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èsistance - 1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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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네오스의 왕도에선 일대의 큰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2만이 넘는 귀환자 행렬도 행렬이었지만, 그들을 호위하며 함께 입성하는 잉그라드의 황금 기사들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로 큰 소요가 야기되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군사들이 경비를 단단히 서고 있었지만, 구름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군사들을 애먹였다.
“우와…, 저거 말이야?”
“저 뿔 달린 것 좀 봐. 저게 혹시 유니콘 아닐까?”
“갑옷이잖아, 바보야~.”
“끝내준다. 쟤네가 진짜 그 잉그라드에서 왔다고?”
“저 앞에 가는 키 큰 여자가 거기 황녀래.”
“예쁘다….”
“침 닦어, 이 사람아. 아무리 봐도 자네 차지 될 계집은 아닐세.”
“아, 꿈 꾸는 데 돈 드나…?”
왕궁의 입구에 다다른 그들은 행렬을 멈추고 경계태세를 정비했다. 리타는 오른쪽에서 조금 처진 채 따라오던 우탐파 대장을 향해 고개짓을 했고, 우탐파는 언월도를 쳐들고 군령을 내렸다.
‘전원 사방경계. 나바스 암바라 중 3인은 황녀 전하를 수행한다.’
‘사방경계…!!’
대체 어떻게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복명복창 소리는 나직하지만 왕궁 앞 광장 전체를 진동시켰다. 곧이어 오백 기 남짓한 만샤르차크가 사방으로 퍼지며 일사불란하게 경계 태세를 갖추는 모습이 무척 장관이었다. 천여 명의 나바스 암바라도 빠르게 그들 사이사이로 자리하며 경계 태세로 들어갔다. 이 모습을 성루에서 보고 있던 레이네는 저도 모르게 와…하고 탄성을 자아냈다. 그녀로서도 잉그라드의 황실 친위대는 말만 들어본 터였다.
“과연…, 소문대로네. 저 앞에 있는 저 커다란 여자가 그 황녀인가보지?”
“그렇다고 합니다, 공주님.”
“…, 가자.”
“그런데 공주님.”
“응, 왜?”
“공주님께서 직접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신단의 귀환길이잖습니까.”
“흠… ….”
이례적으로 그녀에게 조언을 하려 드는 사뇰을 레이네는 웬일이냐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에반더는 넌 이제 죽었다…하고 속으로 되뇌었으나, 이어지는 레이네의 대답에 오히려 크게 놀랐다.
“국왕도 저 자리에 나간다. 너 같은 노예들이야 권위를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직접 나가는 것으로 사절단 신하들의 마음을 얻는 거다. 두 번째는 직접 귀환하는 시민들을 만나보면서 국왕이 시민들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지지를 얻는 거야. 알겠어?”
“예, 공주님.”
“이제 가도 되겠지?”
에반더는 질투가 나서 이를 꾸욱 악다물었다. 웃는 낯 한 번 보였다고 자신에게는 그토록 모욕을 하더니, 사뇰은 건방지게 조언을 하겠다며 나섰는데도 그에 대해 해명을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공주를 뒤따르는 에반더의 표정이 독하게 굳어졌다.
그들이 왕궁 광장에 도착했을 무렵 국왕도 나와 있었다. 대신들이 그녀를 보고는 예를 올렸고, 공주도 국왕을 향해 예를 올린 뒤 그 일행들 속에 자리했다.
“이야기 들었다….”
“예….”
“그것만으로 되겠느냐…?”
“…두 명이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미키네오스를 제외하면 유명무실하니까요.”
“… ….”
“안 그렇습니까, 폐하…?”
“…. 그렇군…. 계속 애써주려무나.”
“예, 폐하.”
나직한 말로 나누는 그들의 이야기는 윌토르 대주교와 비센테 추기경에 관한 것이었다. 바루나가 사상적 통일을 기치로 나라 재건에 나서면서 교총이 권위를 다시 세우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키네오스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미키네오스 왕도 대교구의 추기경과 대주교만 잡아둘 수 있으면 나머지를 장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레이네가 짚어낸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대국의 황녀답군….”
융베리의 오른쪽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리타를 보며 바루나가 중얼거렸다. 차림새는 아슈람의 빅쿠였으나, 그녀가 가진 기품은 보통의 수행자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레이네는 불현듯 그녀로부터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국왕 폐하…!!”
사절단 일행은 그 앞에 서자마자 통곡하듯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침통한 어조로 레몽 도메네크의 유고와 호위대의 전멸을 전했다.
“그래…, 도메네크 경의 시신은…?”
“송구합니다, 폐하…, 마도의 무리들에게…너무나 처참하게 당해….”
국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옆에 늘어선 대신들의 표정도 착잡했다. 라크라오스만이 아무 동요가 없었다. 국왕은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외무차장의 앞에 손을 내밀며 위로했다.
“되었으니 그만 일어들 나게. 도메네크 경의 죽음은 비통하기 그지없으나 그대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외무차장은 눈 앞에 내밀어진 국왕의 반지에 키스를 한 후 몸을 일으켰다. 바루나는 융베리와 리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서 오시지요, 융베리 원로. 방향을 잃은 사절단을 이곳까지 잘 이끌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폐하. 길 잃은 자, 신분이야 어떻든 모두 신의 아들들이니, 한때나마 그 권위를 대신했던 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국왕은 담담한 신색으로 이번엔 리타를 향했다.
“대국 잉그라드의 황녀께서 군사를 이끌고 미키네오스의 시민들을 보호하며 이곳까지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나라의 국왕으로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생명은 모두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누어야지요. 국왕 폐하의 후의, 잊지 않겠습니다.”
간략한 답례였다. 대신들 중 몇몇은 약간 얼굴이 굳어졌으나, 국왕의 표정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했다. 여기서 보니 정말 대단합니다. 론지니아의 그 무훈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폐하. 음…. 병부대신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라크라오스의 말이 리타의 신경을 살짝 긁어놓았다.
“대국의 군사 통제가 매우 뛰어난 것 같습니다. 황녀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우리 군에서도 한 수 배울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병부대신의 말이 옳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바루나는 웅성거리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왕궁 광장에 모여든 무수한 인파가 국왕의 말을 듣기 위해 일순 조용해졌다. 야, 국왕 아니야? 직접 나왔네? 아, 조용히 해봐~ 지금 뭔 말 하려고 하잖아. 햐…, 귀환자들 챙기려고 온 거야? 조그맣게 수군거리는 시민들의 눈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자 국왕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들으라. 신의 뜻에 따라 세워진 위대한 미키네오스의 시민들이 다시 짐의 품으로 돌아왔느니라. 오늘부터 이들 모두는, 여기 모여든 그대들과 똑같이 짐의 자식들이다. 경계하고 의심하거나 핍박하지 말 것이며, 서로 아끼고 사랑하여 위대한 미키네오스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모두가 마음을 모아주기를 당부하노라.”
근위장이 앞으로 나서서 만세를 선창하자, 근위대 전원이 직검을 하고는 복창하며 국왕과 미키네오스의 영광을 외쳤다. 이어 모든 시민들이 함께 만세를 외치며 국왕의 덕을 찬양했다. 리타는 아하…, 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식으로 민심을 끌어오는 방법도 있었구나. 여기서 하나 배운다.
“정무 부총관이 귀환자들을 인솔하도록 하게. 근위장이 돕고. 들어가시지요. 공주가 황녀를 객궁으로 모시지.”
“예, 폐하.”
융베리는 리타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국왕을 따라 대전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리타는 돌아서서 우탐파 대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약간 불쾌한 안색이 되었다. 공주가 황녀를 객궁으로 모시라는 국왕의 말이 있었으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야 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면 자신에게 양해라도 구해야 했다. 그저 하루 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일개 아낙도 아니고 황녀라면 그런 격식을 차릴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황녀의 행동에선 자신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자신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모양새가 다분했다.
‘전원 해산. 무장을 풀고 대기한다.’
‘대기…!!’
근위대의 군사들과 재무 부총관을 비롯한 이들이 광장으로 내려가면서 동시에 만샤르차크와 나바스 암바라가 신속하게 대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리타는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돌아서서 얼굴이 굳어 있는 공주에게로 다가와 섰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황녀가 앞에 오자 레이네는 조금 위축되는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설 뻔했다.
“귀환자 행렬 속에 섞여 온 제 친구가 있는데, 함께 객궁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황녀의 친구라면 고귀한 분이 아니십니까? 어떻게 시민들과 어울리게 둘 수 있겠습니까?”
리타는 뒤를 다시 돌아보며 하백을 향해 고개짓을 했다. 레이네의 눈길도 그녀를 따라갔다. 긴 검을 찬 미소년이 비사카를 비롯한 두 명의 나바스암바라 병사들과 함께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 레이네의 눈길이 꽂히듯 고정되었다. 보기 드문 미소년이었다. 그보다, 곧고 당당한 몸가짐과 발걸음이었다.
“이들은 내 호위를 맡을 것입니다. 인사해. 미키네오스의 왕녀님이셔.”
“하백이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깊이 숙이며 인사하는 예법도 미키네오스의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공손한 태도를 담고 있었다. 레이네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그를 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는 그들을 안내했다.
“대국의 황녀님의 친구분이시라니, 고귀한 분을 뵙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아니, 전….”
‘고귀한 신분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려는 하백을 리타가 제지했다. 하여튼 순진해 빠져갖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리타의 눈길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 잉그라드…라고 했나?”
“그렇다고 합니다.”
“대단하더군. 그 기백하며 기품하며….”
“공주님 선에서 제대로 다룰 수 있겠습니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어려울 것입니다.”
“…, 그렇겠지….”
융베리를 비롯한 사신단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물러간 뒤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서 바루나는 병부대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재무 부총관은 왜 안오는가? 잠시 부처에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기다려 보시지요. 바루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말을 아꼈다.
“폐하께서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 황녀 말인가?”
“예.”
바루나는 허허허 하고 나직하게 웃었다.
“이 천하의 바루나가 말인가?”
“예.”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라크라오스의 답변에 이어 재무 부총관이 왔다는 기별이 왔다. 들라.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플로랑은 국왕으로부터 질문을 받아야 했다. 이보게, 부총관. 예, 폐하.
“자네가 보기에도 내가 황녀를 당해내기 힘들 것 같던가…?”
“…, 그 무슨 뜻으로 물어보시는 것인지….”
“말 그대로일세. 일단 앉지.”
그가 앉는 동안 바루나의 말이 이어졌다. 대국의 황녀인만큼 만만한 사람이야 아니겠지, 당연히. 그런데 20년 넘게 정치를 해 온 내가 내 딸보다 어려보이는 그깟 황녀 하나를 주무르지 못한다는구먼, 여기 병부대신이…? 자네 생각은 어때? 자네가 보기에도 호락호락하진 않던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말에 부총관은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가라앉혔다.
“말씀하신대로 황녀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같았다만…?”
“제가 알기로 폐하께서도 보통 분은 아니십니다.”
그 말에 바루나는 크게 웃어제꼈고, 좀처럼 안색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라크라오스도 함께 웃었다.
객궁에선 리타와 하백, 그리고 레이네가 함께 자리를 갖고 있었다. 셋은 차와 다과를 차려놓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레이네는 아까보다 한결 풀어진 듯 말투도 격식을 조금 내려놓은 상태였다.
“황녀께선 저보다도 어리셨군요. 깜짝 놀랐어요. 저보다 훨씬 크셔서 두세 살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렇게 치면 여기 하백은 제 아들을 해도 될 겁니다. 저보다는 키가 작으니까요.”
“… ….”
하백만이 말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며 친구처럼 지내 온 리타가 멀리 있는 대륙을 평정한 제국의 황녀임을 알고 난 후부터 그는 귀환자 행렬에 끼어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하백 님께선 기사님이신가봐요. 검을 차고 계시네요.
“아 전…카마산이었습니다.”
“카마산…? 카마산이 뭐죠?”
“…, 아슈람에서 무예를 배우는 수행자들을 카마산이라고 합니다.”
“아하…. 그럼 무예를 배우지 않는 사람들은 또 따로 명칭이 있나보죠?”
“…예, 빅쿠라고 부릅니다.”
“네에….”
레이네가 조금 풀어진 말투로 대하고는 있었지만, 분위기는 좀처럼 편안해지지 않고 있었다. 은근히 긴장된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하백은 리타와 어색했고, 리타는 레이네와 그다지 가까워지고 싶은 기색이 없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 구구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아 보아야 큰 소득이 없을 것이었다. 레이네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따가 연회를 열까 하는데, 두 분을 모시고요.”
“고맙습니다.”
“우리 셋이서요. 괜찮으시죠?”
“…, 예…, 예….”
하백은 무척이나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고, 레이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럼, 곧바로 시종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며 즐거운 시간이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지체없이 객궁을 나섰다. 왕궁 후원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레이네의 얼굴은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잉그라드의 황녀…, 만만치 않겠어….
공주가 돌아간 객궁 응접실 안에선 어색함이 가득했다. 하백은 리타가 잉그라드의 황녀임을 안 후 그녀와 처음으로 단 둘이 자리를 가져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몸 둘 바를 몰라 어물거리고 있는 그의 귀로 리타의 말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 잉그라드….”
“…예, 예…?”
“그게 내 진짜 이름이야. 리타는 폐하께서 붙여 준 애칭이고.”
“…아, 예….”
“그렇게 주눅들어 있을 것 없어.”
“… …. 저…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데, 리타가 서한 하나를 꺼내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이게 뭡니까? 리타는 말없이 찻잔을 기울이며 그에게 열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너에 대한 거야.”
서한을 펼쳐보는 하백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것은 융베리가 하백에게 남긴 서신이었다.
‘하백 보거라. 이 서신을 받으면 너는 더 이상 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네게 네 부모님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이렇게 서신을 쓴다. 너는 카마산들의 수장이었던 자와카에게도 그러했지만, 내게도 각별한 제자였다. 네게는 특별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
융베리는 이 서신을 이틀 전 리타로부터 바루나의 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 은 그 날 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고민하던 차에 쓴 것이었다. 왕도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하백이 그를 찾아왔다면 모를까, 하백의 성격으로 보아 그럴 리는 없었고, 그렇다면 그가 하백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없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네 성격으로 보아, 너는 곧고 올바른 마음을 가졌으되 지나치게 격식과 원칙에 얽매이는 것이 약점이다. 그 점을 염려하여 알려주는 것이니, 스스로의 신분과 출신에 자신감을 갖거라.
네 돌아가신 아버님은 본래 환의 제후국인 하백의 단군이셨다. 환의 군주인 환인천황은 9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북방 타림 대륙의 주인이셨다. 그 위대한 제국에서 하백은 바다보다 넓은 바이칼 호수를 오가는 무역선들에 대한 치안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1천 4백년간이나 했었다. 환이 멸망하던 그 지옥같은 살겁 속에서 살아남은 네 부모님은 살아남은 신민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멀리 아슈람으로까지 오셨다. 그러는 길에 많은 신민들과, 또한 바다 위에서 너를 낳았던 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네가 갖고 있는 그 검은 자와카가 네 아버지로부터 받아 사용하던 검이다. 자와카는 네 아버지이신 단군 숭모께서 직접 몇 가지의 무예를 가르치셨다. 세월이 지나 네가 그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겠으나, 네가 익힌 모든 것들이 환의 무예와는 그 근본을 다르게 한다고 하니 나로서도 안타깝기가 그지없구나. 그러나 무예가 같아야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복색과 생활양식이 같아야 뿌리를 찾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익힌 무예로도 충분히 단군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고, 네가 가진 올곧은 마음과 굳건한 기상은 어떤 곳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너는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아이다. 아슈람에선 신분과 출신이 아무 의미가 없지만, 이제 세상에 나온 너는 그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자신을 갖거라.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어느 곳에서든 찾아오는 기회를 마다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돌아보기를 게을리 하지 말거라. 뜻하는 모든 일에서 네가 길을 잃지 않기를 신께 기도하마.’
“미키네오스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 거라고 생각해.”
서한을 읽은 하백이 뭔가에 얻어맞은 듯 말없이 경직되어 있는 동안 리타가 그에게 조언이라도 하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국왕과 대신들, 게다가 내가 보기엔 왕녀도 거기에 끼어있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신중해야 돼. 내가 여기에 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정치는 더러운 곳일수록 배울 것이 많은 법 아니겠어.”
“….”
“진정 좀 되고 나면 씻고 쉬어. 먼저 일어날게.”
이 날 저녁, 하백은 왕궁 후원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은 해놓고도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 무희들이 춤을 추며 흥을 돋우고 있었지만, 이따금씩 레이네와 눈이 마주칠 적에 슬쩍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좀처럼 무거운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리타는 그런 그에게서 아예 신경을 끄고 있는 듯, 무희들의 춤과, 공주가 마련한 음식들에 희색을 보이며 마음껏 연회를 즐기는 듯했다.
“연회를 열어…?”
“예, 폐하.”
“… ….”
만찬장으로 나가던 국왕은 병부대신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일단 간보기 정도인가…? 그렇겠지요. 내버려 두기로 했다. 황녀를 공주가 이용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곳에서 황녀가 무슨 일을 도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친위대가 움직인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국왕은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러니 일단 지켜보자고. 어떻게 되는지….”
“그러다 공주께서 실수라도 하시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실수라도 하게 된다…, 그러면….”
“….”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 그러시지요.”
둘은 이후 말없이 만찬장으로 향했다. 근위장을 비롯한 근위무사 몇이 그 뒤를 따랐고, 만찬장으로 향한 회랑에 나서기 직전 멈추어 섰다. 여기서부터는 라크라오스가 먼저 가야 했다.
“내가 지독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 …, 그럴 때. 아비 노릇 하겠다는 말 한 번 꺼내지 않는 내가…. 지독하다고 생각지 않느냔 말이네.”
“…. 그럴 때면 폐하께선 항상 해 오셨습니다.”
“….”
라크라오스는 입가에 쓴웃음을 올리는 바루나에게 목례를 하고는 먼저 회랑으로 나섰다. 먼저 그가 나선 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국왕이 근위장을 불렀다.
“예, 폐하.”
“자네 나이가 올해 몇인가?”
“서른 다섯이 되었습니다.”
“서른 다섯이라…. 내 나이는 마흔 하고도 두 해가 더 지났다네.”
“….”
“이제 앞으로 10년에서 15년 정도 남았는가….”
“…, 무슨….”
“내 명줄 말이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
크게 당황하는 근위장에게 바루나는 쿡쿡 웃는 소리를 들려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원래 왕이란 작자들은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네. 폐하…! 세상의 좋은 거란 좋은 건 다 찾아다 식단에 올리기로 유명했던 발루아 왕가의 왕들도 갈수록 수명이 짧아져서 오십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선왕들이 여럿이었네. 황망한 표정으로 몸둘 바를 몰라 하는 근위장을 돌아보며 바루나가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 이유를 자네는 아는가…?”
“저와 같은 일개 군인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 오래 사는 왕치고 제대로 된 놈은 없어. 그만큼 피곤한 자리란 말일세.”
“폐하…!”
“보게. 이렇게 밥 먹으러 가는 것만 해도 생각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은가.”
“….”
“가세.”
“황녀께서 즐거워하시니 저도 무척 기쁩니다. 이런 연회는 처음이시지요?”
“네, 처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리타는 활짝 웃으며 레이네의 호의에 화답했다. 하백도 간간이 웃어보이며 대충 분위기를 맞추고 있었다. 한데…, 황녀님의 친구분께선 그리 즐겁지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아, 아닙니다. 무척…새롭고 좋습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리타도 웃어버렸고, 레이네는 뭐 저런 대답이 다 있나 하는 얼굴을 했다가 이내 다행이라며 모른 척 넘어갔다.
“하백님이시라고 했죠?”
“예, 공주님.”
“저는 레이네입니다. 레이네 마리 부르노아 비클멘.”
“레이네… 마리… 부르노아 비클멘.”
“비클멘 왕가의 26대손입니다. 미키네오스의 개국 가문이기도 하죠.”
“뿌리가 깊은 왕가로군요.”
“황녀님께서도 이름을 알려주셔야죠. 어서요.”
“아. 미안해요. 전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 잉그라드입니다. 딱히 가문이랄 건 없지만, 오르페이아 집안이라고 하지요. 잉그라드는 황위를 이어받을 사람들의 이름에 항상 따르게 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리토르나 황녀께선 다음 황위를 계승하시는군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겁니다.”
“미리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드실까요?”
레이네를 따라 둘 다 잔을 들었다. 리타나 하백이나 둘 다 술을 마셔본 일은 없었지만, 이참에 한 번 마셔보자는 생각으로, 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각각 잔을 들고 함께 마셨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이번에 전쟁을 하게 될 수도 있어요.”
“…. 그렇겠지요. 미키네오스의 정무대신이시라고 했던가요? 변고를 당하셨던 분이….”
“아시는군요. 게다가 개국 공신가문 출신이십니다.”
“그렇군요….”
리타의 눈빛이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레이네는 그것이 애도하는 뜻이리라 생각하며 크게 개의치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나라의 큰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응징을 해야겠지요. 부왕께서 크게 상심을 하셨답니다.”
“그러셨겠지요. 오랫동안 함께 국정을 이끄신 분이셨을 테니….”
“네, 그래서 이번에 기필코 론도 산맥에 있는 마도의 무리들을 뿌리뽑겠다며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
슬슬 운을 띄우기 시작하는 레이네. 리타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론도 산맥은…, 또한 잉그라드령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일부는 그렇지요. 워낙에 거대한 산맥이다 보니….”
“그래서 부왕께선 동시에 염려가 크십니다. 행여 잉그라드와 같은 대국과 외교적인 마찰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흠…,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군요.”
짐짓 동의하며 ‘미처 몰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리타는 레이네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하자 얼른 선수를 쳤다. 하지만 개국 공신가문 출신의 대신께서 돌아가셨는데 응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습니까. 역시 이해해주시는군요~! 레이네는 감격했다는 듯 황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눈을 반짝거렸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나라일을 이야기하는 건 적합하지 않지만…, 저도 다음 왕위를 이을 왕녀이다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황녀께서도 이해해주실 수 있겠지요?”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
“외교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저도 염려가 됩니다만. 아시다시피 제가 본국을 떠나 있은 지가 오래 되어서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보니, 뭔가 이 자리에서 공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릴 방법이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머, 세심하기도 하셔라…. 황녀님께선 앞으로 훌륭한 황제폐하가 되시겠습니다.”
“….”
“그렇게 부담 가지실 것 없어요~. 이런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낸 제가 실수를 한 거지요. 따지고 보면 저 역시 그 일을 근심한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우린 같은 처지에 있다고 봐야 되나요…?”
“그런…가요…? 그러네요, 우린 그림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함께 드시지요.”
리타는 웃음으로 화답하며 잔을 들었고, 레이네가 거기에 응했다. 하백님도 함께하시죠. 리토르나 황녀님의 친구분이시면 제 친구도 되셔야지요? 그는 마지목해 잔을 들어 마주쳤다. 속내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리타는 레이네게 한 가지 청을 했다.
“이제 친구가 되었는데 못 들어드릴 게 있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드리지요.”
참 이 나라 사람들 말 길다 싶었다. 어쨌든 리타의 청은 하백에 관한 것이었다. 하백은 하루라도 수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실 객궁 후원이 좀 좁은 것 같아서요. 아하~.
“편안하게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없을까요? 혹시 공주께서 그걸 마련해 주실 수 있는지….”
“화, 황녀님…!”
“하백님께선 무예 수련에 무척 열의가 높으신가봐요. 그런 청이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죠.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서 꼭~! 그 방법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고…고맙습니다, 공주님.”
하백은 얼른 일어나 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 폼으로 보아 아무리 봐도 그는 고귀한 신분은 아니었다.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는 것은 노예들의 전형적인 자세였으니, 레이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께서는 다시 교총 본원으로 복귀할 예정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내일 왕도 교구의 사원에 들렀다가 갈 예정입니다.”
“먼 길 오셨는데 좀 쉬다 가시지요. 그렇게 급하게 가실 이유라도…?”
미셀이 짐짓 만류를 해봤지만 융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단지 귀환자 행렬의 책임자가 변고를 당해서 잠시 대행했을 뿐, 이 곳에 온 건 총회의 원로 자격으로 온 거니까요.”
“곧 앙느쿠테가 열리는데 그거라도 함께하고 가시지요. 명망 높으신 융베리 원로께서 함께하신다면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될 듯합니다만….”
“병부대신의 말대로 하시지요. 이번 앙느쿠테는 특별히 총장 예하께서 직접 주관하시기로 했습니다. 귀환자들도 있고 해서 말이지요.”
병부대신의 권고를 재무 부총관이 거들었다. 총장이 직접 앙느쿠테를 주관한다는 말에 융베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레오가 직접 한다…. 이쯤 되면 이미 교총 자체가 국왕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봐야 했다. 이미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손을 써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하지요.”
대답하는 기색이 사뭇 무거워보였다.
“궁정대신은 원로께서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객궁에 편안하게 모시게.”
“예, 폐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만찬을 마치고 근위대의 안내로 객궁에 돌아온 융베리는 근심에 가득찬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후원에서 리타가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그와 마주쳤다.
“전하….”
“바루나가 붙들던가요…?”
“알고…, 계셨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
“공주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알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보통 고단수가 아니더군요. 아무 이야기도 안 하는 듯하면서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넌지시 알려놓고 제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쩌긴요….”
리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지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때, 술수를 쓰는 사람들은 가장 당황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잘 하셨습니다.”
“그보다 구루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제 여기서 발목이 잡혔으니 선수를 잡는 건 불가능해졌고….”
융베리의 한숨이 깊어졌다.
먼저 왕도 대교구부터 찾아야만 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교총의 실권이 있는 왕도 대교구라도 먼저 가서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앙느쿠테를 총장이 직접 주관한다고 하니, 이미 레오가 거기에 와 있을겁니다. 가서 만나봐야지요….”
“앙느쿠테…?”
“아, 전하께서는 모르시지요. 한 해의 마지막 날 자정에 열리는 예배의식입니다. 미키네오스 왕실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지요.”
“그렇군요….”
“하백은 좀 어떻습니까?”
“… ….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 …. 왜 아니겠습니까.”
“일단…. 하백이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달라고 공주에게 부탁을 해 놓았습니다. 그 아이는 뛰어난 자질이 있으니, 일단 연무장이라도 생긴다면 어떤 식으로든 국왕의 눈에 띄게 될 겁니다.”
“…! 황녀 전하…!”
어느새 두세 수 이상을 내다보고 패를 옮긴 리타에게 융베리는 이걸 감탄해야 할 지 두려워해야 할 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놀라실 것 없습니다. 바이마샤르에서 한율 공에 대해 구루께서 하신 걸 조금 흉내내 봤을 뿐이니까요. 하하하…. 스승보다 제자가 낫군요. 그런가요…?
“우와…, 저거 말이야?”
“저 뿔 달린 것 좀 봐. 저게 혹시 유니콘 아닐까?”
“갑옷이잖아, 바보야~.”
“끝내준다. 쟤네가 진짜 그 잉그라드에서 왔다고?”
“저 앞에 가는 키 큰 여자가 거기 황녀래.”
“예쁘다….”
“침 닦어, 이 사람아. 아무리 봐도 자네 차지 될 계집은 아닐세.”
“아, 꿈 꾸는 데 돈 드나…?”
왕궁의 입구에 다다른 그들은 행렬을 멈추고 경계태세를 정비했다. 리타는 오른쪽에서 조금 처진 채 따라오던 우탐파 대장을 향해 고개짓을 했고, 우탐파는 언월도를 쳐들고 군령을 내렸다.
‘전원 사방경계. 나바스 암바라 중 3인은 황녀 전하를 수행한다.’
‘사방경계…!!’
대체 어떻게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복명복창 소리는 나직하지만 왕궁 앞 광장 전체를 진동시켰다. 곧이어 오백 기 남짓한 만샤르차크가 사방으로 퍼지며 일사불란하게 경계 태세를 갖추는 모습이 무척 장관이었다. 천여 명의 나바스 암바라도 빠르게 그들 사이사이로 자리하며 경계 태세로 들어갔다. 이 모습을 성루에서 보고 있던 레이네는 저도 모르게 와…하고 탄성을 자아냈다. 그녀로서도 잉그라드의 황실 친위대는 말만 들어본 터였다.
“과연…, 소문대로네. 저 앞에 있는 저 커다란 여자가 그 황녀인가보지?”
“그렇다고 합니다, 공주님.”
“…, 가자.”
“그런데 공주님.”
“응, 왜?”
“공주님께서 직접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신단의 귀환길이잖습니까.”
“흠… ….”
이례적으로 그녀에게 조언을 하려 드는 사뇰을 레이네는 웬일이냐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에반더는 넌 이제 죽었다…하고 속으로 되뇌었으나, 이어지는 레이네의 대답에 오히려 크게 놀랐다.
“국왕도 저 자리에 나간다. 너 같은 노예들이야 권위를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직접 나가는 것으로 사절단 신하들의 마음을 얻는 거다. 두 번째는 직접 귀환하는 시민들을 만나보면서 국왕이 시민들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지지를 얻는 거야. 알겠어?”
“예, 공주님.”
“이제 가도 되겠지?”
에반더는 질투가 나서 이를 꾸욱 악다물었다. 웃는 낯 한 번 보였다고 자신에게는 그토록 모욕을 하더니, 사뇰은 건방지게 조언을 하겠다며 나섰는데도 그에 대해 해명을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공주를 뒤따르는 에반더의 표정이 독하게 굳어졌다.
그들이 왕궁 광장에 도착했을 무렵 국왕도 나와 있었다. 대신들이 그녀를 보고는 예를 올렸고, 공주도 국왕을 향해 예를 올린 뒤 그 일행들 속에 자리했다.
“이야기 들었다….”
“예….”
“그것만으로 되겠느냐…?”
“…두 명이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미키네오스를 제외하면 유명무실하니까요.”
“… ….”
“안 그렇습니까, 폐하…?”
“…. 그렇군…. 계속 애써주려무나.”
“예, 폐하.”
나직한 말로 나누는 그들의 이야기는 윌토르 대주교와 비센테 추기경에 관한 것이었다. 바루나가 사상적 통일을 기치로 나라 재건에 나서면서 교총이 권위를 다시 세우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키네오스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미키네오스 왕도 대교구의 추기경과 대주교만 잡아둘 수 있으면 나머지를 장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레이네가 짚어낸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대국의 황녀답군….”
융베리의 오른쪽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리타를 보며 바루나가 중얼거렸다. 차림새는 아슈람의 빅쿠였으나, 그녀가 가진 기품은 보통의 수행자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레이네는 불현듯 그녀로부터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국왕 폐하…!!”
사절단 일행은 그 앞에 서자마자 통곡하듯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침통한 어조로 레몽 도메네크의 유고와 호위대의 전멸을 전했다.
“그래…, 도메네크 경의 시신은…?”
“송구합니다, 폐하…, 마도의 무리들에게…너무나 처참하게 당해….”
국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옆에 늘어선 대신들의 표정도 착잡했다. 라크라오스만이 아무 동요가 없었다. 국왕은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외무차장의 앞에 손을 내밀며 위로했다.
“되었으니 그만 일어들 나게. 도메네크 경의 죽음은 비통하기 그지없으나 그대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외무차장은 눈 앞에 내밀어진 국왕의 반지에 키스를 한 후 몸을 일으켰다. 바루나는 융베리와 리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서 오시지요, 융베리 원로. 방향을 잃은 사절단을 이곳까지 잘 이끌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폐하. 길 잃은 자, 신분이야 어떻든 모두 신의 아들들이니, 한때나마 그 권위를 대신했던 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국왕은 담담한 신색으로 이번엔 리타를 향했다.
“대국 잉그라드의 황녀께서 군사를 이끌고 미키네오스의 시민들을 보호하며 이곳까지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나라의 국왕으로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생명은 모두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누어야지요. 국왕 폐하의 후의, 잊지 않겠습니다.”
간략한 답례였다. 대신들 중 몇몇은 약간 얼굴이 굳어졌으나, 국왕의 표정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했다. 여기서 보니 정말 대단합니다. 론지니아의 그 무훈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폐하. 음…. 병부대신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라크라오스의 말이 리타의 신경을 살짝 긁어놓았다.
“대국의 군사 통제가 매우 뛰어난 것 같습니다. 황녀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우리 군에서도 한 수 배울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병부대신의 말이 옳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바루나는 웅성거리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왕궁 광장에 모여든 무수한 인파가 국왕의 말을 듣기 위해 일순 조용해졌다. 야, 국왕 아니야? 직접 나왔네? 아, 조용히 해봐~ 지금 뭔 말 하려고 하잖아. 햐…, 귀환자들 챙기려고 온 거야? 조그맣게 수군거리는 시민들의 눈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자 국왕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들으라. 신의 뜻에 따라 세워진 위대한 미키네오스의 시민들이 다시 짐의 품으로 돌아왔느니라. 오늘부터 이들 모두는, 여기 모여든 그대들과 똑같이 짐의 자식들이다. 경계하고 의심하거나 핍박하지 말 것이며, 서로 아끼고 사랑하여 위대한 미키네오스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모두가 마음을 모아주기를 당부하노라.”
근위장이 앞으로 나서서 만세를 선창하자, 근위대 전원이 직검을 하고는 복창하며 국왕과 미키네오스의 영광을 외쳤다. 이어 모든 시민들이 함께 만세를 외치며 국왕의 덕을 찬양했다. 리타는 아하…, 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식으로 민심을 끌어오는 방법도 있었구나. 여기서 하나 배운다.
“정무 부총관이 귀환자들을 인솔하도록 하게. 근위장이 돕고. 들어가시지요. 공주가 황녀를 객궁으로 모시지.”
“예, 폐하.”
융베리는 리타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국왕을 따라 대전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리타는 돌아서서 우탐파 대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약간 불쾌한 안색이 되었다. 공주가 황녀를 객궁으로 모시라는 국왕의 말이 있었으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야 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면 자신에게 양해라도 구해야 했다. 그저 하루 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일개 아낙도 아니고 황녀라면 그런 격식을 차릴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황녀의 행동에선 자신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자신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모양새가 다분했다.
‘전원 해산. 무장을 풀고 대기한다.’
‘대기…!!’
근위대의 군사들과 재무 부총관을 비롯한 이들이 광장으로 내려가면서 동시에 만샤르차크와 나바스 암바라가 신속하게 대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리타는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돌아서서 얼굴이 굳어 있는 공주에게로 다가와 섰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황녀가 앞에 오자 레이네는 조금 위축되는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설 뻔했다.
“귀환자 행렬 속에 섞여 온 제 친구가 있는데, 함께 객궁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황녀의 친구라면 고귀한 분이 아니십니까? 어떻게 시민들과 어울리게 둘 수 있겠습니까?”
리타는 뒤를 다시 돌아보며 하백을 향해 고개짓을 했다. 레이네의 눈길도 그녀를 따라갔다. 긴 검을 찬 미소년이 비사카를 비롯한 두 명의 나바스암바라 병사들과 함께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 레이네의 눈길이 꽂히듯 고정되었다. 보기 드문 미소년이었다. 그보다, 곧고 당당한 몸가짐과 발걸음이었다.
“이들은 내 호위를 맡을 것입니다. 인사해. 미키네오스의 왕녀님이셔.”
“하백이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깊이 숙이며 인사하는 예법도 미키네오스의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공손한 태도를 담고 있었다. 레이네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그를 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는 그들을 안내했다.
“대국의 황녀님의 친구분이시라니, 고귀한 분을 뵙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아니, 전….”
‘고귀한 신분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려는 하백을 리타가 제지했다. 하여튼 순진해 빠져갖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리타의 눈길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 잉그라드…라고 했나?”
“그렇다고 합니다.”
“대단하더군. 그 기백하며 기품하며….”
“공주님 선에서 제대로 다룰 수 있겠습니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어려울 것입니다.”
“…, 그렇겠지….”
융베리를 비롯한 사신단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물러간 뒤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서 바루나는 병부대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재무 부총관은 왜 안오는가? 잠시 부처에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기다려 보시지요. 바루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말을 아꼈다.
“폐하께서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 황녀 말인가?”
“예.”
바루나는 허허허 하고 나직하게 웃었다.
“이 천하의 바루나가 말인가?”
“예.”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라크라오스의 답변에 이어 재무 부총관이 왔다는 기별이 왔다. 들라.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플로랑은 국왕으로부터 질문을 받아야 했다. 이보게, 부총관. 예, 폐하.
“자네가 보기에도 내가 황녀를 당해내기 힘들 것 같던가…?”
“…, 그 무슨 뜻으로 물어보시는 것인지….”
“말 그대로일세. 일단 앉지.”
그가 앉는 동안 바루나의 말이 이어졌다. 대국의 황녀인만큼 만만한 사람이야 아니겠지, 당연히. 그런데 20년 넘게 정치를 해 온 내가 내 딸보다 어려보이는 그깟 황녀 하나를 주무르지 못한다는구먼, 여기 병부대신이…? 자네 생각은 어때? 자네가 보기에도 호락호락하진 않던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말에 부총관은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가라앉혔다.
“말씀하신대로 황녀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같았다만…?”
“제가 알기로 폐하께서도 보통 분은 아니십니다.”
그 말에 바루나는 크게 웃어제꼈고, 좀처럼 안색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라크라오스도 함께 웃었다.
객궁에선 리타와 하백, 그리고 레이네가 함께 자리를 갖고 있었다. 셋은 차와 다과를 차려놓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레이네는 아까보다 한결 풀어진 듯 말투도 격식을 조금 내려놓은 상태였다.
“황녀께선 저보다도 어리셨군요. 깜짝 놀랐어요. 저보다 훨씬 크셔서 두세 살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렇게 치면 여기 하백은 제 아들을 해도 될 겁니다. 저보다는 키가 작으니까요.”
“… ….”
하백만이 말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며 친구처럼 지내 온 리타가 멀리 있는 대륙을 평정한 제국의 황녀임을 알고 난 후부터 그는 귀환자 행렬에 끼어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하백 님께선 기사님이신가봐요. 검을 차고 계시네요.
“아 전…카마산이었습니다.”
“카마산…? 카마산이 뭐죠?”
“…, 아슈람에서 무예를 배우는 수행자들을 카마산이라고 합니다.”
“아하…. 그럼 무예를 배우지 않는 사람들은 또 따로 명칭이 있나보죠?”
“…예, 빅쿠라고 부릅니다.”
“네에….”
레이네가 조금 풀어진 말투로 대하고는 있었지만, 분위기는 좀처럼 편안해지지 않고 있었다. 은근히 긴장된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하백은 리타와 어색했고, 리타는 레이네와 그다지 가까워지고 싶은 기색이 없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 구구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아 보아야 큰 소득이 없을 것이었다. 레이네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따가 연회를 열까 하는데, 두 분을 모시고요.”
“고맙습니다.”
“우리 셋이서요. 괜찮으시죠?”
“…, 예…, 예….”
하백은 무척이나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고, 레이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럼, 곧바로 시종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며 즐거운 시간이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지체없이 객궁을 나섰다. 왕궁 후원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레이네의 얼굴은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잉그라드의 황녀…, 만만치 않겠어….
공주가 돌아간 객궁 응접실 안에선 어색함이 가득했다. 하백은 리타가 잉그라드의 황녀임을 안 후 그녀와 처음으로 단 둘이 자리를 가져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몸 둘 바를 몰라 어물거리고 있는 그의 귀로 리타의 말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 잉그라드….”
“…예, 예…?”
“그게 내 진짜 이름이야. 리타는 폐하께서 붙여 준 애칭이고.”
“…아, 예….”
“그렇게 주눅들어 있을 것 없어.”
“… …. 저…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데, 리타가 서한 하나를 꺼내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이게 뭡니까? 리타는 말없이 찻잔을 기울이며 그에게 열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너에 대한 거야.”
서한을 펼쳐보는 하백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것은 융베리가 하백에게 남긴 서신이었다.
‘하백 보거라. 이 서신을 받으면 너는 더 이상 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네게 네 부모님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이렇게 서신을 쓴다. 너는 카마산들의 수장이었던 자와카에게도 그러했지만, 내게도 각별한 제자였다. 네게는 특별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
융베리는 이 서신을 이틀 전 리타로부터 바루나의 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 은 그 날 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고민하던 차에 쓴 것이었다. 왕도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하백이 그를 찾아왔다면 모를까, 하백의 성격으로 보아 그럴 리는 없었고, 그렇다면 그가 하백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없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네 성격으로 보아, 너는 곧고 올바른 마음을 가졌으되 지나치게 격식과 원칙에 얽매이는 것이 약점이다. 그 점을 염려하여 알려주는 것이니, 스스로의 신분과 출신에 자신감을 갖거라.
네 돌아가신 아버님은 본래 환의 제후국인 하백의 단군이셨다. 환의 군주인 환인천황은 9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북방 타림 대륙의 주인이셨다. 그 위대한 제국에서 하백은 바다보다 넓은 바이칼 호수를 오가는 무역선들에 대한 치안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1천 4백년간이나 했었다. 환이 멸망하던 그 지옥같은 살겁 속에서 살아남은 네 부모님은 살아남은 신민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멀리 아슈람으로까지 오셨다. 그러는 길에 많은 신민들과, 또한 바다 위에서 너를 낳았던 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네가 갖고 있는 그 검은 자와카가 네 아버지로부터 받아 사용하던 검이다. 자와카는 네 아버지이신 단군 숭모께서 직접 몇 가지의 무예를 가르치셨다. 세월이 지나 네가 그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겠으나, 네가 익힌 모든 것들이 환의 무예와는 그 근본을 다르게 한다고 하니 나로서도 안타깝기가 그지없구나. 그러나 무예가 같아야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복색과 생활양식이 같아야 뿌리를 찾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익힌 무예로도 충분히 단군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고, 네가 가진 올곧은 마음과 굳건한 기상은 어떤 곳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너는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아이다. 아슈람에선 신분과 출신이 아무 의미가 없지만, 이제 세상에 나온 너는 그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자신을 갖거라.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어느 곳에서든 찾아오는 기회를 마다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돌아보기를 게을리 하지 말거라. 뜻하는 모든 일에서 네가 길을 잃지 않기를 신께 기도하마.’
“미키네오스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 거라고 생각해.”
서한을 읽은 하백이 뭔가에 얻어맞은 듯 말없이 경직되어 있는 동안 리타가 그에게 조언이라도 하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국왕과 대신들, 게다가 내가 보기엔 왕녀도 거기에 끼어있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신중해야 돼. 내가 여기에 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정치는 더러운 곳일수록 배울 것이 많은 법 아니겠어.”
“….”
“진정 좀 되고 나면 씻고 쉬어. 먼저 일어날게.”
이 날 저녁, 하백은 왕궁 후원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은 해놓고도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 무희들이 춤을 추며 흥을 돋우고 있었지만, 이따금씩 레이네와 눈이 마주칠 적에 슬쩍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좀처럼 무거운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리타는 그런 그에게서 아예 신경을 끄고 있는 듯, 무희들의 춤과, 공주가 마련한 음식들에 희색을 보이며 마음껏 연회를 즐기는 듯했다.
“연회를 열어…?”
“예, 폐하.”
“… ….”
만찬장으로 나가던 국왕은 병부대신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일단 간보기 정도인가…? 그렇겠지요. 내버려 두기로 했다. 황녀를 공주가 이용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곳에서 황녀가 무슨 일을 도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친위대가 움직인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국왕은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러니 일단 지켜보자고. 어떻게 되는지….”
“그러다 공주께서 실수라도 하시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실수라도 하게 된다…, 그러면….”
“….”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 그러시지요.”
둘은 이후 말없이 만찬장으로 향했다. 근위장을 비롯한 근위무사 몇이 그 뒤를 따랐고, 만찬장으로 향한 회랑에 나서기 직전 멈추어 섰다. 여기서부터는 라크라오스가 먼저 가야 했다.
“내가 지독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 …, 그럴 때. 아비 노릇 하겠다는 말 한 번 꺼내지 않는 내가…. 지독하다고 생각지 않느냔 말이네.”
“…. 그럴 때면 폐하께선 항상 해 오셨습니다.”
“….”
라크라오스는 입가에 쓴웃음을 올리는 바루나에게 목례를 하고는 먼저 회랑으로 나섰다. 먼저 그가 나선 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국왕이 근위장을 불렀다.
“예, 폐하.”
“자네 나이가 올해 몇인가?”
“서른 다섯이 되었습니다.”
“서른 다섯이라…. 내 나이는 마흔 하고도 두 해가 더 지났다네.”
“….”
“이제 앞으로 10년에서 15년 정도 남았는가….”
“…, 무슨….”
“내 명줄 말이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
크게 당황하는 근위장에게 바루나는 쿡쿡 웃는 소리를 들려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원래 왕이란 작자들은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네. 폐하…! 세상의 좋은 거란 좋은 건 다 찾아다 식단에 올리기로 유명했던 발루아 왕가의 왕들도 갈수록 수명이 짧아져서 오십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선왕들이 여럿이었네. 황망한 표정으로 몸둘 바를 몰라 하는 근위장을 돌아보며 바루나가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 이유를 자네는 아는가…?”
“저와 같은 일개 군인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 오래 사는 왕치고 제대로 된 놈은 없어. 그만큼 피곤한 자리란 말일세.”
“폐하…!”
“보게. 이렇게 밥 먹으러 가는 것만 해도 생각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은가.”
“….”
“가세.”
“황녀께서 즐거워하시니 저도 무척 기쁩니다. 이런 연회는 처음이시지요?”
“네, 처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리타는 활짝 웃으며 레이네의 호의에 화답했다. 하백도 간간이 웃어보이며 대충 분위기를 맞추고 있었다. 한데…, 황녀님의 친구분께선 그리 즐겁지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아, 아닙니다. 무척…새롭고 좋습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리타도 웃어버렸고, 레이네는 뭐 저런 대답이 다 있나 하는 얼굴을 했다가 이내 다행이라며 모른 척 넘어갔다.
“하백님이시라고 했죠?”
“예, 공주님.”
“저는 레이네입니다. 레이네 마리 부르노아 비클멘.”
“레이네… 마리… 부르노아 비클멘.”
“비클멘 왕가의 26대손입니다. 미키네오스의 개국 가문이기도 하죠.”
“뿌리가 깊은 왕가로군요.”
“황녀님께서도 이름을 알려주셔야죠. 어서요.”
“아. 미안해요. 전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 잉그라드입니다. 딱히 가문이랄 건 없지만, 오르페이아 집안이라고 하지요. 잉그라드는 황위를 이어받을 사람들의 이름에 항상 따르게 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리토르나 황녀께선 다음 황위를 계승하시는군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겁니다.”
“미리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드실까요?”
레이네를 따라 둘 다 잔을 들었다. 리타나 하백이나 둘 다 술을 마셔본 일은 없었지만, 이참에 한 번 마셔보자는 생각으로, 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각각 잔을 들고 함께 마셨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이번에 전쟁을 하게 될 수도 있어요.”
“…. 그렇겠지요. 미키네오스의 정무대신이시라고 했던가요? 변고를 당하셨던 분이….”
“아시는군요. 게다가 개국 공신가문 출신이십니다.”
“그렇군요….”
리타의 눈빛이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레이네는 그것이 애도하는 뜻이리라 생각하며 크게 개의치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나라의 큰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응징을 해야겠지요. 부왕께서 크게 상심을 하셨답니다.”
“그러셨겠지요. 오랫동안 함께 국정을 이끄신 분이셨을 테니….”
“네, 그래서 이번에 기필코 론도 산맥에 있는 마도의 무리들을 뿌리뽑겠다며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
슬슬 운을 띄우기 시작하는 레이네. 리타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론도 산맥은…, 또한 잉그라드령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일부는 그렇지요. 워낙에 거대한 산맥이다 보니….”
“그래서 부왕께선 동시에 염려가 크십니다. 행여 잉그라드와 같은 대국과 외교적인 마찰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흠…,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군요.”
짐짓 동의하며 ‘미처 몰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리타는 레이네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하자 얼른 선수를 쳤다. 하지만 개국 공신가문 출신의 대신께서 돌아가셨는데 응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습니까. 역시 이해해주시는군요~! 레이네는 감격했다는 듯 황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눈을 반짝거렸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나라일을 이야기하는 건 적합하지 않지만…, 저도 다음 왕위를 이을 왕녀이다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황녀께서도 이해해주실 수 있겠지요?”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
“외교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저도 염려가 됩니다만. 아시다시피 제가 본국을 떠나 있은 지가 오래 되어서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보니, 뭔가 이 자리에서 공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릴 방법이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머, 세심하기도 하셔라…. 황녀님께선 앞으로 훌륭한 황제폐하가 되시겠습니다.”
“….”
“그렇게 부담 가지실 것 없어요~. 이런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낸 제가 실수를 한 거지요. 따지고 보면 저 역시 그 일을 근심한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우린 같은 처지에 있다고 봐야 되나요…?”
“그런…가요…? 그러네요, 우린 그림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함께 드시지요.”
리타는 웃음으로 화답하며 잔을 들었고, 레이네가 거기에 응했다. 하백님도 함께하시죠. 리토르나 황녀님의 친구분이시면 제 친구도 되셔야지요? 그는 마지목해 잔을 들어 마주쳤다. 속내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리타는 레이네게 한 가지 청을 했다.
“이제 친구가 되었는데 못 들어드릴 게 있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드리지요.”
참 이 나라 사람들 말 길다 싶었다. 어쨌든 리타의 청은 하백에 관한 것이었다. 하백은 하루라도 수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실 객궁 후원이 좀 좁은 것 같아서요. 아하~.
“편안하게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없을까요? 혹시 공주께서 그걸 마련해 주실 수 있는지….”
“화, 황녀님…!”
“하백님께선 무예 수련에 무척 열의가 높으신가봐요. 그런 청이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죠.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서 꼭~! 그 방법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고…고맙습니다, 공주님.”
하백은 얼른 일어나 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 폼으로 보아 아무리 봐도 그는 고귀한 신분은 아니었다.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는 것은 노예들의 전형적인 자세였으니, 레이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께서는 다시 교총 본원으로 복귀할 예정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내일 왕도 교구의 사원에 들렀다가 갈 예정입니다.”
“먼 길 오셨는데 좀 쉬다 가시지요. 그렇게 급하게 가실 이유라도…?”
미셀이 짐짓 만류를 해봤지만 융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단지 귀환자 행렬의 책임자가 변고를 당해서 잠시 대행했을 뿐, 이 곳에 온 건 총회의 원로 자격으로 온 거니까요.”
“곧 앙느쿠테가 열리는데 그거라도 함께하고 가시지요. 명망 높으신 융베리 원로께서 함께하신다면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될 듯합니다만….”
“병부대신의 말대로 하시지요. 이번 앙느쿠테는 특별히 총장 예하께서 직접 주관하시기로 했습니다. 귀환자들도 있고 해서 말이지요.”
병부대신의 권고를 재무 부총관이 거들었다. 총장이 직접 앙느쿠테를 주관한다는 말에 융베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레오가 직접 한다…. 이쯤 되면 이미 교총 자체가 국왕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봐야 했다. 이미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손을 써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하지요.”
대답하는 기색이 사뭇 무거워보였다.
“궁정대신은 원로께서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객궁에 편안하게 모시게.”
“예, 폐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만찬을 마치고 근위대의 안내로 객궁에 돌아온 융베리는 근심에 가득찬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후원에서 리타가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그와 마주쳤다.
“전하….”
“바루나가 붙들던가요…?”
“알고…, 계셨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
“공주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알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보통 고단수가 아니더군요. 아무 이야기도 안 하는 듯하면서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넌지시 알려놓고 제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쩌긴요….”
리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지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때, 술수를 쓰는 사람들은 가장 당황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잘 하셨습니다.”
“그보다 구루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제 여기서 발목이 잡혔으니 선수를 잡는 건 불가능해졌고….”
융베리의 한숨이 깊어졌다.
먼저 왕도 대교구부터 찾아야만 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교총의 실권이 있는 왕도 대교구라도 먼저 가서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앙느쿠테를 총장이 직접 주관한다고 하니, 이미 레오가 거기에 와 있을겁니다. 가서 만나봐야지요….”
“앙느쿠테…?”
“아, 전하께서는 모르시지요. 한 해의 마지막 날 자정에 열리는 예배의식입니다. 미키네오스 왕실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지요.”
“그렇군요….”
“하백은 좀 어떻습니까?”
“… ….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 …. 왜 아니겠습니까.”
“일단…. 하백이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달라고 공주에게 부탁을 해 놓았습니다. 그 아이는 뛰어난 자질이 있으니, 일단 연무장이라도 생긴다면 어떤 식으로든 국왕의 눈에 띄게 될 겁니다.”
“…! 황녀 전하…!”
어느새 두세 수 이상을 내다보고 패를 옮긴 리타에게 융베리는 이걸 감탄해야 할 지 두려워해야 할 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놀라실 것 없습니다. 바이마샤르에서 한율 공에 대해 구루께서 하신 걸 조금 흉내내 봤을 뿐이니까요. 하하하…. 스승보다 제자가 낫군요.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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