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ly Of The Valley(은방울꽃) -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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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밀마을의 대 참사에서 살아난 사람은 결국엔 그 레이니라는 소녀뿐이었지. 그리고 그 레이니라는 소녀에 대해선 말들이 분분한데 어디론가 팔려가서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는 이도 있고, 충격으로 미쳐버려서 신전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리고 뭐. 헤르메스의 신전에선 이교도 축출과 제거라며 그 모든 행위를 정당화 시키고 무마시켰지만, 그게 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지 그걸 누가 믿겠냐. 하긴 헤르메스 신전의 재정 80%가 귀족들에 의해 채워지는 거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요즘은 신관이라 해서 믿을게 못된다고. 오히려 신관들 중에 인간 말종이 더 많은 현실이지…….귀족가의 망나니들은 모두 모인 곳 이니까…….뭐 사실, 신성력을 잃은 신관이 신관이냐? 요즘엔 아마 진실로 헤르메스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신관들도 귀족들도 평민들도…….쩝……."

패터슨은 긴 이야기를 끝내며 입맛을 다시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가. 후…….그래도 좀 쓸쓸하군…….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잖아. 신성력이 사라져 버리면……."

"그렇지. 신성력 없는 신관이란 그저 평범한 인간과도 같은 거니까. 그리고 중요한건 그 이상한 신관은 변태임이 틀림없단 말이야. 세상에 널린 게 변태 신관이라고. 변. 태. 신. 관. 그러니까 너희들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아아. 뭐, 별루……."

"그러지 뭐."

"그래, 그래. 그런 것 보단 즐거운 이야기를 하자고. 내가 있잖냐……."

패터슨의 이어지는 수다에 핸더슨과 맥키언의 뇌리에서 청발의 신관에 대한 기억과 앨프소녀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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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에취~!! 훌쩍. 누가 내 욕을 하나? 왜 갑자기 재채기가 나지? 크흥~!"

(5)

"인간 사제,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그리고…당신 정체가 뭐죠?"

하이 앨프 라이젠느는 인간의 율법에 의해 자신의 주인이 된 신관 복을 입은 사내를 노려보며 쏘아 붙였다. 자신의 행동을 구속하던 것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지만 라이젠느는 이 인간 사제에게서 달아나지도 달려들지도 않았다. 다만 이 인간의 의도가 궁금할 뿐이었다. 여기서 앨프의 그 고고하고 자존심 센 성깔이 또 한 번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숲의 앨프 라이젠느님, 전 당신이 아시는 데로 인간 사제일 뿐입니다. 제 이름은 제론드이고 헤르메스님의 종이랍니다."

"흥, 당신은 아까 내 발목을 치료한답시고 미세하지만 분명 신성력을 썼어요. 헤르메스의 신전이 신성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세 살짜리 꼬마도 다 아는 사실, 내가 비록 성년이 안 된 앨프지만 당신보다는 배로 더 살아왔는데 그런 거짓말에 속을 것 같나요? 당신의 정체가 뭐죠? 왜 날 구해주고 치료해 주죠? 원하는 게 뭔가요? 아무 이유 없이 친절을 베푸는 인간은 없다고 배웠어요. 그리고 이미 내 이름을 아는걸 보니 그런 생각이 더 확실해 지는군요."

라이젠느는 제론드라는 인간 사제를 바라보며 독설을 퍼부으며 그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으려 했다. 하지만 제론드는 별 반응 없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음…….제 말을 믿으실 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한 말에는 거짓은 없답니다. 제가 라이젠느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프리스트 수행 중에 우연히 라이젠느님을 찾는 앨프님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 이고, 또 라이젠느님의 발목을 치료할 때 쓰인 신성력은 제 것이 아니라 수행을 나서기전 교황님께 인도받은 힘이랍니다. 아시다시피 저에겐 신성력을 발휘할 만한 믿음이 없거든요. 그리고 아무런 바램 없이 라이젠느님을 돕는 게 아니랍니다. 지금 제가 가는 곳은 숲의 앨프님들이 사는 곳입니다. 우선은 저도 숲과 바람의 신이신 엔트님을 뵈어야 하거든요. 앤트님을 뵈려면 숲의 종족께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헤헷."

"이유는 그것뿐인가요?"

라이젠느는 아직도 무엇인가가 미심쩍다는 듯 제론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바라보았다. 라이젠느의 아름다운 눈망울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제론드. 앨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족이라는 숲의 앨프. 그 앨프의 얼굴을 코 앞에다 대고도 움찔하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하이 프리스트라 할지라도…

"무, 물론입니다. 정말 그것 뿐이에요. 뭐. 일이 잘되어 앨프족의 족장님을 만나 뵐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요. 절대, 저얼때~ 사심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흐으응~ 그래요~ 뭐, 한번 믿어보죠. 완전한건 아니지만 이렇게 신성력까지 써가며 다리도 고쳐주셨고, 당분간은 함께 행동해야 할 테니……."

말 뿐이 아니라 제론드의 눈 속에 사심이 없음을 느낀 라이젠느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제론드를 동료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신에게까지 버림받은 타락한 신전의 사제라 할지라도 저 푸른 눈만은 믿음이 갔다.

뭐…만약 몸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멈추시오~! 거기 신관님 멈춰보십시요~!"

제론드와 라이젠느가 약간의 실랑이를 끝내고 앨프의 숲을 향해 출발 하려고 할 때였다. 멀리서 재론드를 외쳐 부르는 소리와 함께 한때의 인마가 나타났다.

"시, 신관님 기다려 주십시오~!"

재론드와 라이젠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인마는 단숨에 제론드 일행을 따라잡아 그들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론드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무리들을 보고 잔뜩 긴장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마의 무리들은 그 중앙의 뚱뚱한 중년남자를 빼고는 모두 허리춤에 롱소드(long-sword)를 찬 기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의 주인님은 블레인 란브랜트 자작님이시고 저는 자작님의 집사 와잇트라고 합니다요. 저흰 신관님을 해하려는 무리가 아니라 저희 주인님의 명령을 받고 이렇게 신관님을 정중하게 모시러 온 것입니다. "

제론드의 질문에 무리의 중앙에 위치한 와잇트라고 자신을 밝힌 뚱뚱한 사내가 말에서 내려서며 대답했다. 남자의 배는 숨이 찬지 쉴새 없이 출렁거렸고 두 갈래의 콧수염 속의 입가엔 연신 간사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저를 말입니까? 무슨 일로?"

"헤헤헤, 그거야 미천한 저 따위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확실한 건 절대 신관님께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 입죠. 그러니 걱정 따윈 일체 하지 마시고 급하시지 않으시다면 꼭 저희와 동행 해 주시기 바랍니다요. 헤헤."

의구심을 표하는 제론드의 말에 간사한 웃음으로 답하는 와잇트. 그의 얼굴에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던 것인 듯 가식적인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만약 거부한 다면요?"

"헤헤헤. 그것 또한 신관님 마음이시지만 저로서는 주인님께 신관님을 꼭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기에. 헤헤."

싫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거절의 의사를 밝히는 제론드의 말에도 와잇트는 눈빛 하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은근한 협박의 말로 대답했다.

"흠. 안가면 강제로라도 끌고 간다는 말씀이시군요……."

"헤헤헤…….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만…….헤헷."

제론드는 와잇트란 사내의 반 협박성 어조에 그들의 의도를 알아채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란브랜트란 사내는 분명 경매장에서 라이젠느님을 눈독들이던 사내가 분명 한데.그런 그가 날 보자고 한다는 건 아직 라이젠느님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고..흠…….이를 어쩐다. 상황을 보니 도망도 못갈 것 같고…….쳇. 어쩔 수 없겠군. 따라갔다가 상황을 봐서 도망치는 수 밖에."

"뭐, 좋습니다. 급한 일이 있긴 하지만 피할 수도 없을 것 하군요……."

생각을 마친 제론드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앨프노예도 같이 오셔야……."

와잇트가 두 손을 연신 비벼대며 한 말에 라이젠느는 발끈해 했지만 제론드는 그런 라이젠느의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바짝 당겼다.

"자, 가죠……."

와잇트 일당이 미리 준비해둔 말을 타고 달린지 몇 십여 분이 흘렀을까? 제론드들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란브랜트가의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여기가 란브랜트가의 성입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시지요.”

와잇트와 그 일당이 제론드와 라이젠느를 안내해 데리고 온 란브랜트 자작가의 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화려하다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릴 만한 곳이었다.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인공호수에는 육안으로도 확인 될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었고 성문이 열리며 서서히 내려온 도개교를 따라 들어간 성 내부에는 수많은 수풀 동상들과 드넓은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흠…….굉장히 화려한 곳이군요.”

“헤헤헤…….화려하다니요, 저희 란브랜트 가의 명성에 비한다면 매우 수수한 것입죠. 저희 주인님이 워낙 검소하셔서 말입죠. 헤헤헤.”

“허…….그, 그런가요…….”

제론드는 와잇트의 말에 기가 막혔다. 성 안으로 들어온 지 벌써 한참인데 아직 이 화려한 정원에서 조차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게 검소하다 라니 이 상태라면 자작가 사람들이 기거하는 저택은 어떨지는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런데…….귀족들이 가병을 키우는 건 위법 아닌가요?”

성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제론드는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넓은 연무장 쪽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랬다. 이 달란트 왕국은 귀족들이 가병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다만 영지보호를 위해 왕국에서 허가한 300의 개인 기사단만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란브랜트가 성의 연무장에는 어림잡아도 500명이 넘을 법한 병사들이 훈련 중이였던 것 이였다.

"에…….그, 그건…….헤헤헤. 가병은 아닙지요. 헤헤."
“???”
“헤헤헤…’

재론드의 질문에 흠칫 하며 다소 당혹스런 기색을 내비치며 얼버무리는 와잇트. 그도 그럴 것이 이 문제는 반역죄로 까지 발전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후 약간은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그사이 저택에 당도 해 버렸기에 제론드는 제론드대로 또한 와잇트는 와잇트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저택의 내부는 매우 화려했다. 바닥은 대리석이었고 발 닿는 곳마다 눈 가는 곳마다 진귀한 그림들과 도자기 등 장식품이 있었다. 저택으로 들어서자 그동안 가벼운 미소를 연신 짓고 있던 와잇트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제론드와 라이젠느는 화려한 저택의 복도를 지나 2층의 서재와 같은 곳으로 안내 되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곧 주인님께서 드실 것 입니다. 전 그럼 이만……."

서재로 의심돼는 방안은 적지 않은 책들이 있었고, 중앙에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뜨거운 차 한 잔과 다양한 다과들이 잘 차려져 있었는데, 차에서 아직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는 것을 봐서는 제론드 일행이 저택을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 차려놓은 듯하였다.

"인간들은 손님을 초대하면 대게 응접실이라는 곳에서 대접 한다고 들었는데, 이곳은 서제 인 것 같군요?"

와잇트가 밖으로 나가자 그동안 잠자코 있던 라이젠느가 입을 열었다.

"음…….뭐, 우릴 부른 이유가 밖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군요. 그럼 그 이유란 것은 저와 관련 된 것 이겠군요."

"아마도……."

"날 넘길 건가요?"

담담한 어조의 라이젠느.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때문일까 라이젠느의 눈이 흔들렸다.

"그럴 수야 없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이젠느님께서 다치시게 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딴에는 호기롭게 말하는 제론드였지만 라이젠느에게는 조금의 위안도 되지 않는 듯 했다.

저벅 저벅…….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답답한 마음에 라이젠느가 다 식어버린 차를 한 번에 들이마신 후였다.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란브랜트 자작과 와잇트가 서재로 들어왔다.

"오, 이거 제가 신관님께 실례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초대한 건 저인데 이렇게 기다리시게 하다니. 하하핫."

란브랜트 자작은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알랙스의 두 손을 꼭 잡고 연신 위 아래로 흔들어 댔다. 마치 그 모습이 와잇트의 축소판 같아 보였다. 얼핏 보기엔 란브랜트의 얼굴은 미남형이였고 와잇트의 모습과는 극과 극을 달렸지만, 자세히 본다면 코 밑으로 두 갈래의 콧수염과 기름기 번지르한 얼굴, 그리고 만면에 가득한 저 가식적인 미소까지 완전히 판박이였다.

‘누가 먼저일까???’

순간 이런 의구심이 구쳐 오르는 제론드였다.

"하.하핫. 아닙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하하. 헤르메스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실 것 입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매하신 신관님께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되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려…….하하핫."

"하하. 과찬이 심하시군요. 근데 그저 저와 농을 나누고 싶어 이렇게 초대하신 건 아니실 텐데요?""

"아, 하하. 그렇군요. 우선 자리에 앉으시죠? 이렇게 서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니……."

과도한 인사치례에 익숙하지 못했던 알랙스가 먼저 본론을 꺼내자, 란브랜트 자작도 더 이상의 겉치레를 그만두고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에.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미 예상은 하실 테지만, 제가 신관님을 이렇게 초대한 것은 바로 저 앨프 때문입니다."

라이젠느는 자신을 찬찬히 훑어보는 란브랜트의 시선에 역겨움을 느꼈다. 그 눈빛은 마치 탐욕스런 악마 맘몬(탐욕의 하급악마)의 그것과도 같았다.

"저 앨프를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없을는지요? 아, 물론 거저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만 골드와 잘 훈련된 여자 노예 다섯을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신관님께서도 그리 섭섭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 그게……."

"아, 물론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신관님께서 저 앨프를 저에게 양도해 주신다면 이후로 매년 신관님께서 기거하시는 신전에 신관님의 이름으로 2000골드와 숙련된 여자노예 하나씩을 기부하겠습니다."

이 정도라면 저 깐깐해 보이는 젊은 신관도 넘어올 정도의 조건이라고 란브랜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란브랜트가 내건 조건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왕국의 대부호 중 하나라는 란브랜트에게도 말이다.

"그게, 그러니까……."

"하핫…….아직 망설이시는 것을 보니 신관님께선 제가 내건 조건이 성에 차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려…….신관님께서 따로 생각해 놓으신 가격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보시죠."

제론드가 또다시 우물거리자 란브랜트의 눈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살기가 흘렀다.

금방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신관이 의외로 계속 고자세로 나오며 답을 피하자 점점 답답해지는 란브랜트였다. 생각 같아서는 소리 소문 없이 저 신관을 묻어버리고 앨프를 빼앗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조용히 지내야 하는 상황 이였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인데 저 신관은 제 죽을 길 살길도 모른 체 나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그러니까 라이젠느님은. 제 노예가 아닙니다."

"예? 그럼 고위 신관님께서?"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노예로서 산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전 라이젠느님을 앨프의 숲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의무가 있답니다. 굳이 말하자면 라이젠느님은 제 노예가 아니고 동료인 것 이지요……."

"허…….하하.하하하핫……."

란브랜트는 순간 황당해져 헛웃음만 나왔다. 그냥 돌려보내기 위해 이만골드라는 거금을 썼단 말인가? 저 신관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절 놀리시는……."

란브랜트는 말하다 말고 순간 깨달아 지는 게 있었다. 저 신관의 눈은 진심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 뿐이 아닌가. 저 멍청한 신관은 노예에게 사랑에 빠진 것이리라. 한순간 즐기려고 산 노예에게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이리라.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이 그 어떤 조건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신관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하. 그러시군요. 신관님의 높으신 뜻을 몰라 뵈었습니다. 신관님께서 그런 뜻이시라면 저로서도 더 권할 수 없겠지요. 하하."

"아, 감사합니다. 자작님께 헤르메스님의 크나큰 축복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 저흰……."

제론드는 란브랜트 자작이 자신의 말에 의외로 쉽게 수긍을 하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다시 란브랜트 자작의 마음이 바뀔지 몰라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 이런 벌써 일어나시면 제가 섭섭하지요. 절 예의도 모르는 장사치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 입니까? 하하.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제 성에서 보내시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지요? 이미 만찬이 준비되고 있을 것입니다. 하하……."

란브랜트는 겉으로 온화한 미소를 띄운 채로 제론드의 팔을 잡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어.어. 이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자, 자 거절하지 마시고, 거기 앨.아, 아니 라이젠느님도 따라 오시죠."

약간은 유난스럽게 제론드를 잡아끄는 란브랜트의 눈빛에 순간 음흉한 빛이 스쳐지나갔지만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라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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