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少年(미소년) - 3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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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쿄이야기/宇京物語 1卷. 美少年 3부- 첫 등교, 그리고 戀人의 再會

<삼촌, 엄마가 이거 마시래. >
<아, 수고했다. 거기 놓고 나가…….야! 내 조카는 왜 그렇게 뚫어져가 보고 있냐? >
<응? 아 아무것도. 사내녀석이 씩씩해 보여서 보기가 좋아서 그렇지……>
친구인 석현의 집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 방문한 혁은 저녁 식사 후에 석현의 방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방 안으로 석현의 누이가 직접 만든 약간의 수제手製쿠키와
커피가 담긴 플라스틱 쟁반을 들여온 우쿄와 같은 나이쯤인 고 2의 석현의 조카를
유심히 살펴봤다.
<흠…… 역시, 그런 건가? >
<뭐가 말야?>
<어? 뭐긴…… >
혁은 짐짓 헛기침을 한 뒤 쿠키를 하나 집어 들어서 입에 넣고 반 토막 내어 씹었다.
쿠키조각에서 모카향이 은은하게 혁의 미각을 물들였다.
<너, 요즘 이상하단 말야? >
<내가 뭘? >
<뭐랄까 지금까지의 총기聰氣 넘치는 강민혁이 아니라 어디에 넋을 놓고 다니는 것
같단 말이야…… 혹시 짝사랑 하는 여자가 있는데 작업作業이 안 풀리는 거 아냐?
하긴 작정하면 여자 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닌 네가 여자 하나를 어떻게 못해서 속
끓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허헛!! 여자는 무슨….. 거 누가 들으면 여자만 꼬시고 다니는 선수인 줄 오해
하겠구먼…… >
<하긴 그건 아니지……>
확실히 혁은 요즘 생각에 잠기는 일이 전보다는 잦아졌다.
너무 낫이 설은 느낌 탓이었다. 아니, 실은 그 느낌은 전부터 몇 번 겪은 것이지만
대상이 달랐던 것이다. 그게 혁의 고민을 더해갔다.
차라리 상대가 어쨌든 여자였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 에로스의 화살이
과녁을 잘못 찾았다는 것이다.
<아, 그 사오토메 우쿄던가 하는 일본인 친구, 내 조카하고 같은 나이던가?>
< 그럴걸. >
석현의 입에서 우쿄의 이름이 나오자 혁은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이름이 요즘 혁을 설레게 만들고 흥분과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마땅히
이성異性에게 느껴야 할 그런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동성同性의 소년이라는 점으로
인한 미증유未曾有의 당혹감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뭔가 착각한 것이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니면 자기가 인식을 못해서 그렇지 자신이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였던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방금 전에 석현의 조카를 유심히 보았던 것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제법 건장한 청년 티가 완연한 소년에게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역시 우쿄에게만 특별히 느꼈던 것인가?
<그 친구 감기 때문에 못나왔던 거라며? 어떻대? >
<아, 많이 나은 모양이야. 어제 낮에 교재를 받으러 학교에 왔었고…. 오늘 전화해
봤더니 내일부터는 정상적으로 등교할 거라네. >
석현도 그 일본인 소년에 관심이 가고 있었다.
미소년이라는 걸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그런 미소년은 처음 봤다고 친구들에게
말했었다.
특히나 무척 소박하고 수수한 인상이 무척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서……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가용으로 우쿄의 거처로 데려다 주고 그 소년의 비밀을 알게
되었던 것도 단순히 혁과의 우정 탓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혁도 우연히 말려들었던 것이지만…..
<하핫. 그거 다행이네. 그 꽃순이, 아니 꽃돌이 녀석이 나이도 어린데 외국
땅까지 와서 몸까지 아프고 한 게 안쓰럽다 싶었는데 말야. 하긴 그래도 친
부모 집이니까…………. >
<꽃돌이? 그런 이상한 소리는 어디서 배운 거야? 하여튼 그래도 일본인인
그 애에게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낫 선 외국이고, 지금까지 친 부모 외의
분들을 친 부모로 알고 살았던 애고……… 그 애 운명이 너무 가엾은 건 사실이지…… >
<그래도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게 기특하잖아? 내 조카는 가령
성적도 반에서 중간이구먼……. 다른 녀석들 같으면 옛날의 너처럼 제대로 삐뚤어
졌을 터인데……>
<행복은 학교성적순이 아니잖아. 아참. 혹시나 하는 얘기인데 말야 사오토메군의
얘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 비밀로 해줘. >
<응? … 아, 알았어. 야, 내가 그렇게 촉새로 보이냐? >
<흐음~~~ 내 친구인 병아리 번역가 김석현씨가 입 무거운 건 내가 보증하지.>
오른쪽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확신하는 투로 농을 하는 혁의 모습에 석현은
의자에 앉은 채 팔짱을 끼고 오른쪽 손가락을 앞 뒤로 흔들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비웃는 제스처를 보인 뒤 두 청년은 호탕하게 웃으며 커피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기분이 어땠어?- >
<-어땠냐니?- >
우쿄는 반년 아래의 외국인 사촌동생의 질문에 딴청을 피웠다.
우석은 약간 집요해져 있었다.
일요일 저녁에 우쿄는 두 번째로 우석의 아버지이고 석주에게는 둘째 동생, 즉
우쿄의 작은 아버지라는 석준의 집을 방문했다.
현재 서울지법 검사인 석준은 우연치 않게 우쿄가 한국으로 오고 딱 일주일 뒤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석주의 집과 가까운 곳의 고층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날 집들이에 마지 못해 따라간 뒤로 이번이 두 번째인 것이다.
반대로 우석이 그 사이에 간간히 우쿄를 방문했고……
짧은 스포츠 머리의 우석은 불과 반년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다 그나마 마치
초등학생을 연상시킬 만큼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우쿄와는 달리 그
또래의 전형적인 고등학생으로 키도 석주보다도 3CM나 큰 183CM에 육박하고
우쿄와도 키가 20cm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체격에서 사촌 형인 우쿄를 압도壓倒
하고 있어서 우쿄의 사촌동생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큰 형으로 보일 정도다.
제법 굵직한 목소리와 남자답고 훤칠한 마스크도 인상적이었다.
행동거지도 남자아이로서의 의젓함과 늠름한 기상이 엿보여서 우석은 권씨
가문에서 바라는 전형적인 아들상이다.
다른 사촌동생들과는 달리 원래부터 우쿄에게 호의적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다소의 동정심으로 우쿄를 대했지만 지금은 자신과 같은 나이임에도 일본의
명문대에 진학한 사촌 형에 일종의 존경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우쿄로서는 우석과는 이미 일본에서부터 이 메일이나 채팅 등의 온라인
상으로 친해져 있어서 그리 어색할 것도 없었다.
물론 한 달여 전, 다시 만났을 때는 막상 실제로 다시 보려니 우쿄는 내심
위축이 되어서 쭈뼛대며 소극적으로 대했지만……
기실 우석으로서는 우쿄와 친해질 이유가 분명했다.
어른들의 부탁이 첫 번째였는데 큰 아버지인 석주와 자신의 아버지인
석준에게서는 우쿄가 한국의 친척들에게 빨리 나쁜 감정을 잊게 하도록
해 주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에게는 어떻게든 우쿄를 설득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였고 두 번째는 우석 본인이 우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비록 겉보기에 몸집도 너무 작고 나이도 자기보다 한참 어려 보이지만
자기보다 반년 위의 형이고 수재라는 게 자신에게 본보기가 될 것 이어서였다.
그리고 재작년에 동생과 어른들이 명색이 집안의 종손이라는 우쿄에게 대하는
태도가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집안의 종손역할을 했던 자신이 보기
미안할 정도로………
마지막으로 큰 엄마-지만 나이보다 너무 젊다 못해 어려 보여서 마치 예쁘고
상냥한 누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인 우경에게 이성異性적인 동경심을 갖고
있어서 그녀에게 좋을 법한 일은 뭐든 하고 싶었다.
한가지 문제는 우쿄는 한국에 왔을 때 결심한 대로 한국의 친가쪽 사람들에게는
그네들이 원하는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을 작정이라 석주나 수진 등의 친
가족들을 제외하고 누구 앞에서든 “절대” 한국어는 쓰지 않을 작정이었
고 그 점에서 아직은 우석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렇다고 이제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1년 동안 생 초보 수준으로 배운 우석이 일본어를 그리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우석도 지금까지 받은 항일민족교육 탓에 일본어 자체에는 거부감이
있다 보니 결국 온라인에서처럼 두 사람은 영어英語로, 뒤 이어서 두 사람이
취미로 배워서 두 사람 공히 가장 잘하는 독일어로 대화할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여튼 분명한 것은 지금 당장 사촌동생 중에 우쿄와 친한 사람은 우석이
유일했다. 일단은 사촌형제라기보다는 친구로서……….
사실 우쿄로서는 나이 차가 그리 나는 것도 아니고 자기보다 형 같은 우석이
자기를 형으로 부르는게 부담스러워서 먼저 그냥 친구로 하자고 했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아직도 뭐가 뭔지 좀 어리둥절하달 까, ….->
<-그래도 큰 아버지랑 큰 어머니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잘 한 거야. 애초에 친 부모가 맞으니까……..- >
<……………. 實はそうだが……(실은 그렇지만)…….>
우쿄의 표정이 뭔가 납득이 안가는 듯해 하는 인상을 남기며 약간 우울해졌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하나하나 현실에 타협하면서 나를 길러주셨던 분들을,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 나라-일본-를 잊게 되기라도 한다면…………… 난 내
자신을 용서 못할 거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나는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정신적으로- 죽은 게 돼. ->
우석은 우쿄의 말이 공감이 가고 있었다.
확실히 비록 직접 배 아파서 낳아준 친 부모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애정을 받았다면 마음으로는 친 부모로 인식하는 게 오히려 당연할 것이었다.
그런 고로 전주의 어른들의 “친 부모를 알았으니 무조건 친부모를 따라가는 게
당연한 거고 그러니 친 부모를 따라 일본을 버리고 어엿한 한국인이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지금까지의 부모는 친부모도 아닌데 어떠냐”는 강요는
우석이 생각해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즉 우쿄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을 애정으로 길러주었던 부모들이고 그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어른들이 문제삼고 강요하는 것은 국적國籍이니 너무나
비인간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우쿄가 태어났을 때의 상황을 알고 났을 때 우석의 눈에 보이는 어른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평소에 그렇게 욕하는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인”의
그것과 하등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때 밖에서 부르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 우석아. 우경아, 아니. 케타로군, 저녁 먹자. >
그 소리가 들리자 우석은 책상의자에서 일어나 축 쳐져 있는 우쿄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쨌든 잘 된 일 아니야? 오히려 바라던 바일 거야, 돌아가신 분들도……
좋게 생각해, 케이.->
<-물론 그렇지…..- >
우쿄는 살짝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였다.

석준의 집에서 같이 먹는 저녁은 이 집의 안주인인 영희가 주로 준비하고
손님인 우경과 수진이 곁에서 영희가 만류하는데도 곁에서 거들었다.
이집의 맏이고 딸인 미진은 부재중이었다.
<어때요, 제수씨. 새 집이? >
식사 중에 석주는 제수弟嫂인 영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동네는 처음인데 그런대로 적응이 되는 것 같아요. 형님이 많이
도와주시기도 하고… >
<어머, 별로 도와 준 것도 없는데….. >
<뭘요. 이삿날에 남편도 청廳에 중요한 일 때문에 자리에 없었는데 형님이 옆에
안 게셨으면 이사도 어떻게 했나 싶더라니까요? >
석준의 아내이고 우석의 어머니인 영희의 공치사功致辭에 우주를 끌어안고
직접 밥을 먹이고 있던 우경은 약간 수줍어하면서 겸손해 했다.
아내의 말에 젠틀한 짧은 헤어스타일에 금테 안경의 석준도 맞장구를 쳤다.
<역시 형수는 누가 뭐래도 우리 집안의 맏며느리니까 말야. >
<서방님도 참!!! >
우경은 실은 석준의 처인 영희보다 네 살은 아래였다.
하지만 우경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사려 깊게 행동해온 덕분에 -우쿄의
일본군 코스프레 사건 전 까지만 해도-어른들에게는 믿음직한 맏며느리로써
인정을 받고 동서들에게도 큰 언니로 존경 받고 있었다.
영희도 비록 나이가 네 살은 아래고 권씨 집안에 자기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집안의 맏며느리인 우경을 언니로 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영희는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우쿄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갈비찜이 담긴 접시를 우쿄의 앞으로 밀었다.
<입에 맞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먹으렴, .. 케타로군. >
<はい,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おばさま。(네 감사합니다, 아주머님)>
무척 공손했지만 여지없는 일본어에 영희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영희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우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우쿄의 태도가 처음 집들이 때와는 좀 누그러진 느낌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달 여 전에 다시 만났을 때는 거의 일촉즉발一觸卽發이었기 때문이다.
잔뜩 경계하고 있던 우쿄에게 오래간만에 만나 반갑다며 아무생각없이
그저 어른들이 부르는 대로 “우경이”라 불렀다가 냉정하게 정정을 요구
당했었고 그때 우쿄의 차가운 태도에 뭔가 단단한 벽이 눈 앞에 가로막혀
있음을 느꼈던 영희와 석준은 그 뒤로 우쿄를 부르는 호칭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친 아버지인 석주가 그렇게 부르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우쿄로서는 다른
한국인들이 자신을 일본식 외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후후, 그런데 전에 봤을 때는 엄청 순하던 녀석이 그때는 좀 무섭데?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게……>
석준은 한달 전의 우쿄의 모습이 생각나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랬나? >
그날 일을 생각하면 석준 부부에게 내심 송구悚懼한 느낌이었던 우쿄는
그날 일이 어른들 입에 오르내리자 부끄러워졌다.
그때 당장에 우쿄로서는 석준 부부도 여느 권씨 집안 사람들과 달리
여겨지지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런데, 아주버님, 우경이가, 아니… 케타로군이 재작년보다 얼굴이 더
예뻐진 것 같네요. >
<그런가요, 제수씨? >
<하긴 솔직히 2년 전에 봤을 때도 그렇지만 생김새가 더 여자 같아진 것 같아.
나이가 들면 좀 남자다워질까 했는데…………>
석준은 솔직한 평을 내놓았다. 석주의 입가에 쓴 웃음이 흘렀다.
<역시 사내아이는 우석이처럼 듬직해야 좋은 데…. >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아주버님. 남자아이도 예쁘니 무척 귀여운데요? >
<하긴 우리 집 애들은, 우석이는 사내자식이라고 떡대가 있어 갖고 귀염성이 없고
미진이도 여자애가 저 잘난 줄만 알고 성깔만 있어가지고 말이지………>
하기는 우석은 엄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다시피 하다 보니, 딸인 미진은
제법 미인이긴 하지만 성격상 우쿄에게서 느껴지는 귀염성과는 전연 무관했다.
우석은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귀염성 없다는 걸 탓하는 게 희한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수진이가 제일 예뻐. >
<아잉~~~ 몰라요, 작은 아빠♡ >
석준의 난데없는 칭찬에 수진은 생기발랄하게 수줍은 애교를 부렸다.
<뭐, 이만하면 다들 잘 자라 준 거 아냐? 그런데, 권 우석!!>
석주는 이제 자신이 맡은 반의 학생이 된 조카에게 큰 아버지에서 갑자기
선생님으로 태도를 바꾸었고 우석은 약간 긴장했다.
<네 기록카드를 검토했는데 말야. 작년 초까지 중간에서 약간 상급이던 녀석이
작년새 최상위 권으로 성적이 올랐는데, 그것도 수학하고 영어가 말야.
그 두 개는 좀 약했었잖아. 좀 수상해. 무슨 고액과외라도 받은 거냐? >
그러자 우석, 아니 석준 가족들이 일제히 한국식 갈비찜을 별로 비싸지도
않은 옷에 국물이 튀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베어먹고 있는 우쿄를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고액은커녕 공짜지만 아주 훌륭한 과외 선생이 있었던 건 분명해. >
<그래? 얼마나 대단한 선생이길래? >
<아, 형 옆에 있잖아? >
그러자 석주는 옆의 아들을 흘끔 보고는 “요 녀석? “ 하는 표정으로 반대편
손가락으로 우쿄를 가리켰다.
<어머. 오빠도 우리오빠한테 배웠던 거야? >
<뭐? 너도? 뭐야, 우경이 너, 일본에 있던 녀석이 언제 동생들 공부를 봐준 거냐?
그것도 한국하고는 완전히 인연 끊다시피 하던 녀석이? >
석주는 아리송했다.
실은 맨 처음에 수진이. 곧 이어서 수진을 통해 우쿄의 이 메일 주소를 알게 된
우석이 우쿄와 이 메일을 주고 받다가 곧 이어서 채팅을 하는 중에 늘 독일어와
영어로 대화를 하다 보니 우쿄의 대학수준 영어가 우석에게 전수된 것이고
수학數學과 과학은 공부 중에 막히는 부분을 채팅 중에 우연히 우쿄에게
물어보다가 나중에는 아예 정기적으로 우쿄에게 과외를 받게 된 것이다.
수진의 경우는 사실 원래 우석보다도 성적이 상위였고 집에도 두 부모가 간간히
지도를 해줘서 그저 모자라는 부분만 보충하는 정도였지만 검찰공무원으로 늘
바쁜 아버지나 대졸학력이지만 자녀를 가르치기에는 능력이 모자란 어머니.
동생에게 다소 무신경한 누나 밑의 우석은 효과가 확연했다.
한가지 사소한 문제는 영어는 채팅에서는 어차피 서로 말 소리를 들으면서 하는
게 아닌데다 한국에서 볼 때는 우쿄가 발음이 좀 어눌하다 보니 발음에 대해서는
우석은 따로 공부를 해야 했지만…..
그렇더라도 동생에게 별로 자상하지 못한-아니 동생에게 다소 이기적으로 대하고
툭하면 동생과 티격태격 하기가 일쑤인- 미진과는 달리 우쿄가 무척 자상하고
세세히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우석의 성적향상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었고 우쿄에게 그저 사촌 형 이상의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쿄가 자신의 친형이었다면, 아니 외모나 성격이 다소 여성적인 우쿄가 차라리
여자로 태어나서 자기 친 누나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보기도
했다.
<그랬어? >
석주는 우쿄가 수진하고만 간간히 이 메일을 주고받는다고만 알고 있었던
탓에 우쿄의 의외의 일면에 놀랐다.
한국의 친가에 원한怨恨만 가지고 있을 것으로만 생각해서 사촌동생들에게도
차갑게 남 취급만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팅 등으로 우석과 친해지고 거기다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니!!
<사오토메군이 우리 우석이한테 형 노릇을 아주 확실히 했다니까…… >
석준의 칭찬에 우쿄는 얼굴이 빨개져서 몸을 움츠렸고 석주와 우경은
황당함과 대견함이 뒤섞인 시선으로 우쿄를 쳐다봤다.

<역시 제수씨가 만든 갈비찜이 맛이 최고라니까….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놀러 와. >
저녁식사와 티타임 후에 석주 가족이 집으로 가기 위해 내려오자 석준과 우석이
주차장까지 배웅하기 위해 내려왔다.
< 그 때는 형수의 일본식 스키야키로 부탁해. >
<어머. 그거는 그때 우리 케타로짱 때문에 처음 해 본 거라 그렇게 잘 만든 음식이
아니었는데…. >
친정의 언니들처럼 요리솜씨가 무척 뛰어난 우경이지만 그 전에는 일본식을
싫어하는 집안 사람들 때문에라도 요리는 한국식만 만들었고 그 바람에 일본식
요리법은 거의 잊고 있었는데 우쿄가 한국으로 오게 되자 아들을 위해 일부러
일본요리를 다시 배웠었다.
심지어 츠케모노(일본 김치)담그는 법도 잊고 있다가 일본에서 언니들에게 한국
김치 담그는 법을 전수하면서 다시 전수받기도 했다.
그런 뒤 몇달 전 우쿄가 한국으로 오기 전의 전주의 시댁의 가족모임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본요리 몇 가지를 만들어 올렸었다.
일본음식을 내놓았다고 혼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맏며느리에게 찔리는 게 있었던
시부모들은 잠자코 우경이 내놓은 일본요리들을 별 말 없이 먹고 나서 우경의 솜씨를
칭찬했다.
신혼 때 우경이 시부모께 점수를 따고 싶은 마음에 없는 솜씨까지 동원해서
일본요리-당시에는 한국요리는 배운 게 없던 터라-를 정성껏 만들었지만 처음에
너무 어린 일본인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었던 시 아버지 수양은
“한국인은 그저 한국식 된장국에 김치”라며 외면해버려서 우경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겨줬던 적이 있었는데 맏손자와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 탓에라도 인지 그 때와는
반응이 달라진 게 사실이었다.
<아니, 그 전에 회식 때문에 간 고급 일식 집에서 먹었던 스키야키에 비하면
형수가 만들었던 게 최고였어요. >
<어머, 정말이요? >
<정말이라니까요. >
좋아하는 우경에게 진심을 담아 칭찬해 준 석준은 곧 이어서 우쿄에게
친절한 표정을 보였다.
<よく遊びに來るようにしなさい, うちの宇錫君の 勉强も以前のようによろしく
お願いして……
(자주 놀러 오도록 해라, 우리 우석이 공부도 이전처럼 잘 부탁하고…… )>
< はい, 分かりました, おじさん。(네, 알았습니다, 아저씨.)>
석준은 예의는 바르지만 여전히 어색한 우쿄의 인사를 받고 나서 우쿄를
안았다.
<근데 형, 누가 뭐래도 난 이 녀석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단 말야.
우리, 아들 바꿀까? >
< 窮屈です。(갑갑해요;;;;;)>
고교시절에 학생야구선수로 날리면서 다듬어진 탄탄한 가슴팍에 안기려니
너무 꽉 껴안아서 갑갑하고 거기에 민망하고 어색했다.
석준은 어린아이 같이 부끄러움을 타는 우쿄가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우석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처음이었고 약간 질투가 나긴 했다.
<됐다, 인석아!! 국적마저 다른 아들 끼고 있으면 골 때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냐.
뭐 하긴 두 안경잡이가 그러고 있으니 좀 어울린다만…. >
석주의 말에 석준은 훤칠한 키와 준수俊秀한 외모에 안 어울리게 익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실제로 같은 안경착용자라도 여자아이였다면 몇 남학생들의 안경모에를
유발시킬지도 모를 스타일의 우쿄와는 달리 석준은 착용하고 있는 금테 안경이
지적이고 냉철한 엘리트 분위기를 풍겼다.
석주는 군대시절에 맨눈으로 1KM이내의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는 명사수였던
실력이 아직도 생생할 만큼 시력이 좋아서 굳이 안경이 필요 없었고 수진도
시력은 아버지 못잖았으되 우경은 어쩌다 안경을 사용할 때가 있는 정도지만….
화기애애한 마중 도중에 석준과 우석은 뭔가 싸늘한 눈길을 느꼈다.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큰 아버지. >
<어. 응 이제 들어오니? >
<오래간 만이구나, 미진아. >
석준의 장녀인 미진이 귀가 중에 아파트 앞에서 일행과 마주쳤고 우쿄는
당장에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다운되었다.
권씨 가문의 가장 장손녀長孫女인 미진은 자기보다 2.3살 아래의 우쿄와는
표면적으로 “개와 원숭이 같은 사이犬猿之間”이다.
맨 처음에 우쿄가 그녀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된 계기로 처음 한국으로 온
우쿄에게 그녀가 이렇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얘!! 친 아빠가 한국사람인 네가 무슨 일본사람이니? “
당연히 우쿄로서는 불쾌하게 여겼고 그 뒤로 자신을 핍박하는 전주의 노인들과
동종同種으로 느껴져 적대감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대로 봐줄만한 외모지만- 부드럽고 상냥한 일본의 누나들과는
달리 시쳇말로 지랄맞은 성격으로 누나 말을 죽어라 안 듣는 사촌 남동생들에게
차갑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도 이질적으로 느껴진 것도 그녀를 안 좋아하는
원인이었다.
미진은 아니한 말로 독살스럽고 성질 나쁜 마녀魔女로 밖에 안보였다.
거기다 올해에 다시 봤을 때부터 우쿄에게 심술 맞은 눈길을 보내기가 일쑤였고
하여튼 우쿄로서는 그녀가 껄끄러웠다.

한편 그녀는 우쿄가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었다.
우쿄는 미진이 그냥 거슬린다는 수준이지만 그녀는 우쿄가 심하게 밉게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시기와 질투가 섞여서…………처음에 우쿄도 여러 사촌동생들 중에
하나로만 여겼던 그녀는 처음에 어른들의 얘기만 듣고 항일무장독립투쟁이력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기는 집안의 종손宗孫임에도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하는
사촌동생이 당돌하게 여겨졌다.
그 뒤에 일본에서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의 높은 뜻을 져버린 채
아무 말 말고 한국으로 가자는 권유-라기보다는 강요-를 차갑게 뿌리치는
모습도 괘씸했다.
땅딸막하고 왜소한 몸집에 약해빠지고 거의 여자 같은 외모도 그녀의 익숙해진
남성관으로는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안긴 채 다소 응석을 부리는 모습을 보이는 우쿄를 보자
질투심까지 일었다. 우석도 할아버지의 과도하게 엄한 교육 탓에 여태 아버지에게
안긴다거나 한 적이 없었지만 미진은 최근 들어 아버지가 자신에게 다소 차가워져
있었던 참이었다.
할아버지인 수양의 손자 교육 방침이 남자아이는 할아버지 밑에서 미래의
항일애국투사로 자라야 하고 여자는 부모 밑에서 자랄 수는 있지만 -여자 아이답게
귀여움 받을 권리는 박탈당한 채- 공부벌레로만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석도 중학교 2학년 쯤부터 부모와 겨우 같이 있게 되었을 정도였다.
일부러 친가와 거리를 두었던 아버지 탓에 그래도 최소한 엄마에게만이지만 적당히
응석을 부리고 귀여움 받으며 자랄 수 있었던 수진을 제외하고 권씨 집안의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사소하지만 실은 중대한 불행이었다.
생각해보면 우경으로서는 아들인 우쿄는 한국에 데려왔어도 그런 삭막한 환경에
우쿄를 키울 바에는 차라리 결혼 전에 일본에 떼놓고 와서 언니인 카스미에게
맡겼던 게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싶었다.
수양으로서는 재작년에 일본에서 데려왔던 우쿄를 그나마 친 부모와 같이 있게
했던 것만도 크게 양보했던 셈이지만………….
<…….. 今晩は, ミジンさん。(………….안녕, 미진이 누나.)>
석준에게서 풀려나면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미진에게 먼저 인사했다.
하지만 미진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까 우리 아빠한테 안겨 있는 모습이 꼭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 같더라?
하긴 “쪽발이들은 원숭이”들이니까……>
순간 우쿄는 다소의 현기증과 함께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게 목구멍까지
올라오려다 간신히 참았다.
우경과 수진은 민망해 했고 석준은 안색이 확 바뀌며 딸에게 큰 소리를 쳤다.
<미진아!!!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
미진은 야단을 치는 아버지에게 오히려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본 뒤
성큼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 미안해, 형. 저 녀석 괜히…..>
<미진이, 우리 우경이한테 아직도 감정이 남은 거야? >
심기가 불편해진 석주의 질문에 석준은 괜히 가렵지도 않은 뒷 머리를 한 손으로
긁으며 우쿄에게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에 지기 싫어하는 녀석이 난생 처음으로 그것도 자기 사촌동생에게
졌다고 생각해서겠지…. 나 참!!
あ, 不快だったら謝るよ。 許してくれ, 早乙女君。
(……아, 불쾌했다면 사과하마. 이해해 다오. 사오토메군.)>
<いや. 大丈夫です。(아니, 괜찮습니다.)>
<-나참, 누나는 괜히….->
<-나는 괜찮대도…..->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우쿄는 기분이 언짢아서 목이 약간 메어 있었다.
자기가 왜 “남의 나라” 땅까지 와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석준이 사과한 것은 이런 속내를 알고 있어서이고 거기에 재작년의 일이 워낙
마음에 걸려서이다.
석준은 풀이 죽어 있는 우쿄의 윤기 있는 생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위로해 줬다.

<……. 아비인 네가 좀 다독여주고 그래. 너무 야단만 치지 말고…..>
석주의 말에 응답하는 것으로 석주 일가가 탄 승용차를 배웅한 뒤 석준은
굳은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관에 들어서자 미진의 방에서 이미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누나, 좀 적당히 해!! >
<뭐야, 너도 지금 그 자식 편을 드는 거야?!! >
<누나가 해도 너무해서 그런 거야!! 케타로가, 아니 우경이 형이 뭘 얼마나
잘못했는데? >
<웃기고 있네, 아무것도 모르는 게!! >
두 남매의 언쟁은 석준이 미진의 방문에 기대서 몸 뒤의 방문을 가볍게
두들기는 것으로 끝났다.
<그만하고 우석이는 나가 있거라. 그리고 미진이 너, 나 좀 보자. >
석준은 금테 안경의 렌즈에 조명 빛이 반사돼 눈빛이 가려진 석준의 표정이
차갑게 변해 있었다.
우석이 나가자 방문을 닫은 석준은 아직 외출복-검소하고 단정했던 우쿄와는
달리 유명 메이커로 화려하게 도배를 한- 을 갈아입지 못한 미진을 침대에
걸터앉게 한 뒤 책상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방금 네가 보인 분별없는 태도, 이 아빠로서는 무척 실망이다.
내가 아는 권 미진은 최소한 그렇게 지각 없고 비 이성적인 아이는 아니었어. >
<뭐가 말인가요? >
딸의 냉랭한 반응에 석준은 속으로 아연함을 느꼈다.
<몰라서 묻니? 방금 우경이는, 아니 사오토메군은 너한테 따뜻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데 너는 그 자리에서 그 애에게 다짜고짜 모욕만 주었잖아?
네가 그 아이를 사촌동생으로 생각했다면 누나로서 보일 태도는 아니겠지?
그리고 이제 앞으로 큰 엄마랑 수진이는 어떻게 얼굴을 볼 거야?>
“누나”라는 말에 미진은 냉소冷笑하는 태도를 보였다. 석준은 딸에 건방진
모습에 노여움이 일었지만 일단 참았다.
기실 대학 진학 후 미진은 삐뚤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아버지로서
걱정과 노기怒氣가 일던 참이었다.
<전 그렇게 할아버지 말 안 듣는 녀석에 일본 놈 따위는 사촌동생으로
둔 적 없어요.>
<닥쳐!! 네가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그 아이가
일본사람으로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은 그 애 운명이고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권리야. 애초에 우리가 그걸 간섭하고 차별할 권리는 없었어!!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것을 강요했던 것 자체가 잘못인 거야!! 그리고……….. >
그러자 미진은 아버지의 말에 뭔가 반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석준은 딸의 반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 거기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사오토메 군을 미워하는 것은 그 아이에게
턱도 없는 우월의식만 가지고 오만하게 대했다가 콧대를 꺾여서였고 그래서
앙심을 품었던 거잖아. 안 그래? >
그러자 미진은 화들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에요!! >
<아니긴 뭐가 아냐? 네가 사오토메군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는 거
이 아빠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미진은 뭔가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항변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미진이 우쿄를 미워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스스로 “천재天才”라고
자부해 온 그녀의 자존심을 우쿄가 완전무결하게 깔아뭉개 놓아서였다.
우쿄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녀는 -여자라는 게 어른들에게 걸려서 그렇지-집안의
자랑이었고 여타 사촌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급생들보다 훨씬 우월했다.
중학교 때에도 미구에 살고 있는 외가의 친척의 초청으로 진학한 미국의 유명
사립학교에서조차 그녀의 성적은 훨씬 월등했었다.
더구나 남동생인 우석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모를 떠나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다 보니 부모 밑에 혼자 남은 미진은 거의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다시피 해서
자라 하늘을 찌를 듯한 그 오만傲慢한 자존심으로 공부에만 매달려서 제법
친구들보다 앞서는 외모나 스타일임에도 여태 남자친구를 만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아니, 웬만한 남자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던 그녀였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골수 페미니스트였다.
그런데 이 일본에서 왔다는 사촌동생은 처음에 본 나약한 외모와는 달리 학교
성적에서부터 미진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 한국나이로 고작 15살짜리-그나마도 보기에 초등학생으로나 보이는-
가 자신과 같은 고 2라니까 심상치 않게 느껴졌지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한국과 미국의 명문학교를 섭렵한 그녀와는 달리 일본의 자기 고향이라는 도쿄라고는
해도 변두리의 그것도 거의 시골 안에서만 자라며 그저 그런 보통의 공립학교만
다녔다는 데다 예쁘지만 나약해 보이는 외모, 유행이니 유명 메이커니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식의 -단정하고 품위는 있지만- 다소 촌스런 옷차림 등만 보고
얕잡아 봐서 무시했는데 그 해에 고등학교까지 때려치우고 바로 다른 학교도 아니고
일본 명문의 도쿄 대에 그것도 최상위권으로 진학했다는 소식에는 충격을 받았었고
그 충격이 생각보다 너무 커서 라이벌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싫든 좋든 혈연상으로 사촌동생이고 거기다 어른들에게 절대 져서는 안 된다고 배워
온 일본인인 우쿄에게 진 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친 할아버지가 일본의 종손에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것도 늘 어른들의 신망을
받아왔던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의 처음 지망대학은 미국의 하버드 대와 차선책으로 서울대 영문과였고 비록
학년으로는 우쿄보다 1년 뒤지지만 수석으로 진학할 자신이 있었었다.
그런데 미국 대학은 지금까지의 자신감이 무색하게 보기 좋게 낙방했고 서울대도
면접시험에서 어이없는 실수로 미역국 먹는 바람에 하버드 대는커녕 서울대보다도
약간 떨어지는 L여대로 진학한 것이다.
L대도 명문대였고 어른들의 칭찬은 대단했지만 그녀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굴욕과
좌절감을 맞본 순간이었다.
그 패배감이 채 가시기 전에 우쿄가 모교를 휴학하고 한국으로 유학 온 것이다.
<…. 그래요. 제가 다른 녀석도 아니고 그런 “촌닭”한테 졌다는 게 너무 억울해서
그랬어요. 됐나요? >
미진이 아버지를 외면하며 쌀쌀맞게 내뱉은 “촌닭”이라는 말에 석준은 언성이
커져버렸다.
<너, 정말 그것밖에 안 되는 녀석이었냐? 너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그 아이는 그런
속 좁은 생각으로 동경대까지 간 게 아니다. 알겠니? 네가 진 것은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 못 가고의 문제가 아냐!!
너보다 어린 동생한테 그런 유치한 피해의식 같은 걸 가져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리고 촌닭이라고? 그래 말 한번 잘했다!! 무턱대고
비싼 거나 찾는 너보다야 훨씬 낫겠지. 네 큰 단점은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무시하는 점이야, 알아? 사오토메군을 무턱대고 싫다고 하지 말고 그 아이를
거울로 삼아봐. 알겠어? >
석준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와버렸다.
거실로 향하며 무심결에 손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 안의 이물질의 존재를 깨닫고 그걸 꺼내었다.
석준의 바지주머니에는 저녁에 우쿄가 석준의 가족들에게 하나씩 선물한
물고기 모양의 목제 열쇠고리가 석준의 것과 미진의 것이 같이 들어 있었다.
모양이 단순하면서도 그려 넣은 문양이 신비스런 자못 섬세한 느낌의 나무조각이
처음에는 일본의 어느 관광지의 기념품인 줄 알았는데 우쿄가 직접 만든 것이라는
데 모두들 놀라워했었다.
거기다 형수의 말이 만화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인 우쿄가 작화지에다 무척
예쁘고 귀여운 만화그림을 그리기도 하는게 당장 만화가로 나서도 될
정도라는 것이다.
하긴 그림이나 서예도 수준급이어서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친가의
할아버지를 감탄시켰었으니 그 녀석 도대체 못하는 게 뭘까 싶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쿄가 집안의 애물단지인 것은 그가 일본인이기 때문이고
그거만 아니면 집안의 자랑거리였을 것이다.
<도대체가, 어떻게 내년에 성인식을 치를 녀석이 제 사촌동생보다 나이
값을 못하니…… >
거실에 나와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아 담배를 입에 문 뒤 석준이 나오기 전까지
미진의 방 쪽을 향해 촉각觸覺을 곤두세우던 영희와 우석 모자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뭐야, 미진이 언니!! 정말 해도 너무 하네!!! 원래 왕 재수지만 정말 다시 봤어!!>
수진은 우쿄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서 혼자 열을 내고 있었다.
<수진짱, 참아. 惡口を聞いたことは(욕을 들은 건) 나니까…… >
우쿄는 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고 있는 수진을 위로하며 진정시켰다.
<솔직히 오빠가 왜 욕을 들어야 하는데? 일본사람인 게 그렇게 죽을 죄야?
그리고 오빠는 왜 참고만 있는 건데? 오빠가 그렇게 천사天使표야? >
수진은 오빠가 재 작년에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도 아직도 남았나 싶어서 너무
가엾다는 생각에 너무 분했다.
수진도 가끔이지만 조금만 잘못해도 반半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하고 사촌 남동생 들에게는 -솔직히 유난히 예쁜 모습
때문에라도-짓궂은 장난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다행히 수진이 완력腕力 등이 남자애들 못지 않고 머리도 좋아서 동생들이
수진에게 된통 당하기 일쑤였지만 그럴 때마다 자기에게 친 형제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했었고 재작년에 우쿄가 한국에서 수모를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오빠의 일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더욱이 수진에게 우쿄는 한국의 친 가족들의 존재를 안 순간에 누구보다
수진을 여동생으로 받아들이며 처음으로 남매간의 애정을 지금껏 심술궂기만
한 사촌동생들에게 질려왔던 수진에게 느끼게 해주었고 심지어 일본으로
돌아가 버린 뒤에도 부모들 몰래 전화나 이메일을 보내면서 오빠로서의
애정을 보여주었던 너무나 착하고 다정다감한 오빠여서 더욱 그러했다.
미진의 행태는 그래서 수진의 감정을 자극했다.
우주는 우쿄의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잠만 자고 있었다.
운전중인 우경과 조수석의 석주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석주는 괜히 아내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아내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지만 석주로서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경이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입을지 걱정해야 했다.
겉으로야 태연한 채 하고 남편에게는 애교가지 부리며 웃는 모습을 보였지만
속으로 얼마나 서러워하고 슬퍼했을까?
상당히 어색해진 차 안의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우경은 신호대기 중에
네비게이션을 케이블 TV모드로 바꾸었다. 그러자 드라마 채널에서 옛날에
히트 쳤던 “여명의 눈동자”가 방영되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완전 일본군 군장軍裝
차림의 한국인 학도병-그것도 원작소설에서 석주등과 종씨宗氏인-이 일본군
오장伍長-하사-에게 갈굼당하며 얻어터지고 있었다.
“일어나라, 가네야마. “”하잇!! 이등병 가네야마 ….””퍽!!!”"빠가야로.죠센징!!! "
< 何よ, この雰圍氣把握もできないバカ箱が……
( 뭐야, 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바보상자 같으니라구… )>
기대를 철저히 어긋난 TV에서 보이는 상황에 불쾌해진 우경은 짜증을 내며
다른 채널로 바꾸었다.
석주는 혼잣말 조차 한국말로 할 만큼 완전히 한국인이 되었던 아내가 근
15년 만에 일본어로 혼잣말을 하며 투덜거리자 왠지 낮설게 느껴졌다.
<임자, 방금 그 장면 보고 통쾌하다고 생각 안했수? >
<왜 내가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데요? >
<<워낙에 쌓인 게 많을 텐데 그 철딱서니 없는 것까지 그러니…. >
< 으이그~~~! 뭐예요?! 그럼 집에 가서 TV에서랑 똑같이 해보실래요? >
<아니, 사양하겠어!! >
남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우경은 앵돌아진 표정을 지으며 한쪽 볼을
부풀렸지만 살짝 웃음기가 감돌았고 곧 이어서 두 부부는 쿡쿡대며 웃다가
큰 소리로 웃느라 신호를 놓쳐서 뒤차에서 경적을 울려댔다.
두 부부의 웃음으로 한동안 저조해 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사실 두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던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겨우 웃음을 그친 석주는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려서 우쿄를 달래었다.
<우경아. 미진이 누나의 말은 그렇게 신경 쓰지 말거라. 그저 이런저런
일로 네게 질투 나서 그런 거니까…. 여자들이 원래 그래요. 남자인 네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줘야지, 안 그래? 수진이 너도, 알았지?>
<はいっ!!(네)> <그럴게요. >
두 남매의 만족스런 대답을 들은 석주는 생각난 듯 우경에게 말했다.
<아, 경아, 가는 길에 잠깐 학교 앞에 들르면 안될까? >
<학교 앞에요?>
<어, 종수네한테 우경이 옷을 부탁했었잖아?>
<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요. >
잠시 뒤 우경이 차를 세운 곳은 석주가 근무하는 학교 앞의 교복
집으로 그 교복 집은 바로 석주의 고향 후배가 상경해서 차렸던 가게이다.
일요일 저녁임에도 가게는 특별히 문을 열고 있었다.
<아이고!! 성兄님!! 오셨어라? >
<응 그려. 근디 우짜 일요일 저녁에 가게를 열었다냐? >
석주도 우경이 일본의 친정에서 일본어를 쓰고 한국에서는 간간히 마산
사투리를 쓰는 것처럼 고향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때때로 전라도 사투리를
쓰게 된다. 단 정작 친가에서는 표준어를 쓰지만…..원래 전주의 토박이
양반가였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중국대륙을
전전한 뒤 해방 후에 일단 서울에 정착했고 석주가 중학교 입학할 무렵에 육군
장성이었던 수양이 논산에 부임하면서 이 참에 가문의 선산先山이 있고 일부
친척들도 남아 있던 전주에 다시 터를 잡은 것이다.
즉 석주는 원래 서울 태생이니 집에서 서울 표준어를 썼지만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전주에서 지냈던 터라 전라도 사투리도 익숙해졌고 그 만큼 전주를
사실상 고향으로 생각했던 셈이다.
평소의 점잖은 석주의 입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나오자 밖에서 우경과 수진은
너무 우스워서 입을 닫고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쿄는 석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우경과 수진이 왜 웃는지도
이해가 안 갔다.
한국인이 일본어의 오사카벤-관서 사투리-이 왜 우스운지 이해가 안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 여태 애들 교복을 찾으러 오는 아들이 있응께 안 그라요? 아유, 형수님도
오셨구먼요. 아 추운디 우짜 안 들어 오신다요? 아이구 수진이랑 우경이도 왔네이?>
우쿄는 순간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을 번 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우경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웬만한 의상실
못잖은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매장賣場 안으로 들어서서 사장인 종수의 안내로
가운데의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종수는 손수 커피를 타서 석주들에게 접대했다.
매 장안에 진열된 석주의 학교 교복-검은 색의 완전히 구식인 일본 것과는 달리
신사복 같아서 일본 것보다 객관적으로 훨씬 세련되게 보일-은 재작년에 우쿄도
한 3개월 될까말까하게 입은 적이 있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교복만은 일본의 여느 명문학교 못잖았던 게 신기했던 게 기억에 새로웠다.
우쿄는 가게 안을 잠시 돌아보다가 벽의 포스터 중에 하나에 눈길이 가는
순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저거 여직 붙어 있어야? >
<거기 여자 모델이 워낙에 이뻐 놓아서 아직도 머스마들이 난리가 아니랑께요?
덕분에 매상도 짭짤허고…. >
석주는 아직도 학교 안의 화제인 포스터 안의 석주의 학교의 여자교복차림의
모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누구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근디 진짜 누구여? >
<있어요. 그런 아가….>
종수는 우쿄를 흘끔 보면서 다소 능글맞게 웃었다.
우경과 수진은 상당히 예쁘게 생긴 포스터의 여 주인공을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우경이 옷 있잖여… >
<아. 그거 잠깐만 기다리소, 성님. >
종수는 잠시 뒤에 매장 뒤의 창고로 들어가서 봉인된 투명 비닐봉지에 담겨 있는
검은 색의 옷을 가져와 우쿄에게 건넸다.
우쿄는 다소 설레는 표정으로 봉투의 접착제로 봉인된 입구를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내용물을 꺼내었다.
안의 내용물은 일본에서 입던 가쿠랑ガクラン이라고 부르는 고등학교 교복과
완전히 같은 정장이다.
우쿄의 부탁으로 석주가 사진을 종수에게 보여주며 특별히 주문한 것이다.
석주의 감각으로는 너무 후졌고 무슨 일본군복 같아서 별로라고 생각한 석주는
다소 불만스럽게 물었다.
<일단 만들긴 했다만, 첫 등교 일에 이런 옷을 입어야겠냐?>
<그냥 다시 입어보고 싶은데 持っていることが(갖고 있는 게) 일본 집에 있는데다
ズボンは足が短いんですよ。(바지는 다리가 짧거든요.)>
전에 병문안 왔던 혁의 말 때문인지 문득 다시 입어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우쿄가 그 교복을 입었던 기간이 1년2개월 안팎이었다.
최소한 대학교 첫 등교일 동안이라도 입고 싶지만 그렇다고 다시 일본으로
가거나 일본의 집에 항공택배로 부쳐 달라 하기에 시간도 없고 해서 아예
정장으로 새로 만들었다.
실은 한국의 고등학교에서도 입었던 교복도 한국의 집에서 여태 보관하고
있었지만 우쿄로서는 일본 쪽의 것이 더 애착이 가고 자신에게 훨씬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종수는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이다.
<공장에서 말여. 이 옷은 전두환 대통령때 -일제日帝의 잔재를 청산한다며
시행한-교복 자율화 이후로 거의 20년 만에 만들어 보는 거라네? >
<모자도 만들어 줘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옛날에 아빠가 중고등학교 때 것
겉은 걸로 말이야. 그런데 그러려면 머리를 스님들처럼 아주 빡빡 깎아야 하는데......>
< お父さんは (아빠는)~~~>
석주의 짓궂은 말에 우쿄는 눈살을 찌푸렸다.
새침한 여자아이 같아서 무척 귀여웠다.
어젯밤의 부부관계 전에 아내가 한 말대로 아들이다 딸이다, 한국인이다
일본인이다 하는 틀에 박힌 관념을 버리니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한때 억지로
한국사람처럼 만들고 남자답게 만들려고 한 친가의 과욕에 내심 동조했던 게
너무나도 미안하게 느껴졌다.
<어여 가서 입어 보랑께. 한번 보게…… >
우쿄는 종수의 권유로 탈의실에서 입고 있던 스웨터와 남방. 청바지를 벗고
나서 하얀색 와이셔츠 위에 가쿠랑을 착용하고 매무새를 가지런히 한 뒤에
탈의실을 나왔다.
석주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 뭐, 더 낫긴 한데......>
더 나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중고등학교 때의 교복과는 스타일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 まあ!!!(어머나!!)>
<와!! 캡 멋있다!!!>
우경도 수진도 우쿄의 기품 있고 우아한 모습에 감탄했다.
<같은 옷인디도 우짜 우리 때하고는 이렇게 차이가 나부린다요? >
종수는 마치 모델의 옷차림을 살피는 유명 의상 디자이너처럼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때야 완전히 촌놈들 아니었는감? >
잠시 후 입구에서 가벼운 실랑이가 일었다.
<워따 성님. 와 이런다요? >
<아, 이 사람아. 옷값은 받아야 할 거 아녀? 거기다 이거 특별히 만든 거면
다른 것보다 더 값이 나갈 터인디?>
석주가 옷값을 지불하려 지갑을 꺼내려 하자 종수가 만류하는 것이다.
<어이구, 그건 걱정마소. 옷값이라면 이미 받을 만큼 받았응께? >
<그게 뭔 소리여? >
<그란 게 있응게요. 앞으로 우경이가 정장 같은 거 필요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소.>
종수는 괜히 우쿄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우쿄는 멋적게 웃음을 지었다.
실은 이 학교에서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포스터의 여학생은
바로 우쿄였다.
재작년에 가게 앞에 내걸 포스터를 만들 궁리를 하던 종수가 석주와 같이
교복을 사러 왔던 우쿄를 본 순간에 포스터의 여주인공으로 올릴 궁리를 하고
석주 몰래 우쿄를 꼬드겼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우쿄는 세수를 마치고 면 티와 추리닝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기 방으로 향하다가 수진의 방을 우연찮게 흘끔 들여다 봤다.
수진이 화장대에 앉아서 거울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수진짱, 잘 잤니? >
<아 오빠!! 응. 오빠는? >
<나도, 근데 왜 그래? >
<머리모양을 바꾸고 싶은데 어떤 머리모양을 할까 고민 중이야. >
우쿄는 여동생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찰랑한 긴 생머리를 잠시 보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럼, 내가 한번 봐줄까? >
<그럴래? >
우쿄는 동생의 방으로 들어와서 수진에게 빗을 건네 받아서 수진의 머리를
가지런하게 빗어줬다.
<와!! 오빠, 머리를 엄철 잘 빗네!! >
<그래? 가끔 누나들 머리를 빗어드렸지. >
석주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 광경을 목격했다.
<웬 여사잠도女史箴圖야? >
사내녀석이 아침 댓 바람부터 한다는 짓거리가 제 여동생 머리 빗기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여동생한테 다정하고 곰상맞게 대하는 게 사랑스럽게 느껴져
잠자코 지켜봤다.
남성우월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한 가문에서 자란 애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조카들 같으면 여자형제가 있으면 남자랍시고 괴롭히거나 장난질 치기 바쁘지,
저렇게 예뻐해 주거나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는다.
여성적인 분위기가 강한 외가에서 여형제-대개 누나들한테 둘러싸여서
자라서 저렇게 여동생에게 다정한 건지도 모르지만 석주가 보기에도 우쿄는
기본적으로 온순하고 섬세하며 다정다감한 성격이다.
아연한 점은 이 정 많고 온순한 아이가 한편으로 한번 반감을 품거나 하는
대상에게 용서 없이 매몰차고 차갑게 대하는 매서운 면도 있다는 점이다.
이점이 자못 일본적이지만 거기다 유일하게 친가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형질인
강직하고 고집이 센 성격이 거기에 보태지면 대책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문제는 그 곧고 차가운 면이 바로 혈통상 자기 친가에게 잔뜩 날이 선 칼날을
겨누고 있다는 점이다.
석주로서는 유감스럽게도 친가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평가가 없었다.
우쿄는 수진의 머리카락을 빗어준 뒤 양 귓가의 머리를 조금 나눠서 귀와 볼
사이에 두고 하나씩 작은 리본으로 묶어서 애교머리를 만 든 뒤 나머지 머리는
끝에서 한 뼘 정도 위에서 모아서 리본으로 묶었다.
석주는 그 머리모양이 눈에 익었다.
바로 우경이 신혼 때까지 하던 헤어스타일이었다.
예쁜 드레스와 함께 잘 어울렸지만 처음 볼 때는 사뭇 왜색倭色 짙은 머리 모양
이라고 생각했는데 간만에 보니 무척 예뻤다.
평소의 말괄량이 딸이 요조숙녀窈窕淑女로 느껴질 정도였다.
수진은 오빠가 만들어준 머리모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머, 예쁘다!!! >
<そう(그렇지)? 일본에서 누나들이 너 만할 때 자주하던 머리모양이야. >
< 정말? >
만족스럽게 여동생에게 만들어준 머리모양을 살펴보던 우쿄는 문득 여동생이
입고 있는 교복에 눈이 갔다.
<수진짱은 다리가 예쁘고 교복도 무척 귀여우니까, 교복의 스커트가 짧으면
예쁠 텐데…… >
<그런가? >
<거기다 루즈삭스나 오버니삭스 같은 걸 신으면 더 귀여울 거야. >
<그렇겠지? >
외딸로 커서 언니든 오빠든 동생이든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던
수진에게 우쿄는 여러 가지로 신선한 존재였다.
오빠이면서도 자기보다 약간 작은 키에 너무 어려 보이는 외모가 귀여운 동생
같고 성격으로는 마음씨 따뜻하고 착한 언니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친구들의 오빠나 여동생을 둔 사촌남동생들을 보면 대개
여동생들에게 심술궂고 못되먹게 대하거나 하는게 보통인데 우쿄는 너무나
온화하고 상냥한 오빠인 것이다.
그런데 “귀여운 동생” 같다는 생각은 그저께의 일로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우쿄에게 수진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여동생으로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한국생활을 해나가는데 더없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석주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본 뒤 몰래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인석아, 고추 떨어지것다. 사내녀석이 아침부터 그렇게 할 짓이 없어? >

석진은 학교 건물의 현관에서 우쿄를 발견하고 그가 더플코트 안에 착용한
가쿠랑에 의아해 하다가 정장이 사진에서 본 고등학교 교복과 거의 같은 것을
보고 혁이 한 말이 생각나서 황당해 했다. 안 그래도 우쿄의 모습을 여학생들이
흘끔 보고 까르르 대면서 귀엽다고 쑤군대고 있었다.
<어이, 케타로!! >
석진은 친근하게 우쿄의 어깨를 껴안았다.
<짜식!! 오늘 내일 한다더니 안 죽고 살았구나? >
우쿄는 석진의-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들었다면 위협의 사촌쯤을 느꼈을-
약간 입이 건 말에 조용히 웃어넘겼다.
< はい, こんなに生きています。( 네, 이렇게 살아 있어요.)>
근데, 이야!!! 너도 참 너다!! 그렇다고 진짜로 그걸 입었단 말이야? >
<……안돼? >
<아니. 어울린다는데야 안될 것은 없겠지만 …… 너도 그 선배가 어지간히
좋아진 모양이네. >
<엣? >
우쿄는 화들짝 놀랐다. 왠지 마음속이 뜨끔했다.
<아이!! 그건 아니에요!! >
<아냐? 근데 왜 그렇게 놀래고 그러냐? 너 좀 이상하다? >
< 變は何が? (이상하긴 뭐가? )>
<어라? 말이 짧아지네? 너 많이 컸다? >
둘은 옥신각신하다가 그만 좌측에서 나오는 사람과 우쿄가 정면으로 부딪혀서
우쿄가 껴 안겼다.
<きゃ(꺅)!!! >
<あら(어머)!! >
순간적으로 부딪힌 사람이 들고 있던 서류철書類綴이 후두둑하고 떨어졌고
우쿄는 껴안긴 사람의 품에서 뭉클한 감촉이 느껴져서 상대를 살펴보고
아연실색했다.
우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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