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마검천황(色魔劍天荒) - 2부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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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시의 표정은 어느때보다 밝았다. 붉게 상기된 뺨은 어느때보다 생기있어 보였다. 그리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작은 여관의 거친 스튜를 먹으면서도 천상의 진미를 먹는 듯 그녀의 눈은 행복으로 빛나고 있었다.

“쳇!”

딜레인은 그런 롯시의 모습을 부러운 듯 훔쳐보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녀가 왜 저리 기분좋은 표정을 짓게 된 이유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그녀의 기분 좋은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며 초생달모양으로 부드럽게 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딜레인 언니, 그렇게 쳇쳇 거리다가 음식에 침 튀겠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펠린은 눈치가 부족했다. 검술의 재능도 뛰어나고 머리도 그리 나쁜 편이 아닌데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꼭 한박자 느렸다.

“펠린!!”

엘로나가 급히 나서보지만 이미 늦었다. 딜레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펠린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딜레인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칸피니스 한 사람 뿐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눈치가 늦은 펠린도 긴장한 채 수저를 놓고 손을 테이블 아래로 늘어뜨렸다. 엘로나는 펠린의 대처를 보며 여차하면 딜레인을 말릴 생각으로 딜레인 쪽으로 몸의 중심을 옮긴 채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만!”

분위기는 살벌했지만 세 자매 간의 대치는 짧았다. 칸피니스가 나서자 어제 그랬냐는 듯 딜레인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딜레인의 불편한 심기 때문에 시작되었던 대치였기 때문에 딜레인이 살기를 거두자 대치는 금방 풀어벼저렸다.

“딜레인.”
“예, 아빠.”

딜레인은 엄격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 칸피니스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칸피니스 앞에서는 순종하는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네가 시작한 장난이다. 자기가 시작한 장난 끝에 스스로 기분이 나빠지면 어쩌자는 거냐? 네가 그러고도 검을 쥔 기사냐?”
“...”

나직하지만 엄격한 칸피니스의 목소리에 딜레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무언가 속에 울컥하는 것이 있는 듯 보였다.

“분명히 장난의 시작은 네가 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진 롯시를 내가 달래느라 안아주었던 것이고. 분명 시작은 너다. 알겠니? 네가 화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 거다. 하물며 펠린은 전혀 상관없는 제3자가 아니냐? 왜 펠린에게까지 화풀이를 하려 드는게냐?”
“... 죄송... 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필요 없다. 펠린과 롯시에게 사과해.”
“예...”

딜레인의 목소리에는 조금전까지의 살벌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기죽은 아이의 침울함과 무력함만이 나직한 목소리에 울먹이듯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펠린과 롯시에게 사과했다.

“미안, 펠린. 미안해요, 롯시 언니.”
“괜찮아. 어차피 장난이었는걸.”
“미안해, 딜레인 언니. 이번에도 내가 눈치없이 끼어들었나 보네.”

롯시와 펠린은 엄격한 표정의 칸피니스를 흘끗 훔쳐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딜레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딜레인은 그녀들의 행동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는 이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빵조각을 잘게 뜯어 입에 넣기 시작했다. 롯시와 펠린은 딜레인의 침울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칸피니스와 딜레인만 열심히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펠린, 딜레인과 자리를 바꿔앉지 않겠니?”

펠린의 자리는 칸피니스의 바로 왼쪽 옆자리였다. 펠린은 칸피니스의 의도를 짐작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몸을 일으켜 딜레인의 자리로 옮겨갔다. 딜레인은 펠린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 자리를 옮길 것을 이야기하자 마지못한 듯 느릿하게 펠린이 앉았던 칸피니스의 옆자리로 옮겨앉았다.

“딜레인.”
“...”
“딜레인.”
“...”
“딜레인.”
“예...”

몇 번을 부르고서야 겨우 대답이 들려왔다. 그녀의 젖은 목소리는 나직하게 떨리고 있었다. 칸피니스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원래 장난이 실제가 되는 법이란다. 네 나이 때는 대부분 그렇지.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했다가도 어느새 자신의 행동에 몰두하다보면 장난이라는 것을 잊고 진심이 되어버리는 거지. 네 나이가 몇 살이지?”
“열... 일곱 살이요.”
“그렇지. 열 일곱 살. 너 제국의 기사 가운데 너보다 나이 어린 기사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니?”
“아... 아뇨?”
“나는 가끔 그 사실을 잊곤 한다. 네 검술실력 때문에 네가 아직 20살도 안된 어린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
“미안하다. 하지만 장난으로 시작한 일은 장난으로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행동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하지만 너는 델킨피에르가의 기사다. 그것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기사다. 그것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나도 네가 아직은 어린 여자아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마.”
“예... 예...”

딜레인은 자신의 어깨를 감아오는 칸피니스의 팔에 의지해 자신의 몸을 그에게 기대었다. 칸피니스는 그녀를 조금더 힘주어 꼬옥 안아주면서 그녀의 탐스러운 검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롯시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이 부러운 눈으로 딜레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칸피니스는 개의치 않았다. 딜레인도 칸피니스의 손길을 즐길 뿐 그녀들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17살의 딜레인은 물론, 그녀보다 더 나이가 어린 15살과 14살의 엘로나와 펠린도 섹스를 경험하기에도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러나 칸피니스에 의해 그녀들은 13살 때부터 섹스를 경험해왔고 칸피니스의 정부로서 한 사람의 독립된 여성으로서 대우받아왔다. 칸피니스로부터 배운 뛰어난 검술실력도 그녀들이 나이에 비해 성숙한 취급을 받는 한 요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칸피니스조차도 그녀들이 아직 어린 소녀들이라는 사실을 곧잘 잊곤 했다. 그녀들이 아직도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나이의 여자아이들이며, 그 나이또래의 여자아이들과 같이 불안정하고 격정적인 감성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곤 했다. 오늘 딜레인의 행동에 대해 그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했던 것도 그의 무심함이 딜레인의 심리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칸피니스는 자신의 무심함이 정말 미안했다. 그래서 더욱더 깊은 애정을 담아 딜레인을 쓰다듬어주었다.

“으음... 음... 음...”

칸피니스가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성감을 느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칸피니스에게 기대더 있던 딜레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그녀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롯시를 비롯한 다른 소녀들은 그녀의 그런 민감한 반응에 얼굴을 붉히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던 칸피니스는 일행의 붉은 얼굴을 보며 한 번 씨익 웃어보이더니 자신의 큰 손으로 딜레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어 애무 아닌 애무를 계속했다.

“으음... 음... 음...”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아있건만 저녁식사는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식사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억눌린 딜레인의 신음소리에 맞춘 다른 여자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음식 위를 오갈 뿐이었다.



어디에나 분위기를 깨는 녀석들이 꼭 있었다. 그 대부분은 주제도 모르고 욕심만 많은 멍청이들이었다.

“여어... 분위기 좋은데?”
“킬킬킬... 정말 좋은 분위기로구만. 여자만 몇이야? 하나... 둘... 무려 8명이나 되는데? 덩치씨 혼자서 차지하긴 너무 많잖아?”
“크흣... 그렇지. 여자야 많은수록 좋다지만 너무 많으면 몸 상하는 법이지. 이럴 땐 자비를 베풀어서 부담을 덜어주는 게 예의라구.”

잘해야 뜨내기 용병으로 보이는 건달 서너명이 칸피니스 일행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대충 덩치들이 있어 보이고, 잘 정비된 무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리 실력이 없는 무리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자신만만한 웃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칸피니스 일행에게 그들은 그저 좋은 분위기를 망가뜨린 방해꾼에 불과했다. 그들의 위압적인 덩치나 무기들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좋은 분위기 망쳐놓은 데 대한 불쾌감과 짜증을 풀어버릴 수 있으면 좋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아빠, 제가 처리할까요?”

조금전의 감각이 남아있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딜레인이 칸피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쾌락의 잔재가 남은 뜨거운 눈빛은 방해꾼에 대한 증오로 인해 살기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처리한다는 말은 죽여버리겠다는 의미인 듯 했다.

“삼촌, 제가 하고 싶어요.”

딜레인의 좋은 시간을 구경만 해야했던 롯시의 눈빛은 욕구불만으로 인한 광기까지 엿보이고 있었다. 상냥한 성격의 그녀였지만 지금 이순간 방해꾼들에 대해서만큼은 딜레인과 별차이 없이 위험한 난폭함이 느껴졌다.

엘로나와 펠린의 눈빛도 간절함을 담아 칸피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눈빛도 롯시와 같이 욕구불만에 의한 파괴본능으로 가득차 있었다. 지금 그녀들의 모습은 롯시만큼이나 위험해보였다.

레나와 루시, 파트리샤, 디올린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칸피니스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칸피니스는 일행을 한 번 훑어본 후 한 번 시익 웃어보이며 결정을 내렸다.

“롯시, 딜레인, 너희 둘이 해결해라.”

싸움은 화해의 가장 좋은 수단이다. 서로 목숨걸고 드잡이질하는 것은 마음의 앙큼을 털어놓는데 아주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공동의 적과 싸우며 서로의 마음을 잇는 것이었다.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공동의 적에게로 향하며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신뢰로 서로의 마음을 잇는 것이야말로 화해의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기회가 없다면 모를까 그런 좋은 방법을 실행할 기회가 왔는데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옛!”

칸피니스의 의도를 눈치챈 때문인지 롯시와 딜레인은 일어서면서 서로를 향해 어색하긴 하지만 미소를 지어보였다. 워낙에 롯시와 딜레인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데다가, 조금전의 갈등도 원수질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정도 미소만으로도 화해하는데는 충분했다. 남은 앙금은 눈앞의 떨거지들을 쓸어버리면서 풀어버리면 되었다.

“어어... 뭐야??”
“설마... 싸우자는 건 아니겠지?”
“고작 여자아이들이잖아? 설마...??”
“정말인 것 같은데? 봐봐. 검을 뽑잖아?”
“어디어디... 어? 정말?”

롯시와 딜레인이 나서는 모습이 의외라 여겼는지 뒤에 앉아있던 사내들까지 몸을 일으켜 칸피니스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앉아있던 자들까지 모이자 칸피니스 일행을 둘러싼 사내들의 숫자는 어느새 12명이 되어 있었다.

“12명이라... 좀 많은 걸까?”
“글쎄? 실력은 형편없어 보이는데?”
“롯시, 6명 자신 있어?”
“자신이야 있지만 너랑 맞추는 건 좀 힘들거야.”
“그럼 7대 5!”
“흠... 그정도는...”
“그럼 그렇게 하는거다. 무르기 없기!”
“좋아! 늦은 사람이 삼촌과의 한 번 양보하기.”
“하... 한 번?”
“자신 없니?”
“나도 좋아!”

롯시나 딜레인이나 눈앞의 사내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상대의 실력이 어느정도인지 뻔히 보이는데다, 그 실력이 두 사람에 미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내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12명의 사내들은 그녀들의 태연한 모습에 모욕이라도 받은 듯 분개하기 시작했다.

“뭐야? 뭐?”
“저년들이 한 번 붙어보자는 모양인데?”
“건방지게! 우리를 뭘로 보고!”
“아직 보지에 털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것 같은 어린 계집들이!”
“좋아! 저년들에게 본떼를 보여주자구.”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서 돌려버려! 돌리고 또 돌린 다음에 걸레를 만들어서 팔아버리자구!”
“걸레는 돈이 되지 않아! 아예 제대로 조교시켜서 좆물이나 빠는 노예로 만드는 게 돈이되지!”
“그럼그럼!! 조교는 내게 맡기라구! 개좆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교육시켜놓을테니까!”
“반반한 년들이니 제대로 교육시켜서 팔면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을거야.”
“길드에서 아주 좋아하겠어.”
“잘하면 대장도 지부의 간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크?... 그렇게만 된다면야 내가 너희들을 모른체 하겠냐?”
“크크크... 그렇지. 그게 또 의리 아니겠수?”
“객적은 소리 그만하고 먼저 잡자구.”
“그래 잡아야 조교하든 팔아먹든 할 거 아냐!”
“흐흐흐... 그 전에 맛부터 봐야지.”
“일착은 내가 한다.”
“웃기지 마. 처음은 나다!”
“누가 일착이 되는 상관은 없는데 죽이지만 마라.”
“칼자국 크게 내서도 안되. 값이 떨어진다구.”
“걱정마라. 우리가 장사 하루이틀 하냐?”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운지 딜레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야? 이인간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그러게. 진짜 말많네.”
“그냥 죽여버리자. 시끄러워서 머리가 다 아프다.”
“그러지 뭐.”

시작은 딜레인이었다. 딜레인은 오른손에 가볍게 검을 쥐고 눈앞에서 열심히 뒤를 보며 누가 일착을 하느니 갖고 싸우고 있던 30대 정도로 보이는 사내의 목을 가볍게 따버렸다.

푸학--

허공으로 치솟는 피를 보고서야 사내들은 떠들어대는 것을 멈추고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롯시가 막 프레일을 거머쥐던 털복숭이 사내의 턱 밑에 검을 박아넣으며 딜레인의 공격에 호응해왔다.

“커헉!!”

두 번째 사내의 죽음은 아직 방심상태에 있던 사내들을 패닉상태로 몰아버렸다. 긴장도 하기 전에 갑작스레 그들이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벌써 두 명이 죽어버리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사내들을 옭죄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내의 죽음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푸학---!!!
추핫---!!!
츄르르릇--!!!

“커헉!!”
“끄윽!!”
“크아아악!!”
“?!!”

그들이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느새 여덟명의 사내들이 식당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목이 잘리거나 급소가 예르하게 꿰뚫린 시체들이었다. 반항의 흔적같은 것은 없었다. 놀라운 표정을 짓던 그대로 입가가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하던 모습으로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 뿐이었다.

“어엇!!”
“뭐... 뭐야?”
“마... 막아!!”
"어어어어어....!!“

카캉--!!
취르르르륵--!!
카라랑--!!
캉--!!

정신을 차린 사내들의 외침과 함께 처음으로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실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지 살아남은 사내들이 무기를 들어 롯시와 딜레인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두 사내가 롯시와 딜레인의 공격을 막아내자 겨우 숨을 돌린 듯 다른 두 사내가 보다 약해보이는 딜레인을 협공해왔다. 한 사람을 집중공격해서 쓰러뜨린 다음에 다음 상대를 공격하려는 의도인 듯 했다.

하지만 상대가 안좋았다. 의도는 좋았지만 그들의 전략이 맞아들어갈 상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롯시에게 한 명이 달려든 것이 치명적이었다.

“크악--!!”

사내들이 역습을 시도한 것과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롯시의 검이 자신을 막아가던 사내의 프레일을 쳐내며 사내의 팔꿈치를 검으로 깊게 베어버린 후 여세를 몰아 사내의 왼쪽 가슴을 강하게 쩔러버린 것이다.

푸학---!!

롯시의 손목이 가볍게 비틀리자 사내의 가슴에 박힌 검이 뽑혀나오며 선홍색의 뜨거운 피가 긴 선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롯시는 핏줄기를 몸을 비켜 피하며 딜레인을 공격하고 있는 사내들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크악!!”
“커헉!!”
“큭!!”

그녀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딜레인의 싸움은 끝나있었다. 세 명의 사내는 딜레인의 검에 각각 관자놀이와 턱밑, 목젖을 꿰뚫린 채 바닥을 붉은 피로 적시고 있었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단 한순간, 단 한 번의 검놀림으로 세 명의 급소를 모두 공격한 것이었다.

“와아~~ 대단하다. 딜레인. 어떻게 한 번에 세 곳의 급소를 찌를 수 있었던 거지?”

롯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딜레인의 검술에 대한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공격은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공격했는지 그녀로서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머저리들이었어. 검의 이동경로에 나란히 급소를 내밀고 달려들다니. 조금 넓혀서 공격해왔으면 조금 힘들었을텐데.”

딜레인의 쉬운 말과는 달리 롯시는 여전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세 사내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결코 한 방향으로 몰려 공격했다 할 정도로 붙어서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급소를 나란히 내밀고 달려왔다고 말하다니. 롯시는 딜레인이 자신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살 아래의 사촌동생이었지만 검술에 있어서만큼은 그녀가 도저히 미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딜레인.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걸. 도대체 어떻게 세 개의 다른 급소를 하나의 흐름 안에 둘 수 있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 넌 정말 대단해.”
“홋... 이제 알았어? 난 원래 대단하다구.”
“흥~~!!”

롯시의 칭찬이 기분 좋은지 딜레인은 허리에 손을 올린채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롯시는 아니꼽다는 듯 딜레인의 그런 모습을 살짝 흘겨보았다. 조금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정겨운 눈빛, 평소 딜레인을 바라보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딜레인도 그런 롯시의 눈빛에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보여주었다.


칸피니스는 둘 사이가 다시 회복된 것을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좋아. 감정은 이제 다 풀린 모양이구나.”
“흥!! 원래 감정따윈 없었다구요.”
“그래요. 딜레인이 어린애처럼 투정 부린 건데, 그정도야 언니인 내가 이해해줘야죠.”
“오호... 삐져서 아빠에게 투덜대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롯시 언니?”
“호호호... 그거야 다 작전이었단다.”
“호홍... 분명 그때 울려 하고 있었는데?”
“언제? 언제?”
“분명 울려 하고 있었어. 내가 마차 안을 들여다 봤을 때 분명 눈이 빨개져 있었다구.”
“그... 그건... 삼촌이...”

말싸움은 계속되었지만 아까와 같은 살벌함이나 경직됨은 없었다. 평소와 같은 유쾌하고 뒤끝없는 말싸움이었다. 칸피니스는 크게 웃으며 자신의 딸과 조카를 안아주었다. 딜레인과 롯시도 칸피니스를 따라 웃으며 그의 품에 깊숙이 몸을 기대어왔다.



“아빠, 저건 뭐죠?”

롯시와 딜레인을 안은 채 등을 쓰다듬고 있던 칸피니스를 테이블에 앉아있던 펠린이 불렀다. 칸피니스가 돌아보니 펠린이 사내들이 앉아있던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요. 저거. 저 더러운 천뭉치.”

테이블 아래에는 펠린의 말대로 더러운 천뭉치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천뭉치가 뭐?”
“움직였어요.”
“움직여?”
“예.”
“흐음...”
“사람... 같아요.”
“사람?”

칸피니스가 놀란 듯 반문하자 펠린이 고개를 끄덕여 확인해 주었다. 칸피니스는 조심스럽게 사내들이 앉아있던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저녀석들 인신매매길드 소속인 것 같았어요.”
“인신매매길드?”
“예.”

롯시의 말은 확신에 차있었다. 칸피니스는 롯시가 확실하지 않은 일에 이렇게 확신을 말하는 경솔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확신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확실한 사실일 터였다. 칸피니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저 천뭉치는 인신매매길드에서 납치한 사람인걸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12명이나 되는 놈들이 돈도 안되는 천뭉치를 들고다닐 일은 없을테니까.”
“12명이나 움직인 일이로군요. 고작해야 아이 하나 크기의 저 천뭉치를 위해서.”
“그래. 12명이나 저 작은 천뭉치를 위해 움직였어. 작은 일은 아닌 것 같구나.”
“확인해봐요. 삼촌.”
“그러자꾸나.”

롯시의 말에 칸피니스는 서둘러 탁자 밑에 놓여진 천뭉치를 들어올렸다. 그의 짐작대로 천뭉치는 사람이었다. 너무도 더러워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날 것 같은 더러운 아이였다. 언제 감았는지 알 수 없는 기름때로 뒤엉킨 머리카락과 원래 피부색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때로 뒤덮인 얼굴을 보고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색마 칸피니스 뿐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여자아이였다. 그것도 꽤 귀여울 것 같은.

“아아... 아...”

칸피니스가 여자아이의 뺨을 쓰다듬자 여자아이의 눈이 힘겹게 뜨여졌다. 힘없이 뜨여진 눈은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자신을 들어올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라보기만 할 뿐 눈앞에 누가 있는가는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오래 굶주렸나봐요, 삼촌.”

롯시는 아이의 모습이 안되어 보였는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땟국물이 묻어 끈적거리는 것이 기분나빴지만 아이의 힘없는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정성스럽게 자신의 기를 담아 아이의 뺨과 눈을 쓰다듬어주었다.

“아... 아... 아...”

그녀의 손으로부터 기가 전해졌는지 아이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아이는 겨우 초점이 잡힌 눈으로 한동안 롯시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롯시는 아이의 눈에 힘이 돌아오는 것이 기뻐 손을 옮겨 기름때로 엉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를 통해 스며든 기의 영향으로 아이의 눈빛이 더욱 또렷해졌다.

“카... 카...”

아이는 한동안 롯시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들어올리고 있던 칸피니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아이의 더러움이 싫은 듯 멀찍이 떨어뜨려 들고 있던 칸피니스는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자 몸을 움찔했다. 아이의 순수한 눈에 더러운 것이 싫다고 멀리 띄워놓고 들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는지 칸피니스는 아이를 자신의 품에 가까이 안아갔다. 보다 가까이에서 칸피니스를 보게된 아이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여졌다.

“놀라지마렴. 이래뵈도 사람이니까. 오거가 아냐.”
“롯시!!”
“2미터 20센티미터짜리 거구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거라고 착각한다구요. 아이도 아마 그것 때문에 놀란 걸거에요.”
“아무리 그래도 오거는...”
“오거 맞잖아? 항상 자랑하면서 오거의 자지, 오크의 정력이라고...”
“딜레인!!”
“어쨌든 오거가 싫은 건 삼촌 사정이고 얘는 삼촌을 오거라 보고 놀랐을 거라구요. 애가 놀라지 않도록 달래주는 게 우선이에요.”
“롯시!!”
“맞아요. 맞아!”

기회가 왔다는 듯 놀리는 롯시와 딜레인은 호흡을 맞추가며 칸피니스를 확실히 놀려주었다. 칸피니스는 자신이 조카와 딸의 공격에 반격도 제대로 못해보고 오거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오거가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로오...”
“ㅋ.... ㅎ.... ㄴ....”

분노와 불만을 담아 롯시를 부르려던 그를 말린 것은 힘없는 숨소리였다. 분명 말소리였지만 너무도 가늘어 숨고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뭐? 다시 말해봐.”

롯시는 아이가 말을 하려 하자 급히 아이에게 다가가며 손에 모은 기의 양을 늘여갔다. 많은 기가 아이의 머리로 전해지며 피의 흐름을 돕자 아이의 목소리가 보다 분명하게 들려왔다.

“카... 히... 니... 수.... 데... 키... 혜... 류... 자... 작...”
“엑?”

발음이 불명확하기는 하지만 분명 칸피니스, 델킨피에르 자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롯시는 물론이고 딜레인과 칸피니스까지도 놀라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데... 키... 히... 에... 르.... 자... 작... 도... 도와... 도와...”

“델킨피에르 자작? 여기 델킨피에르 자작님을 말하는 거니? 그리고 도와달라고?”
“도... 도와... 도와...”

기를 주입했음에도 너무 오래 굶은 탓인지 아이는 그저 도와달라는 말만 부정확한 발음으로 반복할 따름이었다. 칸피니스의 정체를 알아보고, 도움을 청하는 아이의 모습에 롯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분명 칸피니스 삼촌을 알아봤어요. 그리고 삼촌이라는 걸 확인하자 도움을 청했구요.”
“그렇구나.”
“누굴까요? 아빠를 알아보고 도움을 청할 어린아이라면...”
“귀족일까? 하지만 귀족이 이런 모습을 할 리가...”
“내가 아는 귀족 가운데 최근에 여자아이를 이런 꼴로 만들만한 처지가 된 귀족은 없다.”
“그렇다면 누구죠? 평민의 아이가 귀족을 보자마자 도움을 청하지는 않는다구요? 아무리 어려도 그렇게 간큰 평민은 없어요.”
“흠...”

아이는 힘이 다한 듯 그대로 눈을 감으며 늘어져버렸다. 아마도 탈진으로 인해 기절한 모양이었다. 탈진한 몸에 기를 주입해봐야 몸만 상할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롯시는 기를 주입하는 것을 중단하고 칸피니스로부터 아이를 받아 안아들었다.

“중요한 건 이 아이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거에요. 우선 이 아이를 살리고 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자구요.”
“그게 낫겠네요. 괜히 억지로 알아내려 애쓸 필요 없이 이 아이가 깨어나서 말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흠...”
“그렇게 해요. 칸피니스 삼촌. 이 아이를 일단 깨어나게 하자구요. 그 다음에 어떻게 칸피니스 삼촌을 알아볼 수 있었고, 도대체 어떤 도움을 청하려 했는지 물어보구요.”
“그래요, 아빠.”
“흠... 그게 가장 좋겠구나. 그렇게 하자.”
“고마워요. 아빠.”
“고마워요, 삼촌.”
“고마울 것 없다.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두요...”

칸피니스는 자신의 결정에 고마워하는 딸과 조카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준 후 생각에 잠겼다. 그로서도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을 알아보고 도움을 청하는 여자아이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어디에도 지금 롯시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고 있는 여자아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가 스스로 기억해낼 수 없는 이상 별 수 없이 여자아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칸피니스는 아이를 조금이라도 빨리 깨우기 위해 피레샤츠의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라면 탈진한 아이의 기력을 회복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피레샤츠!”

칸피니스의 부름에 허공에서 하나의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칸피니스의 발밑에 부복하고 있는 물체의 정체는 알몸의 엘프였다. 녹회색의 피부와 녹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무채색의 엘프. 섀도우엘프 피레샤츠였다.

섀도우엘프의 특수능력은 몸의 색을 바꾸어 주위와 시각적으로 동화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 능력은 옷까지 색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능력을 사용할 때에는 모든 옷을 벗고 있어야 했다. 피레샤츠가 알몸인 이유 또한 그녀의 섀도우엘프로서의 능력때문이었다. 칸피니스의 호위를 맡은 그녀였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의 주위에 머물기 위해 항상 옷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이 아이를 깨어나게 할 수 있겠나?”

피레샤츠는 칸피니스의 물음에 몸을 일으켜 롯시에게 안긴 아이를 살펴보았다. 녹색으로 몸을 빛내며 아이를 살피던 피레샤츠는 곧 칸피니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살펴본 바를 보고했다.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예!”

피레샤츠의 대답에 롯시와 딜레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엘프가 하는 말인 이상 두 시간이면 아이가 깨어날 수 있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일단 아이를 목욕부터 시키도록 하자. 아이를 치료하는 건 그 다음에 하도록 하고.”
“예, 삼촌.”
“예, 아빠.”
“딜레인 너는 여관주인에게 여기 시체들을 치우도록 하고, 아이를 씻을 물을 갖다달라고 해라.”
“예. 아빠”
“롯시는 피레샤츠와 함께 아이를 방으로 데리고 올라가도록 하고.”
“예, 삼촌.”
“나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저 식사를 하고 따라 올라가겠다.”
“예.”

칸피니스는 롯시가 피레샤츠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며 아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뚫어지게 살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피레샤츠가 아이를 깨어나게 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기다리는 것에 익숙지 않은 칸피니스였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칸피니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자들이 기다리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일이라 생각하며 잊어보려 했지만 호기심은 마치 독약처럼 그의 머리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의문에 사로잡힌 채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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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화는 왠지 흥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쓰는데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음회 예고>> 거지소녀는 칸피니스에게 의뢰를 해온다. 생각지도 못한 의뢰비에 칸피니스는 의뢰를 승낙하는데... 과연 이번회에는 와르디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인가?

본편과 예고편의 차이는 작가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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