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少年(미소년) - 5부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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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판 2008년 12월 23일
전면수정 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저녁 혁을 배웅하고 같이 들어온 석주와 우쿄는 자못 다정하게 대화를 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석주는 전주에 대해서는 우쿄의 앞에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후 우쿄는 석주가 목욕을 하는 1층의 욕실 문을 살짝 두들겼다.

<お父さん, 背中流してあげましょうか?(아빠, 등 밀어드릴까요?) >
<오, 그래 줄래? 그럼 어디 우리 아들 팔 힘 좀 볼까? >
일단 타올을 길게 꼬아서 머리띠를 만들어서 오른쪽 귀로 매듭을 해서 묶은 우쿄는
입고 있는 흰색과 회색의 격자무늬 유카타의 약간 통이 넓은 소매를 끈으로 묶어
올려서 거의 민 소매로 만들고 밑부분도 허리띠로 올려서 엉덩이를 가릴 정도로만
하체를 덮게 만든 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석주는 우쿄의 모습을 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좀 야하다, 인석아. >
우쿄는 얼굴이 빨개졌다. 안 그래도 우쿄가 입고 있는 유카타는 다소 여성적인
스타일인데다
양팔, 다리가 완전히 노출된 모습은 확실히 우쿄가 진짜 여자였으면, 아니 지금도
우쿄의 가는 몸매 때문에 다소 선정적煽情的이었다.
석주는 벌떡 일어나 욕조에서 나오다 우쿄가 친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고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헛기침을 하며 수건으로 그걸 가리고 밖의 목욕용
의자에 앉았다.
<뭘 그리 내외하고 그래? 같은 그거 달린 남자끼리…… >
우쿄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면서 스폰지에 바디샴푸를 묻혀 거품을 만든 뒤 아버지의
등 앞에 무릎을 꿇고 않아서 정성껏 닦기 시작했다.
등이 상당히 넓다고 느껴졌다.
카스미가 아직 살아 있으면 그녀보다 대략 한살 위일 친 아버지는 박물관에서 본
조선 시대의 초상화의 주인공인 위엄 있는 선비 같다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인 중년남성 특유의 다소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화통하고 호쾌한 면이
그보다 3살 아래인 노조무와는 다른 의미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사진에서 본 젊었을 때의 석주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친 아버지인 석주보다는 양 아버지인 노조무-의 섬세하고 조용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더 닮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가령 어차피 친 아버지의 강건한 신체는 우쿄의 허약한 체질로는 꿈도 꿀 수 없었고
호탕한 성격은 우쿄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런 게 전혀 맞지 않았고 외가의 소박하고 여성적인 분위기가
더 어울렸다.
<너도 아예 홀랑 벗고 같이 목욕하지 그러냐? >
<에엣!! 시, 싫어요!!>
<왜?>
<창피해요.>
<녀석하고는... 같은 남자끼리, 거기다 부자지간에 창피해?>
석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봤더니 뜻밖에도 우쿄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이건 뭐, 가슴만 없고 고추만 달렸지 완전히 계집아이니…… )
딸한테 주책없이 같이 목욕하자고 한 기분이 들어서 석주는 민망해졌다.
그러고 보니 10살 때 일본에서 온천에 처형부부와 같이 장인을 모시고 간 것을 빼고
명색이 친 부자가 같이 목욕한 일이 없었다. 하긴 수줍음이 많른 편인 아들에게는
아직은 친 아버지에게 그럴만큼 완전히 스스럼이 없어진게 아니기도 했다
<센빠이가, 동창同窓 친구분들 데리고 아버지께 인사 드리러 오고 싶다고 언제가
괜찮은지 여쭤 보라던데…… >
<민혁이가? >
석주는 고개를 약간 돌려서 우쿄를 돌아봤다.
욕실의 열기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우쿄가 쓰고 있는 안경이 수증기로 약간 뿌옇게
되어 있었다.
<에에…… >
<흐~~음 다음 주 토요일 저녁이 좋겠다고 전해. 그리고……>
우쿄의 기모노 차림을 잠시 유심히 내려보던 석주는 옷섶으로 얼핏 보이는
가슴팍의 흰 살결을 보고 내심 훔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흠!! 우경이 너도 한번쯤 한복韓服을 입어보는 게 어떻겠니? >
<한복을……요? >
<어려울 것 없어. 아버지가 입는 개량한복 같은 거니까, 기모노도 좋지만
한복도 나쁘진 않지 않겠냐? >
한국에 오면서 우쿄는 기모노를 잔뜩 가져왔다.
자기 옷으로 기모노를 잔득 가져온 우쿄는 처음에 한국에서 노인에게 기모노를
?긴 원한이 아직도 응어리 져 있었다.
거기에 자기 것 만이 아니라 친척들이 우경과 수진에게도 선물로 한벌씩 챙겨줬다.
석주 것은 없었다. 어차피 석주는 기모노를 손도 안 댈 것이 뻔해서였다. 대신에
역사학자로서 군침이 넘어갈만한 일본쪽의 희귀역사자료들과 함께 신사용 최고급
시계가 석주에게 보내졌다. 석주는 기쁘다기보다는 아연실색했다.
장인인 미노루는 한번쯤 석주에게 뭔가 예물 같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물론 딱 두번 그것도 크게 실망을 안긴 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는 석주가
자신의 딸인 우경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고 그로 인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이건 사위에게 손자를 위한 약간 압박의 메시지도 있었다.
실은 우쿄도 가끔 아버지가 입는 개량한복을 입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아니, 괜찮아요. 아직은.....>
<그래 알았다.>
석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등을 다 민 뒤 샤워기를 틀려고 몸을 뒤로 돌렸다.
석주는 뒤에서 움직임이 없어서 다시 뒤를 돌아봤다 또 우쿄의 아담한 엉덩이에
유카타 밑의 완전히 드러난 다리에 또다시 당황해서 고개를 앞으로 돌려버렸다.
샤워기를 손에 쥐고 물 온도를 맞춘 뒤 등에 끼얹었다.
<어흠~~ 시원 하다!! 수고했다. >
슬쩍 우쿄의 허벅지를 두들겨줬다.
우쿄의 다리가 물기에 젖어서 색기色氣를 풍기고 있어서 또다시 당황스러웠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우쿄가 나가고 나서 석주는 방금 전에 우쿄의 미끄러운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던 손바닥을 응시하며 아들을 보고 가볍게 흥분한 것을 상기하고는
쓴웃음을 터트렸다
<원, 남자애가 저렇게 예뻐서야…….. >
친 아들이라는 이 녀석은 마치 여자같이 너무 가녀린데다 심지어 육감적이었다.
우쿄와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라면 몸에 근육도 좀 붙어서 종아리가 좀 울퉁불퉁해야
하고 피부도 운동 등으로 좀 검게 그을리고 털도 수북하게 나야 한다. 얼굴에 수염이
진작에 나야 함은 물론이고 여드름도 날 수 있고 목에 성대도 튀어나와야 하고
목소리도 좀 굵직해야 하고, 체력이라면 석주는 몸매는 호리호리하지만 다부진
체격으로 고등학교때 학교 권투선수로 활약한 데다 소싯적에 동네 씨름대회에서
동네 천하장사로 우승해서 송아지를 상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제대 전에 한국군측 장교였던 석주를 본 어느 미군장교는 석주를 미국으로 초청해 복싱 선수로
키울 궁리까지 했을 정도였다.
석주 자신은 한번도 우쿄가 혈통상 자기 아들인 걸 의심한 적이 없지만 아버지께
손자의 존재를 알려드리려고 친자확인조사를 했을 때 너무 다른 부자父子라 유전자
조사업체에서 의심스럽다고 열 번도 넘게 검사했다더라는 것이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유전적으로 외탁이 심했던 것이다.
업체 직원들이 거의 유전자구조의 10%만 한국인이고 90%는 일본인일 거라고 농담을 했을
정도라는 것이다.
딸인 수진이 집에서 미니스커트나 핫팬츠를 입을 때 가슴팍이 드러난 티를 입건 아예
목욕 후에 노 팬티에 큼직한 목욕타올만 두른 누드로 활보하는 걸 보고 몸매가 예쁘니까
좀 당황한 뒤 주의를 주거나 가볍게 야단을 치고 속으로 우리 딸 이제 시집 보내도 되겠다
하고 흐뭇하게만 생각했던 석주인데 방금 유카타 밖으로 노출된 우쿄의 근육 하나 없이
가는 팔에 수진 못지 않은 각선미를 자랑하는 다리의 솜털 하나 없는 미끄럽고 흰 피부를
보고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우쿄는 평소의 지나치게 얌전한 성격에다 여자아이 같아서 아들이라기 보다 딸
같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작 반년 아래이고 거기다 훨씬 나이가 있어보이는 우석이 거부감 없이
우쿄를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르는 게 아무리 당연하다 해도 사실 의아해서 물어봤다가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로서의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었다.
"그게, 실은 케타로 형은 "형"이라기 보다는 "누나"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차라리 케타로
형이 친누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도 하고....."
사실 이해는 가는 말이었다.

아버지 등을 밀어드리고 나서 욕실을 나와 머리띠로 쓰고 있던 수건으로 팔과 다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끈으로 묶은 소매와 밑을 풀어서 바로 하고 유카타 위에 입는
하오리(羽織)- 얇은 일본식 겉옷-을 걸치며 거실로 들어섰더니
우경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아버님. 별고 없으시죠? 아범요, 네 잘 도착했어요. 지금은 지금 목욕 중이에요.
네. 우경이요? >
일본여성 특유의 나긋나긋한 태도로 통화를 하던 그녀가 시선을 우쿄에게 돌렸고 우쿄는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엄마가 한국어로 말하는 거나 내용으로 미루어 전주에서 온 전화임을 알 수가 있었다.
<우경이는 방금 나갔네요. 네…… >

<お兄ちゃん. どうしたの? 何か氣持ち惡い事があったの?
(오빠. 왜 그래?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자신의 방에서 우쿄에게 수학 교습을 받기 위해 책상에 앉은 수진은 오빠의 표정이 약간
않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쿄는 짐짓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いいえ.(아니야.)>
수진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실은 아까까지 좋았던 기분이 완전히 잡쳐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에 온 뒤 아직까지 전주와 직접 부딪힌 적이 없었다.
설령 집에서 전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통화한다 싶으면 -할아버지가 우쿄를
바꿔달랠까 봐- 우쿄가 집 밖을 나가는 걸로 자리를 피해버려서 에둘러서 대화를
거부拒否 해버렸기 때문이다.
우경이나 수진이라면 거절이 더 쉽고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약 우쿄가 멋도 모르고 받은
전화가 전주에서 온 거라면 그냥 끊어버렸을 것이다.
얼마전에 전주의 친척들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 운이 좋았던지 그때 우쿄는 카스미의
기일이어서 수진과 우석을 데리고 일본에 가 있었다.
우석은 한번쯤 어른들한테 나쁜 나라라고만 거의 세뇌 비슷하게 배워온 일본이라는
나라를 직접 체험하게 해 보는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 때 처음으로 일본을 직접
가본 우석은 고작 며칠 사이에 실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우석이 직접 보고 느낀 일본은 지금까지 배워 온 것처럼 훈도시만 걸치고 칼을 휘두르며
노략질을 일삼던 미개한 왜구倭寇의 나라도 아니었고 하물며 침략전쟁에 광분하는
미치광이들만의 나라도 아니었다.
그들 나름대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전통문화가 있고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마지막 하루에 우쿄와 함께 간 교토에서 본 일본의 고대문화유산 중에서는
조국에서 파견되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던 옛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선조들의 숨결까지 은연중에 느낄 수 있어서 무척 놀랐다.
한편 이번에 일본에 데려갔을 때 처녀-라기보다 소녀-시절의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였던 우경의 모습을 보는 듯한 수진은 우쿄가 약간 뒷전으로 밀리다시피할
정도로 인기만발이었다.
일본의 누나들에게도 수진은 귀여운 동생이어서 한국에서 통화하면 안부를 묻거나
바꿔줘서 통화하게도 했었다.
거기다 이번에 일본어까지 완벽하게 하는 수진을 보자 수진에 대한 외가 친척들의
애정은 더더욱 깊어졌다. 이건 지금것 전주의 친가가 그렇게 내세우는 민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것과는 전연 무관한 한 핏줄에 대한 조건 없는 애정이었고 수진은
그래서 외가가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다.
우쿄에게도 다소 허약한 자기보다 훨씬 건강하고 씩씩한 여동생이 무척 귀여웠다.
무슨 운동이든 다 잘한다고 하지만 특히 유도는 재작년再昨年에 학생부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니 저 예쁘고 가녀린 아이한테 그런 힘이 있나 하고 놀랐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학업도 성적이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오빠인
자신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말괄량이라고는 해도 무척 애교스럽고 마음씨도 착하고 상냥하고 따뜻한
면이 여성적이었다.
지금이야 수진이 일본어를 할 줄 아니까 대화할 때-기왕에 수진의 일본어 능력을
높여줄 생각으로라도- 일본어를 주로 쓰지만 생각해보면 한 때 우쿄가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던 이유 중에 하나가 수진 때문이지 싶었다.
한국의 가족 중에서 제일 먼저- 친부모를 알기 훨씬 전부터- 친해진 사람이 수진이니까……


한편 한국에 와 있다는 친 손자를 한번도 보지 못한 노인은 잔뜩 몸이 달 대로
달아있었다.
서울에 올라갔다 온지 일주일도 안돼 석주를 부른데는 그런 노인의 초조감 때문이었다.
<...... 그럼 이제 슬슬 케타로도 어떻게든 친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주에 갔다 온 일을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남편에게 전해들은 우경은 걱정스럽게 반문했다.
<그야 그렇지만 고녀석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엄두가 안나..... >
우쿄가 한국에 온 며칠 뒤 딱 한번 친 할아버지와 통화를 하게 된 적이 었었는데
결과는 그야말로 대참사大慘事 수준이었다.
석주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장손을 대면시키기가 저어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때도 석주는 석준과 단 둘이 시골에 갔었다. 설날 때 못내려간 일도 있었던 탓이었다.
전주근교 시골에서 읍 사무소 공무원을 하는 틈틈이 농사를 하며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셋째 석영과 장기 휴가로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강권으로 맡겨야 했던-자기 아들도 볼
겸 시골에 휴가 받고 온 막내 석철, 거기에 숙부와 다른 친척어른까지 한적하고 산뜻한
시골 기와 한옥의 옛스러운 사랑방에 모인 자리에서 설에 못온 이유와 우쿄의 근황을
집요하게 묻는 아버지에게 석주가 다소 주저하다가 지금 한국에 와 있음을 말하자
처음에는 믿지 못하다가 두번 세번을 확인하고 무척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거 보십시요, 형님 제가 뭐랬습니까? 그 녀석이 결국은 돌아올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옆에서 석주의 막내 숙부가 자신의 형의 기쁨에 편승하고 있었다.
수양에게는 가까운 친척들이 더 있긴 했지만 직계 가족들이라고는 일제말에 결국
일제에 몰사당하고 형제 둘이 살아남았었다.
그 중에 이 막내인 진양은 친척집에 몰래 의탁하면서 전주의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재작년에 친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우쿄를 학대했던 숙부가 둘째인 대양인데 우쿄의
일로 완전히 수양에 눈 밖에 난 상태여서 명절때나 겨우 볼 정도로 소원해져 있었다.
석주도 자신의 둘째 숙부에게 앙금이 남아 있기는 매 한가지였다.
아니, 확대 재생산 중이어다.
그 양반이 자신의 손자에게는 정반대로 대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지금 미국에 이민가서 살고 있는 아들이 있고 역시 손자가 한명 있었다.
우쿄보다 서너살 위의 아이인데 어렸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아직 한국국적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한국말을 전혀 못하고 자신을 완전히 미국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 좋은데 문제는 자신이 한국인인 사실을 -우쿄처럼 한국에 실망했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일종의 인종주의적인 태도로- 창피하게 여기고 자신의 모국을 열등
후진국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쿄처럼 공부를 잘했다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할렘가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여자와 마약에 빠져 사고나 치고
있어서 미국 이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던 석주의 두살 아래의 사촌동생은
자신의 아들 때문에 사촌형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일 지경이었다.
웃기게도 그 영감은 시건방지게 영어로 상스러운 소리나 떠들어대며 집안 어른들한테
시건방을 떠는 애초에 싹수가 노란 녀석을 "내 손자는 영어를 잘 해!!"하며
금지옥엽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를 미국인이라며 자기 뿌리를 뭣 같이 여기는 녀석은 "어이구 내 새끼"고
일본인으로 자라 일본인일 수 밖에 없었고 한때 친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대해 막연한
동경심까지 있었던 우쿄는 "쪽바리새끼"라며 부당하게 학대했던 것이다.
대양을 기소한 일본쪽 검찰에 의하면 개망나니인 자신의 손자에 내심 실망하던
노인이 우등생이었고 온순했던 우쿄에게 질투와 시기심을 느꼈고 그래서 오히려
자기 손자를 억지로 추켜세우며 우쿄에게 행패를 부렸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우쿄에게 남은 것은 처절한 분노와 원한이었다.
우경과 석주의 신혼 때 후안무치하기 이를데 없는 그 노인은 더 가관이었다.
마산의 산혼 집에 난데없이 -미녀도 모자라 미소녀였던 우경과는 달리 석주도
질릴 덩치에 주근깨가 자글자글하고 미련하게 생긴 촌스런 생김새, 아프리카 토인같은
촌스런 파마머리를 한-시골처자 한명을 데리고 쳐들어왔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우경은 여지없이 그냥 데리고 사는 "첩妾"취급을 당했고 석주는 집안에
왜놈들 피가 섞이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며 우경과 파혼하고 재혼을 강요당하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도 -고등학교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에 외모까지 ,적어도
당시에는 나중의 제자인 혁과 대등한 꽃미남이었던- 석주에게 시집갈 꿈에 부풀어
멋모르고 따라온 처자는 노인은 아니라고 신경쓰지 말랬지만 간난쟁이 딸까지 있는
유부남인 걸 보고 충격을 받아 패닉상태에 빠져 석주에게 "서방님!!"을 연발하며 매달려서
생때까지 부려서 대소동을 겪고 결국 "불효막심한 놈"이라는 노인의 비난을 무시한 채
시골처자와 함께 노인네를 다소 난폭하게 내쫓은 석주는 한동안 졸지에 공처가 신세를
면치 못했을 정도였다.
이미 석주는 그때부터 자신의 둘째 숙부에게 내심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지금 앞의 막내숙부는 다 좋은데 아버지에게 붙어서 알랑방귀를 뀌는게 거슬렸다.
사실 둘째 숙부는 아버지 옆에서 독립운동을 거들다 성인도 안된 나이에 같이 옥고를
치른 적도 있었지만 이 막내숙부는 어렸을 때 몰라서라고는 해도 전주의 친척집에서
창씨개명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제법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던 것은 순전히 맏형의
후광後光덕분이었다. 아니. 친척들 모두가 절세의 애국자로 존경을 받는 수양의 덕을
보려는 아첨꾼들이 들끓고 있었다. 아니.가문의 종손으로 독립운동으로 말도 못할
고생을 하고 해방후에 거의 무너져내린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절대적인 열할을
한 수양을 존경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한 명예와 영광에 휩사여 나이가 들면서 절대적인 권위와 아집만 남은 수양은 문중에서
왕같은 존재였고 석주는 이런 집안의 모습이 마치 자유당시대의 대한민국을 보는 느낌이었다.
사실 수양도 그런 친척동생들이 탐탁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큰 아들인 석주, 둘째 석준과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며느리지만 일본인이었던 우경이었다. 우경은 때때로 시아버지에게 사랑받으려 하고
애교나 아양도 떨고 하지만 사탕발림이나 거짓말 같은 걸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멀리 있으면서도 맏며느로서 집안일을 챙기면서 시아버지가 불쾌해 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필요할 때 충언도 아끼지 않았고 그녀의 말대로 해서 이득을 본 적이 허다했다.
셋째, 막내인 석영과 석철은 아첨같은 것은 없지만 우직한게 지나쳐서 미련하기까지 했다.
석주는 아들중 가장 믿을만하지만 무서운 아버지가 화를 내든말든 어떨 때는 대들다시피
하면서 직언을 해서 애J게 얻어 맞을 때도 있었다.
원래 우쿄와 같은 또래였을 때도 간간히 사고를 치기도 하면서 아버지에게 다소
반항적이었던 석주는 대학진학시에 역사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 사범대를 지원하려다
육군사관학교 지원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격하게 대들며 본격적으로 맞서면서 한 때
사이가 크게 벌어졌었다.
귄위적인 독불장군에 무서운 집안 큰 어른인 수양에게 당당히 대하는 석주를 친척들은
수양 다음으로, 아니 아버지인 수양조차 내심 무서워하기까지 했다.
<녀석도 그때는 철이 없어서 그랬던 거고 형님한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를거요.
제 뿌리가 어디 가나?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젊었을 때 광복군으로 왜놈들과
맞서 싸워 옥고까지 치르고 월남越南에서 빨갱이들을 때려잡은 애국지사 권수양
장군將軍아니오? 그걸 알고 있을 테니 지금 쯤 그런 조상들 앞에서 왜놈들 호적에 몸을
두고 있는 제 처지가 창피하고 할애비한테 불효했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싶을 거요. >
억측인지 희망사항인지 석주는 반박할 기분도 안나서 냉소만 짓고 있었다.
<옳거니!!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동생의 말에 마치 민요의 후렴구처럼 맞장구를 치는 수양은 또다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심지어 언젠가 술이 들어가 도쿄로 전화해서 안 하던 일본어까지 하면서
“너밖에 없다! 무조건 이 할애비 잘못이고 그 어떤 것도 강요 안 하겠다! 이 할애비
소원이니 서울로 와라” 하고 눈물로 호소했다가 냉소섞인 무응답만 듣고 일생일대의
패배감과 굴욕감을 손자한테 느껴야 했던 게 엇그저께 같았다.
그 손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드디어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러 한국에 왔다니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더구나 자신의 장손은 그 어디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이고 그 아이에게 어떻게든 가문의 대와 자신의 뜻을 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재주라면 집안을 항일애국의 명가名家로 더더욱 빛낼 수 있을
것이었다.
석주와 석준이 뭔가 말하고 싶어했지만 말해봤자 수양은 귀에 들어 오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이 할애비를 보러 왔어야지!! 얘, 석주야!! 어여 서울로 전화해라!! >
<에이!! 형님 벼룩도 낮짝이 있다 하지 않소? 그 애가 할애비 보기 미안해서
그런 거라니까!!>
석주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또 숙부가 나섰다.
<어여 전화해라!! 우남이, 아니 우경이 그 애가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친다면 이
할애비 지금이라도 뭐든 것을 용서하고 다 받아줄 것이야!! 전화해서 나를 바꿔다고. 응!!>
잘못이라니? 뭘 잘못을 했고 뉘우쳐야 한단 말인가? 석주는 속으로 약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새삼 두려웠지만 아버지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한 뒤 우쿄를 바꾸게 했다.

우쿄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직도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등으로 정신적인 내전을
겪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가 왔고 우쿄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말에 일본의
외할아버지가 전화온 것으로 지레짐작한 우쿄는 반갑게 전화기를 받았다.
< お爺さん!!(할아버지!!)>
실은 일본으로 오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울면서 때를 쓰는 모습을 보여서 할아버지를
걱정하게 만들었던 게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어떻게든 의젓한 모습을 보여서 안심시키고 싶었다.
근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모국어母國語-일본어-의 정겨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우경이구나. 할애비다!!>
처음에 어안이 벙벙해서 수화기 너머의 한국말의 주인공을 기억해 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우쿄는 급속히 표정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당신은 누구세요?)>
겨우 한마디 하는 우쿄를 옆에서 지켜보는 우경은 아들의 소름이 끼칠만큼 차가운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전화기를 내려보는 눈길에서는 살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수양은 손자의 목소리가 냉랭해진 것을 좀 서먹해서라고 지레짐작했다.
<아. 할애비라니까? 한국에 왔다며? 그것보거라 녀석!! 네 핏줄이 어디 간다더냐?
낄낄낄~~ 그 때는 네가 철이 없어서 뭘 모르고 그랬던 거야. 어찌 콩밭에서 팥이 날
수 있다더냐? 네는 내 손자이니라. 조국을 위해 대대로 왜적들과 맞서서 싸운
자랑스러운 안동권씨 무열공파의 종손이고 이 대한大韓의 아들인 게야.
지금이라도 그걸 깨닫고 오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우리 가문의 높은 민족얼을 네가 이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
노인은 열기에 찬 자신의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이유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청천벽력같은 노성怒聲때문이었다.
< ふざけるな!! くそじじい!!(웃기지 마!! 망할 할아범!!) >
처음에 수양은 자신이 뭔가 잘못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자의 노성은 수화기 밖까지 튀어나와서 석주등도 확실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誰がお前たちみたいな不逞鮮人たちして同じ血と言うか? 我れは日本人だ!!
朝鮮人なんかではない!!犬まねするな!!
(누가 당신들 같은 불령선인들하고 핏줄이라는 거야? 나는 일본인이다!!
죠센징따위가 아냐!! 개수작 하지마!!)>
그 뒤에 전화기가 부서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수양은 아직도 손자의 말이 실감이 안간 채 얼이 빠져 있었고 부인인 순자나 다른
친척들도 -일본어를 모르더라도 이미 익숙한 후테이센진이나 죠센징등의 말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작가주>제가 써넣고도 상당히 쇼크네요;;;;지금 오타 속출중입니다.-
이미 사태를 어느정도 예상한 석주나 석준은 무념무상의 상태였다.

완전히 정지화면같은 상태였던 전주와 달리 서울은 장면이 한가지 더 남아 있었다.
<.......京太郞君.(케타로군.)>
<............この電話は何ですか, お叔母きま。(이 전화는 뭐에요. 이모?)>
안그래도 서울에 와서 다시 우울증과 정서불안을 보이는 상태에서 할아버지에게
극렬한 폭언까지 하는 무서운 모습의 아들에게 두려움까지 들었던 우경은 평소의
대범했던 그녀의 본 모습은 어디갔나 싶게 겨우 더듬 거리며 대답을 해야 했다.
< し, 實は オ,お爺さんがケ,京太郞君とツ,通話したいと言って... 孫だから. あなたの長孫だから.....
(시, 실은 하,할아버지께서 케,케타로랑 통화하고 싶다고 하셔서... 손자니까. 당신의
맏손자니까.....)>
우쿄는 무표정하지만 차갑게 자신의 친 엄마를 응시하다가 풀이 죽어서 올라갔다.
잠시뒤에 우경이 우쿄를 찾았을 때 우쿄는 2층 테라스에 있는 대나무로 된 여름용
평상에 쭈구리고 앉아서 화가 난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私はその人間たちと言うことがない!! どうせ出る言葉はそらぞらしいから .....
どうせこの國に味方は一人もいないことだ..... この國は我が國ではないから.....
(난 그 사람들하고 할말이 없어!! 어차피 나올 말은 뻔하니까……어차피 이 나라에
내 편은 한 명도 없는 거야..... 이 나라는 -어차피-내 나라가 아니니까.....) >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중얼거리며 우쿄는 동남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국故國있는 방향을 응시하는 소년의 손등에 눈물이 떨어져 흐르고 있었고 본의
아니게 아들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안기고 만 우경은 아들에게 뭐라 할 말이 생각
안나서 그냥 지켜만 봤다.

이윽고 수양은 다시금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으며 자리보전하고 누워버렸다.
모두들 어두운 침묵속에 싸여버렸다.
<우리 집안이 망조가 든 게야~~>
석주의 어머니인 순자는 넋두리를 하는 남편의 머리에다 찬물에 적신 수건을 얹졌다.
순자도 너무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정 많고 순박하기만 한 시골아낙인 그녀는 어렸을 때 일본인의 집에서 갖은 학대와
멸시를 당하며 식모살이를 하다가 학살당할 뻔 한 일까지 있어서 일본인에 공포증이
있었다.
2년여만에 간접적으로 목소리를 듣는 손자의 모습은 전의 가련한 손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몸서리쳐지게 두려운 그 "일본인"의 그것이었다.
맏며느리이지만 본래 그 일본인 중에 한명이었던 우경은 그런 시어머니를 위해
시누이에게 "불여우"라는 놀림을 받을만큼 약삭빠를 정도로 그런 모습을 불식시키면서
먼저 시어머니께 이쁨 받으려 노력했고 그래서 순자는 여느 며느리중에 우경을 가장
귀여워했고 권씨일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도와주었다.
석주로서는 괘씸하기는 하지만 차라리 아들이 잘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노인들에게 현실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게 나중의 사태 전개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이제 어떡 할 것이냐?>
어른들 중에 한명이 석주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뭘 말입니까?>
<네 아들이지 않더냐?>
<물론 우경이는 제 아들입니다. 그리고 핏줄상 우리가문의 종손이지요.
하지만, 그 아이는 현재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입니다.>
마지못해 나리타 공항까지 왔다가 배웅 온 외할아버지에게 매달려서 한국에
가기 싫다고 울기까지 해서 옆에서 석주를 민망하게 만들었던 우쿄는 아들을 데리러
일본에 온 자기 친 아버지에게 자신의 국적문제나 성명姓名문제를 확실히 다짐해
두고서야 간신히 짐을 쌌던 것이다.
친부모와는 상관 없이 이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누가 뭐래도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굳혀버린 지금으로서는 귀화의 귀자도 못 꺼낼 상황이었고 석주는 이제 “다 젊었을
때 처자식 건사를 제대로 못한 죄이거니” 하고 아들의 국적이나 성씨에 대해 굳이
구애拘碍받지 않기로 했다.
아니, 애초에 친가든 누구든 버려놓고 거들떠도 안보다가 이제 와서 종손이네 뭐네
하면서 욕심을 앞세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친가나 친 할아버지에게 우쿄는 석주에게 내색은 않지만 누나들한테 한 말을 들은
바로는 “저 사람들”때문에 자기 친부모들이 아들까지 잃는 불행을 겪어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까지 못살게 군다며 “철저히 남” 취급인 실정이다.
이만큼 친가에 격렬한 원한을 품고도 다시 한국으로 오기로 한 것만도 우쿄로서는
엄청난 고민 끝에 나온 결단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석주로서는 그 결단에 부응해줄 필요가 있었다.
또다시 친가에서 -우쿄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종손으로서의 의무와 반일감정을
앞세워 우쿄에게 귀화를 강요한다면 아마 우쿄는 격렬히 거부할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껏 마냥 착한 아이였던 우쿄는 아마 순종만이 능사가 아님을 배운 모양이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그 아이의 일은 무조건 그 아이의 자유의사에 맡길
테니까, 앞으로 절대 간섭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 문제로 괴롭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네놈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아들이, 우리 집안의 종손이 왜놈들 호적을
가지고 살아도 좋단 말이더냐?>
< 네, 저는 이제 그딴 일로 내 아들이 더는 불행해지는 걸 안 바랍니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안동 권씨든 사오토메씨든 호적에 누구 아들로 되어 있든 적어도 “우리
우경이”가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절대 안 변하니까 말입니다. >
석주의 설명에 반발하듯 묻는 어른들 중 한명에게 무 자르듯 박절하게 대답하는 석주의
말에 다들 침통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형. 그게 무슨 소리야. 형 아들이고 우리 종손이면 당연히...>
<닥쳐!! 일이 이 지경이 된 게 네가 애초에 도쿄 처가까지 쫓아가서 지랄 떤 것도
원인이 아냐!!! 거기가 어디라고 대한민국 육군 망신까지 시키면서 그지랄이었어?
한마디만 더해라. 그때는 이빨이 세개 나간 걸로 끝났지만 이제는 아예
틀니를 끼게 만들어 줄테니까!!>
석주는 형의 말에 반발하며 이의를 제기하려는 석철에게 일갈했다.
석철은 도쿄까지 가서 우쿄와 외가에서 우쿄를 데려가겠다고 행패를 부렸다가
일본 경찰에 입건되서 아예 구속당할 뻔 했다.
겨우 경찰서에서 빼자마자 석주는 철 없는 막내동생한테 주먹을 꽃아 넣었고 석철은
옆의 일본경찰들이 석주를 말려서 겨우 한대만 맞고 끝났지만 단 한방에 치아가 세개나
상해서 한동안 치과 신세를 져야 했다. 어렸을 때도 형이 보호해주기만 하고 맞은 적은
없었는데 말로만 듣다 어른이 되어서 맛 보는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권투선수였던 형의
주먹은 자신이 했던 표현을 그대로 빌어서 "마이크 타이슨도 울고갈 핵주먹"이었다.
하여튼 석철의 추태는 본래 한국에 호의적이었던 처가의 반한감정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우경이 우쿄의 일본군 코스프레 사건으로 소박맞을 뻔 하기 전에 처가에서 석주와
이혼시키고 우경등을 일본으로 데려오려 들었을 정도였다.
석주는 다시 아버지에게 알랑방귀를 뀌던 숙부에게 냉소하듯 반문했다.
<미안해서라고요? 잘못을 빌고 싶어서 어쩌구 어째요? 그 아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단
말입니까? 오히려 우리 집안 전체가 우경이에게 잘못을 빌어도 시원치 않을 겁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게 결국 우경이에게 정을 줄 생각을 않고 처음부터 이 집안의 잘나
빠진 애국가풍만 강요하고 일본인의 피가 섞인 게 무슨 죽을죄인양 취급하며 핍박한
때문이 아닙니까?
처음에 정을 들이고 나서야 핏줄이 있고 애국이 있고 조국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모두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극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작은 아버님의 말씀은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군요. 역겹습니다!!>
내뱉듯 말하고 석주는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이번만은 고향 집이 한시도 더 있기 싫어졌다. 석준도 따라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다소 냉담하게 인사하는 아들에게 수양은 간신히 일어나서 말했다.
<그 아이의 정신에 조금이라도 민족얼이 스며들기 전에는 나는 그 아이를 손자로 여기지
않겠다. 그 아이의 마음에 간악한 왜적倭賊들의 정신대신에 우리 한국인의 거룩한
민족정기가 자리 잡기 전에는 그 아이는 내 손자가 아니다. 나는 왜놈을 손자로 둔 적이
없다.>
감동적일만치 애국적이지만 전혀 깨달은게 없다는 아버지의 태도에 울컥한 석주는 뒤돌아서서
아버지를 노려보고 한마디 했다.
<아버지가 그 아이를 언제 손자라고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나 있으셨어요?
내 아내 우경이나 수진이는요? 왜놈, 왜년이라고 다들 막대하려고만 했지!!!>
석주는 그 말을 끝으로 대문이라도 발로 차서 부숴버릴듯한 기세로 나와버렸다.
석준이 따라와 자신의 자가용의 문을 열려고 했다.
<석준아. 담배 있냐?>
<왠일로 형이 담배를 다 찾아?>
석준은 형이 교직에 몸 담기 시작하며 금연한 이래 입에 안대던 담배를 찾자
담배를 건네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줬다. 석주는 단숨에 담배 한개비를 태워버릴
듯이 들이키고는 전주시 근교 시골의 청명한 늦겨울 하늘을 향해 상당한 높이까지
연기를 뿜어올렸다. 근 15년만에 피우는 담배가 쓰디썼다.
<젠장!! 모두에게 못할 짓을 하는 군!!>
<형은 형수와 결혼이 후회돼?>
<이럴때마다, 형수가 무슨 질못이냐? 괜히 나 때문에 낮선 나라까지 시집와서 힘들어하고
마음 고생한게 한두번이야? 나만 아니었으면 더 사랑 받고 행복했을 여자야. 거기에 아들
녀석한테까지 그런 고통을 되물림 시킨 셈이잖아.>
<형은? >
<나야 내 아내 우경이외에 다른게 있겠어? >
<형수 사랑하지?>
<당연하지!!>
<그럼 된 거야!! 형수도 우리 영희한테 했던 말이 있는데 형과 결혼 한 걸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데. 형수같은 미녀에다 좋은 여자도 없잖아? 어떤 희생을 치르든 지켜낼
가치도 무궁무진하고.....>
<녀석하고는....>
석준도 처음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제들 중 가장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형이 동생인
자신보다 3년이나 늦게 일본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말에 무척 놀라고 아연실색했었다.
다른 형제들은 심지어 다소 배신감까지 느꼈었다.
하지만 석준은 맨 처음에 우경을 보자마자 우경의 빼어난 외모에 홀랑 반해 찬성으로
돌아섰고 그 뒤 우경을 여러가지로 겪게되면서 형수로서 존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형제들 중에 석준은 두 부부의 가장 막강한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우쿄에 대해서도 일가 친척들이 우쿄에게 저지른 짓거리를 생각하면 일정부분
마찬가지였다.
석준은 형이 언잖은 표정을 겨우 풀어내며 웃는 모습을 보이자 같이 기분이 풀어졌다.


두어달 전의 일이 되살아나자 석주는 다시금 머리가 아파왔다.
물론 후폭풍이 없을 수 없었다.
서울에 도착한 뒤 석주는 할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냐며 우쿄를 - 매는
못들고- 야단쳤고 우쿄는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며 대들고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한동안 또다시 부자간에 냉기류가 흘렀었다.
그만큼 친가 쪽에 대한 우쿄의 적개심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우쿄의 친 아버지에 대한 감정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아버지는 사랑하지만 친가는 증오憎하고 있었고 그때의 그 통화로 친아버지와의
마찰마저 감수하면서까지 - 어쩌면 얻어맞을 각오로-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표방標榜했던 것이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의 일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작년에 일본으로 돌아간 얼마뒤 할아버지와 이모들이 얘기를 해준데다 한국으로
다시 온 얼마 뒤에 아버지와 엄마의 당시 일기를 몰래 읽은 걸로 외가친척들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친부모(석주,우경) 와 원래 부모(노조무, 카스미)는 당시에 우쿄를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자기자신의 이기심은 완전해 배제한 채-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거기다 친부모는 결코 자신을 버린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면서 친아들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친가의 친척들이라는 인간들은 처음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 엄마를
배척했고 나중에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속으로 일본여자라고 한동안 푸대접했다.
우경의 마음고생이 심했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만도 용서할 수 없는데
그로부터 한참 뒤에 그들은 옛날 일에 대해서는 사과 한마디 없이 낮 두껍게도 우쿄를
한국으로 데려오게 해서는 얼토당토 않게 종손의 의무를 강요하고 귀화를 강요하고
일본인이라며 핍박과 학대를 했던 것이다.
그 점에서는 우쿄의 일에 대해 독단적이고 무책임했던 친할아버지라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당시 석주가 남자로서의 책임을 내세워 우경과 결혼하겠다고 다른 친척들한테
욕까지 먹어가며 강경하게 주장하지 않았다면 우경은 자기 여동생을 마음속 깊이
사랑한 카스미가 아니었으면 미혼모로 심한 고생을 하게 됐을 게 분명했다.
설령 우쿄에게 혈육으로 애정을 느꼈더라도 순전히 “자신의 대를 이을 종손”이라는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려 들뿐이고 자신의 신념만을 강요할 뿐이지 손자지만 일본인
“사오토메 우쿄”라는 존재에는 철저히 부정하는 태도였다.
일본인인 우쿄에게 있을 턱이 없는 “한국인으로서의 애국심”을 강요하며 무조건
그런 걸 버리고 자신의 한국인 종손이 되어야 한다는 생떼만 부려댔던 것이다.
우쿄로서는 그들에게 원한만 있을 뿐이지, 애초에 일말의 정情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우쿄에게 순전純全한 한국인 혈육은 친아버지 석주 한 명뿐이다.
거기에 바로 바로 아래 숙부인 석준이나 진심으로 우쿄를 따라주는 우석이 특별히
들어가지만 그 외에는 누구도 인정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오면서 우쿄는, 일본의 집에서도 우쿄의 국적이나 성씨에 대해 못을
박았고 석주도 그걸 인정해주고 전주에 전해줬다고 한다. 그 뒷 사정은 알 수 없었고
그들이 납득하고 안하고는 우쿄로서는 알 바 아니었다.
그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를 용서할 수 없었던 우쿄로서는 애초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도 의무도 없었고 그들이 우쿄에게 그런 걸 강요할 그 어떤 권리도
없었다.
애초에 법적으로 우쿄와 그들은 철저히 남일 뿐이다.
우쿄는 그들에게 일말의 자비심도 베풀 의사가 없었다.
아니, 상대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래서 친아버지를 보기 미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 후에 아버지
앞에서는 그런 감정을 숨기느라 힘들었다.
지금은 다행히 우쿄가 전주의 할아버지하고 접촉이 없다보니 어느 정도는
정서적인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케타로는 어느정도는 방어적으로 그랬었던 거예요. 물론 단호하게 입장을
표방할 필요가 있다고 미리 생각해 두긴 했겠디만.....>
<그야 그렇지....... 그때는 한국에 오기로 한 것만도 엄청난 결심이었을테고
옛날 일들 때문에 내심 불안했을 텐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친할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니 불안하기도 하고 당황해서 그대로 감정이 나와버렸던 것일
거야. 지금은 과연 얼마나 감정이 정리되었느냐가 관권이지. >
확실히 한국에 온 뒤로 그때를 마지막으로 전주나 할아버지 얘기는 한마디도
안했다.
아니, 피했다. 석주로서는 우쿄에게 시간을 좀 더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 뒤로 손자 얼굴을 아예 안 볼 것 같던 수양은 어쩌다 서울에 전화해서
하다못해지나가는 말로라도 우쿄의 근황을 묻다가 이제는 아예 안달이 나 있었다.
<...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마침 아버님도 전화하시고 했으니까...>
그러고 난 우경은 2층으로 올라갔다.
석주는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쿄와 수진의 과외가 이루어지고 있는 방의 어차피 열려 있는 문에서 똑똑하는 소리
후에 우경이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빠는 요?>
<서재에 계셔. 공부는 다 했니?>
<방금요.>
<그래? 그럼 저기 수진아. 미안하지만 오빠랑 할 말이 있는데..... 잠깐 아빠랑 같이 있지
않을래?>
<그럴게요.... >
수진은 곧바로 일어서서 1층으로 내려갔다.
가지런히 묶어서 앞으로 다소곳이 놓은 머리에 크림색 스웨터에 보라색 스커트 차림의
우경은 수진의 침대에 걸터앉았고 우쿄도 의자를 엄마 쪽으로 돌려 앉았다.
<ねえ, ケイちゃん. お爺さんが あなたとすごく通話したがっていたよ.
(저기, 케타로. 할아버지께서 너랑 무척 통화하고 싶어하시더라.) >
<お爺さん? 東京で? 昨日も通話したんですか?
(할아버지? 도쿄에서요? 어제도 통화했는데요?) >
우쿄는 짐짓 시치미를 뚝 뗐다.
우경은 쓴 웃음을 지었다.
<この子は, 東京ではなく全州の親お爺さんね。
(얘는, 도쿄가 아니라 전주의 친할아버지 말야.) >
(誰が親お爺さんですか?(누가 친할아버지예요?) )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 全州の親戚らが憎いことは分かるがそれでもお父さんを見て一度聲でも聞こえて
上げることも惡くないじゃないの? (전주의 친척들이 미운 건 알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봐서 한번쯤 목소리라도 들려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니?) >
어린 아이를 달래듯 말하는 우경은 한쪽 발을 침대 위에 올려서 무릎을 세웠다.
올라간 쪽에서 우경의 스타킹이 신겨진 예쁜 발이 살짝 삐쳐졌다.
다른 쪽은 발목까지 오던 스커트가 종아리까지 올라가 요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쿄는 유카타의 소매 안에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 책상위의 한국어로 된 고등학교
수학교과서만 응시했다.
<もちろん親お父さんや韓國の親戚の方たちが京太郞に多くの過ちをしたことが事實だ。
しかし京太郞も分かるように彼らとしてはそれもそのはずなかったの。 京太郞もそれは分かる。
そしてそうだとして京太郞が無制限彼らを憎んでばかりして遠ざけようとばかり入ったら
お父さんは表ではとにかくすごく悲しんで息苦しいの。
それに方法が間違ったりしても親お爺さんはお前を憎んでそうなことではないんじゃないの?
お爺さんも實はお前にたくさんすまないと思うの。
(물론 친 아버지나 한국의 친척분들이 케타로에게 많은 잘못을 한 게 사실이야. 하지만
케타로도 알다시피 그들로서는 -과거의 감정상-그럴 수밖에 없었어. 케타로도 그건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케타로가 무한정 그들을 미워하기만 하고 멀리하려고만 든다면
아버지는 겉으로는 어쨌든 무척 슬퍼하고 답답하실 거야. 게다가 방법이 잘못되긴 해도
친 할아버지께서는 너를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잖니? 할아버지께서도 실은 너에게 많이
미안해 하실걸?) >
<......私が何が分かりますが?(......제가 뭘 아는데요?)>
<엣?>
갑작스런 우쿄의 질문에 우경은 다소 당혹해했다.
당황해서 내뱉는 "엣?" 소리가 더 볼 것 없는 일본여성의 그것이었다.
< そ, それが.... そうだから...... (그, 그게.... 그러니까...... )>
아까 우쿄의 반문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우쿄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친가의 감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우쿄의 감정까지 풀게 하지는 못했다. 아니 모든 것을 납득하게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애초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정당화 시킬 수 없는 것들이었다.
<..... 考えはして見ますよ, しかし期待はしないでください。
(......생각은 해볼게요.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
우쿄는 우경을 더이상 당혹케 하기 싫어서 대답했다. 퉁명스럽고 차갑게 말하는 게 결국
거절이지만 그나마 전보다는 나아졌다는 느낌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쉰 우경이 일어나 우쿄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우쿄의 얼굴이 우경의 양 가슴 사이에 묻혔다.
엄마의 체취와 풍만한 가슴의 감촉이 날카로워진 우쿄의 마음을 진정시켜줬다.
우쿄의 양 팔이 우경의 허리를 감쌌다. 우쿄는 얼굴을 우경의 가슴에 깊숙히
파고들었고 우경은 아들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お母さん, ごめんなさい。しかし…… (엄마, 미안해요. 하지만…… ) >
< あなたの心をよく分かります。 (네 맘 잘 알아…… ) >
우쿄는 엄마의 가슴팍을 파고들던 얼굴을 올렸다.
우경의 부드러운 입술이 우쿄의 뺨을 가볍게 애무했다.
우쿄는 착하고 귀여운 아이이다.
그런 애가 자신의 혈육에게 이렇게 심한 미움을 가지고 있는 게 안쓰럽다는 느낌이다.
더구나 실은 우쿄가 친가에 받았던 상처는 우경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적인 것이다.
지금이야 우경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사려 깊게 행동해온 덕분에 맏며느리로써
인정을 받고 동서들에게 큰 언니로 존경받고 있지만 결혼을 전후해 시댁 친척들의
반일감정에다 심지어 일본인, 특히 일본여성에 대한 근거가 희박한 별의별 편견까지
극복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석주가 자신의 아내를 철두철미徹頭徹尾한 신뢰와 사랑으로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힘겨운 외국에서의 결혼생활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경의 인내심보다 우쿄의 적개심이 더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우경이 방을 나간 뒤 우쿄는 고개를 떨군 채 다시금 우울한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우쿄는 더이상 자기 때문에 우경과 석주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우쿄는 학교에서 쉬는 틈에 혁에게 가서 석주의 대답을 전했다.
<그래 수고했어, 고마워.>
머리를 쓰다듬는 혁의 손길에 우쿄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아, 센빠이. 저 오늘 동아리 활동 있는데 와주실래요? 전의 그 곡은 좀 엉성한 점이
있어서 고쳤는데 센빠이한테 들려드리고 싶어요.>
<그래, 그럼 이따가 음악동아리 방으로 갈게. >
그리고 방과후 혁은 미키, 영진과 함께 음악동아리를 방문했다.
가는 도중에 혁은 미키. 영진과 마주쳤고 일전에 본 우쿄의 음악실력을 얘기하게 된 것이다.
<참말 이가? 아, 대단하네이!!! >
<나도 놀랐었어. 그 아이가 피아노 연주를 하는 건 처음 봤는데 그것도 자작곡이라니…… >
<보면 볼수록 놀라운 아이지 않아요? >
중국풍 단화에 민 소매의 파란색 치파오旗袍-차이나 드레스 차림의 미키도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한쪽 옆이 엉덩이 바로 밑까지 트이고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 차이나 드레스가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를 더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왼팔의 어깨 언저리에는 중국풍의 장신구가 채여 있었다.
그녀는 중국풍의 의복을 주로 입는 편으로 그게 그녀에게 상당히 어울렸다.
하이힐이 아니어도 미키의 키는 꽤 컸다.
며칠 전에 미키는 우쿄가 속한 클래스에 쪽지시험을 쳤었다.
들으라는 강의는 안 듣고 자기 몸매만 보면서 침만 꼴딱꼴딱 삼키는 남학생들이
얄미워서 일부러 엄청 어렵게 출제出題했었고 덕분에 학생들은 염불은 젖혀놓고
제삿밥만 밝힌 대가를 아주 톡톡히 치렀는데 유독 우쿄만 만점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우쿄의 점수가 가장 높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내심 놀랐었다.
실은 웬만큼 성실하게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해도 만점은 어려웠을 터인데…….
이윽고 세 사람이 음악동아리 방에 고개를 내밀자 발목을 교차하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음료수 캔을 아래에 쥐고 미나와 얘기하고
있던 감색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의 우쿄가 세 사람을 보고 일어서서 목례를 했고
동아리 방장인 소현이 세 사람을 맞아줬다.
<어서들 오세요. 우리대학의 미남미녀 두 분이 우리 동아리에는 웬일로….>
<아, 우리 조교수님이 자기 애제자愛弟子가 음악을 잘 한다더라는 얘기를 듣고 한번
들어보고 싶다 길래…… >
우쿄는 상당히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그냥 취미로 한다는 것 치고는 악기를 다루는 솜씨나 작곡실력이 상당히
뛰어나요.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어서 좀 어설픈 면이 있지만, 아마 제대로 배우면
뛰어난 음악가가 될 거예요. >
<맞아. 케이는 인문계로 나서지 말고 음악학과를 지망했어야 했어. >
동아리 방의 팀원들이 우쿄의 칭찬을 한마디씩 해줘서 우쿄는 더 창피했다.
그래도 자기의 선생인 미키가 자신의 음악연주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을 보고
보답도 하고 싶어서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저번에 연주했던 것보다는 약간 나을 거예요. 미나 선배님이 조언을 해주셔서 좀
고쳤거든요. >
피아노를 연주하려다가 생각난 듯 옆의 사람에게 기타를 빌렸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 그 음악 피아노 곡 아니었니? >
<…….기타용이기도 한데, 그럼 피아노로 할까요? >
<아니. 너 편할 대로 해. >
우쿄는 자세를 바로 했다. 우쿄가 주로 사용하던 기타는 클래식인데 지금 것은 그냥
통기타여서 약간 어색하지 싶었다.
고개를 헤드 쪽으로 약간 기운 채 눈을 지긋이 감고 현弦을 튕기기 시작했다.
실내는 우쿄가 연주하는 기타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하면서 신비스러운 음률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우울의 심연 같은 게 느껴져서 모두들 숨소리조차 죽인 채 점차 우쿄의
농익은 선율에 빠져들었다.
혁은 지금 연주하는 곡이 전의 것과 같은데 전보다 더 완성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혁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록 밴드부에 들어가 매니저로 활동한 적이 있어서 음악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음악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다들 침묵에 싸여 있었다.
< あら, 私がどうしてこういうの? (어머, 내가 왜 이러지? )>
넋을 놓고 있던 미키가 자신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음을 감지하고 서둘러서 닦아냈다.
혁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혁이 알고 있는 미키는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눈물을
보이지 않는 심지가 굳은 여자인데 우쿄의 음악이 그녀의 여성적인 감성을 깨운 듯 했다.

그날 저녁에 전원 학교 앞의 호프를 겸한 라이브 카페에 들어앉았다.
완전히 독일풍으로 실내인테리어를 꾸민 널찍한 홀 안에서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이
우쿄를 보고 좀 난처한 반응을 보였다.
<저기 죄송하지만, 손님, 여기는 이 시간에 초등학생은….. >
일동 폭소를 터트렸다. 우쿄의 양 옆에 앉아 있는 미키와 미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주면서도 웃음을 그칠 줄 모르고…..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는데 이 친구도 대학생 맞아요. >
종업원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들어올 때 봤더니 초딩 치고는 키가 좀 크던가?
결국 약간 골이 난 표정을 지으며 우쿄가 지갑에서 학생증과 외국인등록증을 꺼내서
보여줬다.
<…………. 일본인? 대학생은 맞지만 그래도 나이상으로는 미성년자인데…… >
<보호자를 대동하면 괜찮지 않아요? >
혁이 별걸 다 따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선배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다들 책임감 있는 어른이니까 걱정 말아요. 아무렴 우리가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애한테 술을 먹이겠수?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콩밥 먹기 싫다고요~~~ >
<얘네 나라에서는 법적으로 성인이니까 괜찮을 거예요.(물론 거짓말;;;) >
<내는 마 야보다 더 어릴 때부터 소주를 병나발 불었는데 뭐 어떻노? >
다들 벙찐 표정으로 영진을 쳐다봤다. 그건 좀 문제가 있는데……
종업원은 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 네 알았습니다…… >
잠시 후에 음료수를 선택한 우쿄 외에 생맥주를 한잔씩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자연히 우쿄의 작곡실력과 음악연주실력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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