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 -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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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이 어둑해진걸 보고 오늘도 가방을 싼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나오면 항상 같은 광경을 마주하지만

오늘부턴 왠지 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그랬다.

매사가 똑같은 챗바퀴의 하루라, 약간의 균열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거든.

좋은 쪽이라는게 더더욱 들뜨게 만들지 말입니다요.

학교에서 누군가와 부대끼는건, 종종 뜻 그대로만은 아닌게 틀림 없을거라 생각하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내려왔다.


- 딱!

아주 순간적으로 사소하더라도 발을 잡아채는 것쯤은 금방이다.

학교 정문 시계탑에 서있는 저 여자애는... 분명히 익숙한 얼굴이다.

그것도 불과 몇주 전에 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던가.

평소였으면 귀찮다고 끊어버리고 모른척 지나쳤을테지만, 오늘의 난 기분이 괜찮으니까.

"안녕하세요?"

가볍게 접근해서, 그만큼 가볍게 인사를 건냈다.

"!?"

깜짝 살짝쿵 놀라는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누구인지 황급히 확인을 한다.

이제 됐나? 싶었지만 오히려 경계의 눈초리를 더욱 단단하게 다지고는 아무말 없이 날 빤히 쳐다봤다.

이런, 누굴 기다리는거 같았는데 사람의 접근이 되게 의외였나보네.

뭐, 물론 날 기다린건 아니었을테니 흠..


"저.."

오히려 말을 붙이려는 내 모습을 보고 그녀가 더욱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다. 한두걸음 거리를 벌린건 덤이고.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걸 바라고 접근한건 절대 아니고, 행여나 그럴 생각 역시 털끝만큼도 없다.

이대로 내가 "어어..."거리다가는, 그녀가 금방이라도 도망가버릴 가능성이 컸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쭈삣쭈삣거리며 계속 거리를 벌려가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저 그때 옆자리에 앉았는데 기억 안나세요?"

"네, 네에...?"

에고.. 실수다.

침착하게 잘 얘기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상대방이 저렇게 나오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다급해져선

앞 뒤 다 잘라먹고 되는대로 입에서 터져나와버렸다.

빨리 이상한 헌팅남 취급 당하기 전에 오해를 풀어야한다.


"저, 그 그.. 지난달에 같이 술자리 하셨는데.. 부뚜막 기억 안나세요? 저 아래 있는 술집요."

"...무슨.."

뒷걸음 치는 발걸음은 일단 멈췄지만 여전히 경계의 자세를 풀진 못했다.

굉장히 구부정한 자세, 이렇게 서보니 가슴팍 겨우 넘을듯한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더욱 왜소해보인다.

일단 손이 발이 되도록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해간다.

그 날 같이 왔던 학과의 이름, 옆자리에 앉은게 나였고 우리 학과 후배랑 그쪽이 얘기하는 것 등등

확실한 정황 증거(?)를 끊임 없이 제시했다.


"참! 소은이 아시죠? 이소은!! 같은 동기 아니세요?? 그쪽 건너건너 자리에 소은이가 앉았는데 모르시겠어요??"

"아..!"

괜한 오지랖에 알은체 한걸 후회할 즈음 소은이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그렇게 저렴하게 팔아간 덕분인지

어찌어찌 대부분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죄송해요.. 이런적이 처음이라 저도 갑작스러워서..."

내가 괜히 찝쩍거릴려고 접근했다는 오해만 풀면 금방이라도 하하호호 거릴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더욱 찍어눌렀는지, 움츠려들다못해 어깨가 서로 접힐 지경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아뇨 아뇨! 제가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좀 들떠서 그랬어요. 그냥 인사만 할려고 한건데..."

"암튼, 저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시구... 에고, 제가 죄송하다니까요 자꾸 움츠려드신다 하하.."

"음, 소은이 잘 있죠? 저 봤다고 안부 전해주셔도 되고.."

"암튼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그러면 저라도 놀랐을거에요."

쩔쩔매는 내 모습이 그래도 좀 먹혀들어갔는지, 그녀도 처음과 비교해서 훨씬 안정을 찾은 모습을 보였다.

"하하, 하여튼 크게 별건 아니었고 그냥 반가워서 인사한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되요."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한걸요..."

"어휴~ 저 정말 괜찮다니깐요. 음.. 그럼 이렇게 하죠!"

"앞으로 종종 얼굴 마주치면 저 잊어먹지말고 서로 인사하기로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제 얼굴 기억하시겠죠?"

"..아 네, 안 잊어버릴거 같아요. 꼭 저도 인사할께요, 약속할께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녀를 뒤로하고는 잰걸음으로 골목을 돌았다.

그럭저럭 걸어나왔더니 안도 반, 부끄러움 반이 제 멋대로 뒤섞여서 뒤늦게 밀려왔다.

괜히 말 걸었나 싶다, 정말.

그래, 오늘 은채씨랑 말도 많이 나누고 분위기도 좋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 주변이 바뀌는건 아니었는데..

참 바보같다. 내일은 오늘과는 좀 다른 무언가가 시작될거라고, 왜 무턱대고 믿었지?

아, 물론 오늘이랑 내일은 다르겠지. 19일이랑 20일이 같은 날일 수는 없으니까.

뭐, 그거 빼곤 다 똑같은 하루 아닌가?

나 혼자 들뜨고 적극적으로 변해본다해도, 어차피 날 에워싸고있는 주변 공기는 한톨도 바꿀수 없을텐데 말이다.

그런건 더럽게 무겁다. 말이 공기지, 뻑뻑하기론 닭가슴살 저리가라 할 정도가 아니던가.

하여튼, 정말로 괜히 말 붙여봤다는 생각이 가면 갈수록 불어났다.

친한것도 아니고 술자리에서 얼굴 한번 힐끔한 사이였는데,

그 쪽에서 그렇게 쭈삣거리며 나오는 것도 전혀 이상할게 없었으니까...

진짜 웃긴 농담이라 생각해서 했더니, 나 빼고 아무도 안 웃는 상황이랑 똑같네 이거.

모르겠다. 이미 저지른 일이고, 쿨하게 잊어버릴 정도로 무신경하지도 않으니까

오늘 밤은 잘때 이불 뒤집어쓰고 끙끙대면 되지않나 싶다.

다들 이렇게 후회하고 사는데 뭘.

생각만큼 발걸음이 가벼울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도착해서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억지로라도 생각을 안할려고 했지만, 당황해하는 그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다말길 반복하더니

비로소 본격적인 후회와 부끄러움이 치달아 오른다.

항상 괜찮은 척,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살아왔지만,

그렇게 꾹 눌러둔 마음은 이렇게 내 방 침대 귀퉁이에서 터져나오곤 했다.

첫경험을 했을때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꾹

짜여진 찝찝함을 버릴 곳은 내 방 뿐이니까.


아마 이렇게 끙끙대다보면 어느새 잠이 들 것이다. 가장 힘든 지루함이 계속된다.

.......

......

.....

....

...

..

.


정말 무섭다.






그 뒤로도 그녀와는 종종 마주치는 일이 있었고, 우리는 어설프게나마 서로가 인사를 주고 받으며 알은 체를

하기 시작했다. 학과도 소속 단과대학도 달랐던 우리 두사람이 가끔이나마 마주칠 수 있었던건, 그녀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일찌감치 고시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패션학과에서 공무원 시험준비?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이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서울에 위치한 4년제 대학이라고 하지만

요즘은 전공에 대한 비중도 많이 높아진 상황이다. 더이상 대학 이름만으로는 척척 받아주는 기업이 없다보니

스스로의 스펙을 쌓아도 취직의 길은 바늘귀 만큼 좁아진 상태였다. 하물며 패션학과라.. 대학교때까지는

매력적인 과임은 분명했다, 상대적으로 몸매도 뛰어나고 꾸미는데 아끼는게 없을테니 미팅 제의도 많이 들어온다.

누구보다도 맨 앞줄에 서서 당당하게 캠퍼스를 활보할 총알이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뿐, 조금만 앞을 보면 그런 거품은 금새 사라지고 먹고 사는 현실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분명 성공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미래의 패션 디자이너가, 일류 모델이.


몇명이나?

정말 뼈아픈 질문이다.

매우 좁은 확률을 뚫고 가기엔 그만큼 부피를 가볍게 해야하니까,

여타의 일반적인 학과들보다는 취업률이 낮은게 보통일 것이다.

아,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학교에서 말하는 퍼센트가 있더라구.

하여튼 그녀도 나와 같은 개미였던 것이다. 점수를 맞춰서 혹은 약간의 로망을 가지고 덜컥 입학했더니 왠걸,

나중에 밥 빌어먹고 살기 딱인 상황이 눈 앞에 있었겠지.

어찌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1학년에 알아차렸으면, 나와는 달리 머리가 좋은 개미라는게 차이라면 차이겠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와의 대화는 별 재미는 없었다. 대화라고 할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봐야하나.

주기적으로 보기로 한 것도 아니라 어쩌다 만나면 인사 한번, 두번. 그렇게 간략하게 주고받기를

일주일정도 되다보니 이제서야 겨우겨우 같이 캔커피 한잔 할 여유까지 온 것이다.

대화 상대로는 확실히 빵점.

그치만 뭐, 내가 수다나 떨자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칙칙하고 시릿한 밤의 한 웅큼을 나눠가져가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어떻게보면 대화라는게 꼭 중요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늘도 그녀와 캔커피를 나눠 마시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모른다.

그녀는 내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한번도 물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상하지만 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도 꺼려하는 거 같진 않으니, 이런 요상한 시간도 그런데로

괜찮지 않겠냐는 마음이 불쑥불쑥 앞섰다.

우리는 그렇게 캔커피를 마치고 다시 도서관으로 올라선다.

내가 배려심 꽉 짜버린 걸음을 먼저 옮겨가면, 그녀가 말 없이 내 뒤를 따른다.

우리의 기묘한 만남도 오늘 그렇게 지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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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는 줄어드는데 구조명단은 전혀 올라가질 않네요..
술을 마시진 않지만 술 생각이 나는 밤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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