳐나왔다. 붉은 불꽃의 문장이 그려진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너희들은 또 뭐냐? 플로네츠 남작가의 기사들 가운데 너희들 같은 자들은 없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딜레인은 기사들의 갑옷에 그려진 문장을 잘 알고 있었다. 레드플레임. 제국 내에서도 용맹으로 이름높은 콘벨른 백작가의 기사단의 문장이었다. 그런 대단한 기사단이 이런 촌구석에 나타났다는 것은 무언가 의도가 있기 때문일 터였다. 딜레인은 그 의도가 와르디와 관계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자도 기사가 될 수 있는 변두리의 기사답구나. 레드플레임을 몰라보다니. 우리는 콘벨른 백작의 기사단 붉은 불꽃, 레드플레임이다.”
“호오... 그 대단한 레드플레임이 이런 촌구석까지 왠일이실까?”

플로네츠 성에 파견된 레드플레임 기사단의 리더인 듯 그람드 투르 자이먼이 칸피니스의 일행을 비웃으며 당당하게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딜레인의 조롱섞인 대응 뿐이었다. 어차피 적이라면 존중해줄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적이 자신들을 비웃는다면 같이 비웃어줄 뿐이었다. 그것이 델킨피에르 기사단의 방식이었고, 또한 딜레인의 방식이었다.

“네... 네놈이...”

그람드는 딜레인의 조롱섞인 말투에 분노했다. 하찮은 시골의 기사단이, 그것도 어린 여자아이가 자신을, 아니 자랑스런 붉은불꽃을 조롱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여기사가 입고 있는 제복은 붉은 색인 듯 했다. 붉은 색이라면 자신들이 처리해야 할 델킨피에르 영지의 붉은 혜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이런 궁벽한 영지에 나타날만한 기사단이라고 해봐야 몇 되지 않으니 거의 확실했다.

“어린계집, 너희가 델킨피에르의 붉은 혜성이냐?”
“호오... 알고 있네?”

딜레인은 여전히 여유있는 자세로 철저히 그람드를 조롱했다. 그람드는 상대가 붉은 혜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분노는 검으로 저들을 꺾어 풀면 되는 것이다. 죽일 필요도 없었다. 사로잡아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철저히 능욕해줄 터였다. 보아하니 미모가 뛰어나 능욕한 재미도 쏠쏠할 것이라 생각하니 싸움을 앞두고 있음에도 자지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 말로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계집.”

그람드가 검을 뽑아들자 그람드 주위에 몰려있던 다른 레드 플레임도 검을 뽑아 칸피니스 일행을 겨누었다.

“네년의 무례는 네년의 몸으로 사과받도록 하지. 쳐라!”

나름대로 잔혹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딜레인에게는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흥!”

딜레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달려가자 롯시와 엘로나, 펠린, 루시등도 같이 말을 달리기 l작했다. 레인만 마차의 호위임무 때문이 아닌 싸움이 끝나면 마차를 몰아가야 했기 때문에 마부석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카캉--!!
캉--!!
캉--!!

그래도 제국에서 꽤 유명한 기사단이라서인지 검은창 기사단을 상대할 때처럼 금방 끝나지는 않았다. 제법 딜레인들의 검을 막아오는 소리도 들려왔고, 가끔 반격도 해오고 있었다. 그들의 명성이나 두 배에 달하는 숫적 우위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년!!”

그람드는 말 위에서 휘두르는 딜레인의 검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말 위에서 검을 휘두르면 말안장의 높이에 비해 짧은 검의 길이 때문에 공격의 범위가 크게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람드도 그같은 점을 노리고 딜레인의 사각을 노리려 했다. 하지만 딜레인의 실력은 그람드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엇다.

카캉--!!
캉--!!!

몇 차례 검격이 오가는 동안 그람드는 여러차례 마상의 검수가 갖기 쉬운 사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모두 딜레인에게 막혀버렸다. 딜레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움직인 사각조차 딜레인의 빠르고 유연한 공격에 아무 소용없이 그를 위험에 노출시켰다.

캉--!!
카캉--!!

딜레인의 가는 팔을 보고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시도도 해보았지만 딜레인은 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슬쩍슬쩍 흘리며 도리어 그의 자세를 무너뜨리려 했다. 덕분에 그람드는 몇 차례나 생명을 위협받아야 했다.

캉--!
캉--!

싸움이 계솔될수록 그람드는 자신이 상대를 잘못파악했음을 절감해야 했다. 딜레인은 그가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실력은 최소한 레드 플레임의 기사단장 정도는 되어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그는 자신을 이 자리에 오도록 만든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했다. 영주 아들의 꼴같잖은 명령을 기회라 여긴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이렇게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라면 더욱더.

“합!”
“헉!!”

챙--!!

딜레인의 검이 그의 공격을 흩뜨리며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베어오자 가는 다급하게 검을 들어 막으려 했다. 하지만 몸 전체를 사용해서 휘두르는 그녀의 검에는 그람드가 상상한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크헛--!!”

검을 막은 것 까지는 좋았지만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의 자세가 채 가다듬어지기도 전에 아래로 내려갔던 딜레인의 몸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와함께 딜레인의 쭉뻗은 팔이 그람드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갈라왔다.

흐트러진 몸의 중심을 바로잡으려는 본능적인 탄력이 실린 딜레인의 검에는 내려치던 것 만큼이나 강하고 빠른 기세가 실려 있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그람드로서는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걱--!!!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올려 막으려 해보았지만 딜레인의 검이 허공에 기묘한 곡선을 그리면서 날카롭게 뼈를 베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머리가 잘려진 목에서는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챙강--!!
퉁--!!!

손에 들린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구어지면서 그람드의 몸이 자신이 흘린 피 위로 쓰러졌다.

상당히 강한 적이었지만 딜레인은 죽은 적 따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강한 적이든 약한 적이든 이미 죽은 이상에는 시체에 불과했다. 예의나 적의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죽은 시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죽은 적에게 경의를 표하기보다는 살아있는 적을 쓰러뜨리는 쪽이 좋았다. 그것이 칸피니스의 가르침이었다. 칸피니스의 딸이자 제자인 딜레인은 그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했다.

카캉--!!

롯시를 공격해가던 기사 가운데 한 명이 딜레인의 갑작스런 공격을 막아가다 중심을 잃고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적 기사는 딜레인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딜레인이 이동해온 방향에 누워있는 시체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이...”

카캉--!!
캉--!!
캉---!!
휘릭--!!!
휘릭---!!

그람드의 이름을 외치려는 듯 했지만 딜레인은 그럴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람드를 쓰러뜨렸던 그 강하고 빠른 검격이 쉬지 않고 적 기사를 몰아쳤다. 적 기사는 필사적으로 검격을 막아갔지만 그람드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데다, 선제공격에 이은 강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제대로 반격조차 해보지 못한 채 그저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캉--!!
카캉--!!!
휘릭--!!
샤라락--!!!
캉--!!

숨을 돌려보려 해도 그럴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공격을 위한 잠시의 여유도 딜레인의 검격이 하나하나 분쇄되어 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동안의 훈련과 본능에 의지해 날아오는 검을 막아가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도 곧 그의 호흡이 흐트러지면서 검격을 피해 몸을 날리고 굴리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잠시 겨우 버티던 적 기사는 무너진 자세로 딜레인의 공격을 겨우겨우 피하다 결국 딜레인의 검 앞에 자신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말았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푹--!!!

딜레인의 검은 움찔거리며 들어올려지는 적 기사의 검을 피해 아름다운 빛의 곡선을 그리며 적 기사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서걱--!!

그녀의 손목이 움직이자 기사의 목으로 파고들었던 검이 살짝 요동치며 목을 몸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렸다. 공중으로 떠오른 목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세 명을 상대하다가 두 명으로 부담이 줄어든 롯시는 딜레인의 손에 한 기사의 목이 잘려지는 것을 보며 딜레인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딜레인과 같은 폭발적인 힘은 없지만 한결같은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갖고 있는 롯시의 검이 비어버린 한 사람의 자리를 헤집으며 다른 두 사람을 핍박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데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딜레인은 그녀의 미소를 보자 굳이 롯시를 도와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라면 두 명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롯시 대신 다른 동생들을 돕기 위해 말을 몰아갔다.

가장 나이 어린 펠린이 두 명의 기사에게 둘러싸여 고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펠린의 나이 14살.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 검술의 기교는 어느정도 수준 이상에 올랐지만 아직 덜 자란 그녀의 몸은 그녀의 기술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그녀는 칸피니스와 같은 괴물이 아니었기에 신체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두 명의 기사의 파상공격을 쉽사리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펠린!!”

딜레인은 펠린의 이름을 외치며 말을 달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펠린의 검격이 빨라졌다. 빨라진 만큼 틈도 커졌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딜레인이 도와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서걱--!!

딜레인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펠린이 노출시킨 허점만을 노리며 달려들던 적 기사의 목이 빠르게 달려온 딜레인의 검에 의해 베어졌다. 너무나도 깨끗하고 빠른 공격이라 방어하거나 피할 틈도 없었다.

“하앗!!”

적이 하나로 줄어들게 되자 펠린은 검의 기세를 더더욱 높여갔다. 힘은 딸리지만 그녀에게는 유연함이 있었다. 적 기사의 강한 반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유연함을 한껏 살려 쉴 새 없이 연속공격을 퍼부었다.

캉--!!
캉---!!
캉캉--!!
카캉--!!
캉--!!

몇 번인지도 모르는 칼부딪힘이 있은 후 한 줄기의 빛이 적 기사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적 기사는 그 빛을 막기 위해 몸을 젖히며 검을 찔러 반격해갔다. 하지만 날아오던 빛은 갑자기 폭포처럼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제비처럼 하늘로 치솟아오르며 기사의 공격을 차단하고는 곧장 기사의 턱을 향해 아래에서 강하게 파고들었다.

“허헉--!!”
캉--!!

급히 몸을 뒤로 눕히며 검을 뻗어 공격을 피했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솟아오르던 그 기세 그대로 펠린의 검이 적 기사의 눈을 향해 곧장 뻗어온 것이다.

콰직---!!

“크아악--!!”

한순간이었다. 한 순간 방어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펠린의 검이 적 기사의 코뼈를 부수었다. 검끝이 코뼈에 이어 숨골까지 꿰뚫더나 기사의 뒷통수로 삐져나왔다.

“컥--!!”

털썩--!!

펠린이 상대하던 적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엘로나가 맡아 상대하던 기사 하나가 엘로나의 검에 한쪽 팔을 잃은 채 심장을 꿰뚫리며 쓰러졌다.

“크아악--!!”

엘로나와 펠린이 동시에 승리의 검을 치켜드는 순간 살아남아있는 레드 플레임은 한 명도없었다. 롯시가 맡아 상대하던 두 명과 루시가 상대하던 두 명도 이미 검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오직 델킨피에르 기사들만이 아무일 없었던 듯 말을 몰아 병사들을 압박해갈 뿐이었다.

믿었던 콜베른 기사들마저 전멸해버리자 병사들은 두려워할 힘조차 잃고 있었다. 이리저리 델킨피에르 기사들의 움직임에 따라 몰려다니고 있는 그들의 손에는 더이상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마저 사라져버린 체념어린 표정 뿐이었다.


“남작님께서 안으로 뫼시라 하십니다.”

모든 것이 정리된 뒤 내성의 문이 열리며 남작가의 집사 로베르트 벨린이 나와 정중하게 남작의 말을 전했다.

덜컹--!!

집사의 말에 마차의 문이 열리며 칸피니스가 내려섰다. 2미터 20센티의 거구. 잔폭한 눈빛과 폭발적인 위압감은 그의 체격보다 더욱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끼게 했다.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의 신위에 놀란 병사들은 칸피니스의 존재감에 몸을 떨며 한참을 더 뒤로 물러서야 했다.

칸피니스의 잔폭한 눈빛이 집사를 향하자 집사도 찔끔 놀라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서야 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해봤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드래곤조차도 놀라는 델킨피에르의 살기를 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집사가 견뎌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베르트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로베르트가 붉게 상기된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칸피니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과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의 걸음과 함께 로베르트에게 다가왔다.

“으... 으...”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던 조금 전의 다짐을 잊었는지 로베르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에 질린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 어서... 오십... 시... 오... 칸피니스... 자... 작... 님...”

집사의 예에 따라 칸피니스에게 떠듬거리며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행인지 칸피니스는 그의 인사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저 냉혹한 눈빛으로 내성의 정문을 노려볼 뿐이었다.

“저... 저를... 따...”

로베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칸피니스는 아무말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베르트는 칸피니스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자 급히 걸음을 옮겨 칸피니스를 추월해 그의 앞에서 그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플로네츠 성에 방문했던 칸피니스인만큼 특별히 안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무였기에 로베르트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며 칸피니스의 앞에 서서 남작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기다려야 하나?”

내성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칸피니스의 등을 멍청히 바라보며 딜레인이 롯시를 보며 말을 걸었다. 다른 귀족의 성에 온 이상 귀족가의 안내가 없이는 함부로 건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들을 안내해야 할 로베르트가 겁을 집어먹어 딜레인을 비롯한 델킨피에르의 기사들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멍청히 서서 집사가 다시 나와 그들의 거취를 이야기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나오면 그냥 죽여버릴까?”

딜레인은 검술실력만큼이나 성격이 과격했다. 아마도 말리지 않는다면 진짜 집사를 죽여버릴지 몰랐다. 롯시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말려야 했다.

“그냥 적당히 팔 하나 정도 자르고 끝내는 게 어때? 그렇지 않아도 오늘 피를 많이 봤는데피를 더 볼 필요는 없잖아.”

롯시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살기가 넘치던 끝이라 그녀의 황당함은 딜레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과격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좋아, 특별히 봐줘서 팔 하나로 끝내주지.”

딜레인은 크게 인심쓰는 듯 고개까지 끄덕여보였다. 롯시는 그런 그녀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드디어 딜레인이 자신의 성질을 죽일 줄 알게 되었다 여긴 것이다. 자신의 제안도 딜레인 못지않게 과격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팔로 자를까? 왼팔로 자를까?”
“일은 해야 하니 왼팔이 낫지 않겠니?”
“오른팔을 잘라야 일을 할 때마다 교훈이 되지 않겠어?”
“그러다 잘리면 가족들은 어떻게 하구.”
“흠... 대개 집사는 세습이니까 아들이 이어받지 않으려나?”
“로베르트의 얼굴 봤어? 이제 설흔도 안되어 보이잖아. 분명 아들도 그만큼 어릴거야.”
“쳇... 봐줬다. 왼팔 하나로 용서해주지.”
“착하구나. 딜레인은.”
“흥!!”

롯시의 온화한 미소이나 딜레인의 부끄러워하는 표정과는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대화였지만 당사자들은 너무도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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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회에는 섹스장면이 없습니다. 원래 마족과의 섹스가 들어가야 하는데 전투장면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한 회는 그냥 건너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최소한 한 회는 섹스에 관련된 대사나, 섹스를 연상시키는 묘사를 넣어왔는데 이번에는 그랬다가는 밸런스가 무너질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앞으로의 내용은 칸피니스의 하렘 설정에 맞춘 모험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주된 내용은 황실에서 일어나는 음모와 이웃나라와의 전쟁, 그리고 전설의 보물을 찾기 위한 모험입니다. 물론 먼치킨인 이상 단순호쾌하게 진행됩니다. 몇 회나 이런 식으로 전투장면만 나열한다면 야설이 들어간 판타지지 판타지의 형식을 취한 야설이 아니거든요. 저는 어디까지나 야설을 쓰고 있는 것이지 판타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점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회에 마족과의 섹스가 나갈 것이고, 그 다음회에 새로운 캐릭터가 추가될 것입니다. 섀도우 엘프와의 섹스란 어떤 느낌일까는 그보다 조금 뒤에 나가겠군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종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홋홋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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