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정(慾 情) - 1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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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난 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은 후에 앞좌석으로 넘어가서 차를 후진시켰다. 그리고는 김유미의 오피스텔 근처로 차를 몰고 갔다.

오피스텔 앞 골목으로 진입하기 전에 난 다시 차를 세우고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나서 뒷자석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가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다시 원점이네... 무언가 희망이 보이는 듯 했는데 다시 원점...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니 입장에선 그 정도는 눈감아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차피 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만 아니라면 김유미 선생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아니 오히려 그녀와의 만남으로 내 욕망이 사그러든다면 그게 너한테는 더 나은 방향 아닐까?”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단발머리가 묻는다.

“무슨 의미지? 잘 모르겠는데..”

“글세...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 역시 확실하게 이야기 하긴 힘들어. 이를테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넌 내가 너와의 인연을 이어가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지. 아까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오면서 김유미 선생과의 만남이 보장되지 않는 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해봤어. 아니 내가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를...”

그 말을 하며 난 뒤를 돌아 단발머리를 정면으로 똑바로 쳐다 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잠깐 눈을 깜박거린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 말해..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지..”

난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 포기는 못해... 지금 나에겐 다른 건 별로 의미가 없어. 그렇게 순리적으로 모두를 떠나보내고 난 후에 혼자 남은 삶은 생각하기도 싫거든... 차라리 ...”

말을 끊자 단발머리가 약간 목소리를 키워 묻는다.

“차라리 뭐?”

“김유미를 포기해야 한다면 너와의 만남을 이어가겠어.”

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서 단호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서브를 넘겼다. 어떻게 다시 넘어올까?

단발머리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다.

“뭐? 나와? 미쳤어... 누구 맘대로.. 이 아저씨 보기보다 끈질기네.. 처음 봤을 때부터 남의 집 기웃거리는 게 수상하더니... 참.. 당신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내뱉는 거야?”

“몰라. 너에 대해서 아무 것도.”

그 이야기를 듣더니 약간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참나.. 허풍은... 다시 한 번 경고하는 데 김유미를 다시 만나지 말아. 앞으로 또 그녀를 건드린다면 당신 부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겠어. 그리고 나 갈꺼야.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단발머리가 차에서 내렸다. 난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려서 내 차 앞으로 걸어가는 그녀 뒤에다 대고 조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난 이유성부터 시작해볼게.”

몇 발자국 못가서 그녀가 돌아섰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 쪽으로 걸어오며 묻는다.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잘은 몰라. 널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었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 니가 왜 나와 김유미의 만남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지도 궁금하고... 또 김유미와의 만남을 계속 해야 하는 지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 지도 너와 이유성이 김유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아야 가능할테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니 지금 이대로는 난 절대 김유미를 포기 못해.

그녀를 품으려고 했던 이유는 널 안으면서 시작됐지만 우리 와이프에게 이야기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포기하기엔 김유미라는 여자... 자꾸 그리워져... 너와는 다르지만...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거든...

넌 신기루같은 환상이지만 김유미는 내가 찾아낸 오아시스니까.. 그걸 니가 차단하려 한다면 나도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이 날 수긍시키지 않는다면 포기할 수 없어...

난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이번만큼은 움직일 생각이야. 너라는 여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움직인다기 보다는 내가 맛본 사탕을 지키기 위해서... 골목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녀석이 빼앗아 갔다고 하더라도 그냥 맥없이 물러나기엔 너무 달콤해서 죽도록 얻어터지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뒤로 가지 않을 생각이야.”

단발머리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날 어떻게 제지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터...

“한 가지 방법은 있어. 넌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그게 뭐야? 설마...”

“맞아. 김유미를 포기하는 대가로 우리 관계를 이어갔으면 해. 그렇다면 그 여자 앞에서 깨끗이 물러날 수 있어. 어차피 가슴 속이 달아오르도록 만든 열병의 시작은 항상 어딘가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 것 같은 신비스러움을 가진 너였으니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를 날 보지 않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말했다.

“어이가 없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 이거군. 당신 스토커야?”

난 잠깐 그녀를 응시한 후에 시동이 걸려져 있는 내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단발머리가 차 앞에 서 있는 바람에 차를 출발시킬 수는 없었다. 난 차 문을 열고 소리 쳤다.

“비켜줘! 나 가야해.. 너무 늦었어.”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잖아. 난 아직 할 말이 남았어. 내려!”

단발머리의 음성은 명령조로 날아왔다. 이유성이라는 카드가 먹히긴 했지만 난 더 이상 이 상황을 끌고 가기가 싫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추후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저러나 이 여자 자존심은 대단하다. 두 번이나 몸을 섞었건만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도 날 몰아 세우고 있으니..

“난 할 말 없어. 그 남자 쪽에서 시작한다는 말에 왜 그리 흥분하지?”

“그.. 그건...”

난 차를 빠른 속도로 후진시켰다. 더 이상의 대화는 피하는 게 좋을 듯... 그리고 재빨리 뒷골목 쪽으로 턴을 해서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놔둔 채 그 곳을 빠져나왔다.

내가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었던 건... 일종의 감이었는데... 이야기를 계속한다고 해도 그녀가 순순히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가능성은 없는 데다가 단발머리가 ‘내가 누군 줄 알아’하고 내뱉었을 때 난 오히려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즉 나이가 20대 후반도 안 되어 보이는 그녀가 내뱉은 그 말은 적어도 무언가 지킬 게 있다는 의미로 들려 안도가 되었다고 말해야 겠다. 40대를 훌쩍 넘은 사람이 그 이야기를 했다면 확실치 않았을 것이다. 그건 재력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돈으로 누군가를 고용 - 이를테면 청부를 받는 사람들 조직, 깡패 혹은 심부름꾼 등 -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겠지만 단발머리에게 풍기는 귀티의 정체는 그 쪽은 아닌 듯 했다.

그녀 자신이 지킬게 있어서 나와의 관계가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를 꺼리면 꺼릴수록 김유미와의 만남에 섣불리 끼어들지는 못할 듯하고 넌지시 던진 이유성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저 정도 반응이라면 외려 날 건드리는 것보다 내가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할 지도 모를 정도...

김유미와 내 관계가 드러나면 난 이유성이라는 이름을 거론하게 될 것이고 그건 그녀가 절대 바라지 않는 듯한 분위기 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그녀 입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내가 알아보는 수밖에 없는 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녀와 언쟁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에 괜한 일로 더 이상 신경을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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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중순쯤으로 기억나는데 아직은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 무렵 남해로 내려가는 차안에서 난 내게 묻고 있었다.

그 곳에 가서 무얼 해야 하지?
6~7시간 정도 운전을 하면서 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정리했는데 나름대로 답을 찾은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로 인해 세상의 기억에서 사라져간 미정이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정이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말 ‘세상이 싫고 남자가 싫다’ 속에 그 남자는 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정리를 하고 싶었다. 그건 당시 내가 시달리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미정이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진 날 그녀는 숫처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가 되풀이된 것이라면... 혹시 나보다 더 그녀를 궁지로 몰아 넣었을 지도 모르는 그 누군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생각엔 그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는데 그때까지는 아직 경찰이었고 신분증이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알아볼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었다.

남해군청이 있는 남해시 소재지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바닷가가 보이는 해안마을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 이었다. 차로 미정이의 고향마을인 00면으로 운전 하는 동안 여기저기 그림 같은 펜션이 많이 있었고 일부는 건축중이었으며 00면소재지를 지날때는 아마 미정이 그 애가 다녔을 지도 모르는 00중학교, 00고등학교를 볼 수 있었는데 그리 큰 학교는 아니지만 면 내에 고등학교까지 있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난 다음날 미정이의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가볼 요량으로 주변만 둘러본 후 다시 남해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주변에 있는 여관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래도 그날 밤은 오랜만에 꽤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는데 미정이의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 곁에 있으면 난 늘 잠을 푹 자곤 했으니까...

아침부터 무더운 다음 날 잠을 깬 후에 세면을 하고 나서 미정이의 할머니를 찾아나섰다. 면 소재지에서 조금 벗어나 바닷가 절벽을 따라 5분 쯤 차를 몰고 들어가니 그 애가 어린 시절을 보냈을 동네가 보인다.

동네 어귀에서 시골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이 하얀 젊은 여자를 만났다. 여대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난 그 애에게 혹시 미정이네 집이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 애가 가리킨 곳은 언덕 위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는데 울타리도 제대로 없고 지붕에 얹은 기와가 군데 군데 벗겨져 있었다.

“혹시 미정이를 잘 알아요?”

내가 물었다.

“예. 언니하고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어요. 저보다는 선희 언니와 더 친했지만... 그 언니도 지금 집에 내려와 있는데... 그런데 누구세요?”

괜한 것을 물었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미정이의 학창 시절에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든 물어봐야 하니... 경찰인데 미정이 자살사건 때문에 조사하러 왔다고 하려다 이 나이 또래의 여자애들에게는 잘 안 먹힐 것 같아서 그냥 순순히 이야기 했다.

“미정이랑 사귀던 사람이에요. 그 애가 하늘나라로 떠난 걸 뒤늦게 알고 할머니를 좀 뵈러 왔어요. 이제 와서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

“선희씨에게 물어볼 게 좀 있어요. 그 언니에게 잠깐 이야기 해줄 수 있나요? 저기 차 안에 앉아 있을게요.”

“어떤 게 궁금하신대요? 저한테 물어 보세요.”

낯선 남자에게 의외의 친절을 보이는 미정이의 1년 후배라는 아가씨에게 몇 가지를 물어 보았다. 미정이가 이곳의 학교를 다녔는지 물었고 학창시절엔 어떤 소녀였는 지를 물었다.

“예 언니는 고등학교까지 이곳에서 졸업했어요. 중학교 때는 여기 남해시 대표 수영선수였는데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수영을 그만뒀어요. 학교 다닐 때 오빠들이 예쁘다고 사귀자고 해도 그다지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대요. 워낙 말이 없고 조용한 언니라...”

“그래도 학창시절엔 누군가를 만나지 않나요? 이 동네 사람이 아니더라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언니는 그런 쪽으로 조숙했다고 해야 되나? 또래 남자아이들한테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어요. 괜히 언니 때문에 속 앓이 하던 오빠들은 많았지만...”

그 여자애와 헤어져 선희라는 친구의 집을 알아낸 후에 미정이의 집으로 갔다. 허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해서 방문을 열고 누구시냐고 묻는 할머니에게 미정이가 죽기 전에 사귀었던 남자라고 이야기하자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난 전자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인데 우연히 미정이를 알게 되어 몇 개월 사귀었고 진지하게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그 애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해외지사로 파견을 나가 6개월만에 돌아와서야 미정이의 죽음을 알고 너무 괴로워서 할머니라도 찾아뵙고 속죄하고픈 마음에 물어 물어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말도...

할머니는 한참을 우셨는데 ‘그 불쌍한 것을 어떻게 해!’라는 말을 되풀이 하셨다. 난 고개를 푹 숙이고 할머니와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면 미정이를 기억해 줄 사람은 나 외엔 없다. 그 애를 되살릴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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